매일성경 묵상
모압을 향한 심판 [이사야 16:1-14]
– 2026년 08월 04일
– 2026년 08월 04일 –
위기의 상황 속에 있는 모압에 대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며, 동시에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압은 교만함으로 자신들의 풍족함을 자랑하였고, 이에 대해 오직 시온으로 나아오는 길 외에는 회복이 없음을 선포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은 3년 내에 이루어질 것을 예고함을 통해,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1. 모압 회복의 길(1-5)
모압이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모압이 어린양을 바쳐야할 나라는 유다인데, 유다는 모압에 비해 약소국이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모압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유다의 밑으로 나아가야함을 말하고 있다. 아르논강은 모압의 경계로, 모압의 위기 속에 여기까지 밀려왔음을 보여준다. (2절)
이후 3절에서 ‘너’는 곧 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곧, 모압 사람들이 시온으로 도망 왔을 때에,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이를 통해 이들이 피할 곳은 ‘다윗의 장막’이며, ‘그 위에 앉을 자’는 정의와 공의로 행할 것을 예언한다.(5절) 결국 모압은, ‘다윗의 장막’ 아래에 들어올 때에 그 안에서만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2.모압의 교만함(6-12)
6-12절에서는 다시 모압을 향한 심판의 내용이 나온다. 모압은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죄를 돌이키지 않았고, 교만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압은 통곡할 것이다. 특히 당시 모압에서 생산된 포도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었다. 이 모압의 자랑인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마른다. (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9절) 결국 에언자는, 풍요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바라보며 눈물 가운데 바라본다.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 폐허 속에, 일을 함께할 사람들도 없다.(10절)
예언자는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모압이 산당에서 봉사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더라도 지금의 이 싱황이 바꾸지 않을 것이다. (12절)
3_모압 심판의 확실성(13-14)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오랮 전부터 하신 말씀이다. 앞으로 3년 내에, 모압의 영화는 심판을 받아, 심히 적은 수가 남을 것을 에언한다. 기한과 상세한 내용까지 확정하여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함과 긴박함을 보여준다.
나는?
-모압을 향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동, ‘다윗의 장막’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라는 나라를 심판하는 과정 중에서도 피할 길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모압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면 산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로 나아가면, 살 길이 얼린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에수님께서 곧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셨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알지 못한 채, 예언의 내용만을 들었겠지만, 이제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모든 회복을 가져오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모압의 멸망의 이유는 역시 교만이었다.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포도나무의 소산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제하시고, 멸망시키신다. 교만이란, 내가 높아지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그 분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더욱 주님께 물으며, 겸손히 있어야겠다.
1. 모압 회복의 길(1-5)
모압이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모압이 어린양을 바쳐야할 나라는 유다인데, 유다는 모압에 비해 약소국이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모압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유다의 밑으로 나아가야함을 말하고 있다. 아르논강은 모압의 경계로, 모압의 위기 속에 여기까지 밀려왔음을 보여준다. (2절)
이후 3절에서 ‘너’는 곧 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곧, 모압 사람들이 시온으로 도망 왔을 때에,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이를 통해 이들이 피할 곳은 ‘다윗의 장막’이며, ‘그 위에 앉을 자’는 정의와 공의로 행할 것을 예언한다.(5절) 결국 모압은, ‘다윗의 장막’ 아래에 들어올 때에 그 안에서만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2.모압의 교만함(6-12)
6-12절에서는 다시 모압을 향한 심판의 내용이 나온다. 모압은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죄를 돌이키지 않았고, 교만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압은 통곡할 것이다. 특히 당시 모압에서 생산된 포도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었다. 이 모압의 자랑인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마른다. (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9절) 결국 에언자는, 풍요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바라보며 눈물 가운데 바라본다.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 폐허 속에, 일을 함께할 사람들도 없다.(10절)
예언자는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모압이 산당에서 봉사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더라도 지금의 이 싱황이 바꾸지 않을 것이다. (12절)
3_모압 심판의 확실성(13-14)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오랮 전부터 하신 말씀이다. 앞으로 3년 내에, 모압의 영화는 심판을 받아, 심히 적은 수가 남을 것을 에언한다. 기한과 상세한 내용까지 확정하여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함과 긴박함을 보여준다.
나는?
-모압을 향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동, ‘다윗의 장막’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라는 나라를 심판하는 과정 중에서도 피할 길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모압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면 산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로 나아가면, 살 길이 얼린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에수님께서 곧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셨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알지 못한 채, 예언의 내용만을 들었겠지만, 이제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모든 회복을 가져오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모압의 멸망의 이유는 역시 교만이었다.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포도나무의 소산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제하시고, 멸망시키신다. 교만이란, 내가 높아지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그 분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더욱 주님께 물으며, 겸손히 있어야겠다.
+ 기도제목
*하나님 오늘 모압의 심판의 과정을 봅니다.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시는 예수님께로 오늘도 달려가겠습니다. 이 하루의 삶 속에 주님이 함께하여주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3년 이라는 마지막 시기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이라는 기회와 시간을 귀히 여기며 맡기신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없이 무엇이든 행하려 하는 교만의 씨앗들을 말씀과 기도 속에 버리기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이오니, 주만 따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3년 이라는 마지막 시기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이라는 기회와 시간을 귀히 여기며 맡기신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없이 무엇이든 행하려 하는 교만의 씨앗들을 말씀과 기도 속에 버리기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이오니, 주만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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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4일
모압을 향한 심판
[이사야 16:1-14]
위기의 상황 속에 있는 모압에 대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며, 동시에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압은 교만함으로 자신들의 풍족함을 자랑하였고, 이에 대해 오직 시온으로 나아오는 길 외에는 회복이 없음을 선포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은 3년 내에 이루어질 것을 예고함을 통해,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1. 모압 회복의 길(1-5)
모압이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모압이 어린양을 바쳐야할 나라는 유다인데, 유다는 모압에 비해 약소국이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모압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유다의 밑으로 나아가야함을 말하고 있다. 아르논강은 모압의 경계로, 모압의 위기 속에 여기까지 밀려왔음을 보여준다. (2절)
이후 3절에서 ‘너’는 곧 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곧, 모압 사람들이 시온으로 도망 왔을 때에,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이를 통해 이들이 피할 곳은 ‘다윗의 장막’이며, ‘그 위에 앉을 자’는 정의와 공의로 행할 것을 예언한다.(5절) 결국 모압은, ‘다윗의 장막’ 아래에 들어올 때에 그 안에서만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2.모압의 교만함(6-12)
6-12절에서는 다시 모압을 향한 심판의 내용이 나온다. 모압은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죄를 돌이키지 않았고, 교만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압은 통곡할 것이다. 특히 당시 모압에서 생산된 포도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었다. 이 모압의 자랑인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마른다. (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9절) 결국 에언자는, 풍요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바라보며 눈물 가운데 바라본다.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 폐허 속에, 일을 함께할 사람들도 없다.(10절)
예언자는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모압이 산당에서 봉사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더라도 지금의 이 싱황이 바꾸지 않을 것이다. (12절)
3_모압 심판의 확실성(13-14)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오랮 전부터 하신 말씀이다. 앞으로 3년 내에, 모압의 영화는 심판을 받아, 심히 적은 수가 남을 것을 에언한다. 기한과 상세한 내용까지 확정하여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함과 긴박함을 보여준다.
나는?
-모압을 향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동, ‘다윗의 장막’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라는 나라를 심판하는 과정 중에서도 피할 길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모압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면 산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로 나아가면, 살 길이 얼린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에수님께서 곧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셨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알지 못한 채, 예언의 내용만을 들었겠지만, 이제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모든 회복을 가져오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모압의 멸망의 이유는 역시 교만이었다.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포도나무의 소산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제하시고, 멸망시키신다. 교만이란, 내가 높아지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그 분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더욱 주님께 물으며, 겸손히 있어야겠다.
1. 모압 회복의 길(1-5)
모압이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모압이 어린양을 바쳐야할 나라는 유다인데, 유다는 모압에 비해 약소국이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모압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유다의 밑으로 나아가야함을 말하고 있다. 아르논강은 모압의 경계로, 모압의 위기 속에 여기까지 밀려왔음을 보여준다. (2절)
이후 3절에서 ‘너’는 곧 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곧, 모압 사람들이 시온으로 도망 왔을 때에,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이를 통해 이들이 피할 곳은 ‘다윗의 장막’이며, ‘그 위에 앉을 자’는 정의와 공의로 행할 것을 예언한다.(5절) 결국 모압은, ‘다윗의 장막’ 아래에 들어올 때에 그 안에서만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2.모압의 교만함(6-12)
6-12절에서는 다시 모압을 향한 심판의 내용이 나온다. 모압은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죄를 돌이키지 않았고, 교만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압은 통곡할 것이다. 특히 당시 모압에서 생산된 포도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었다. 이 모압의 자랑인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마른다. (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9절) 결국 에언자는, 풍요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바라보며 눈물 가운데 바라본다.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 폐허 속에, 일을 함께할 사람들도 없다.(10절)
예언자는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모압이 산당에서 봉사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더라도 지금의 이 싱황이 바꾸지 않을 것이다. (12절)
3_모압 심판의 확실성(13-14)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오랮 전부터 하신 말씀이다. 앞으로 3년 내에, 모압의 영화는 심판을 받아, 심히 적은 수가 남을 것을 에언한다. 기한과 상세한 내용까지 확정하여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함과 긴박함을 보여준다.
나는?
-모압을 향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동, ‘다윗의 장막’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라는 나라를 심판하는 과정 중에서도 피할 길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모압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면 산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로 나아가면, 살 길이 얼린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에수님께서 곧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셨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알지 못한 채, 예언의 내용만을 들었겠지만, 이제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모든 회복을 가져오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모압의 멸망의 이유는 역시 교만이었다.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포도나무의 소산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제하시고, 멸망시키신다. 교만이란, 내가 높아지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그 분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더욱 주님께 물으며, 겸손히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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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3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살아가는 삶
[이사야 14:24-15:9]
오늘의 본문은 앗수르와 바벨론, 모압에 관하여 심판하시는 구절입니다.
1. 앗수르의 심판 선언 (14:24-27)
당시 남유다를 가장 두렵게 하던 거대 제국인 북쪽의 앗수르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던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반드시 되며 경영 하시는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멍에와 짐을 벗어주심으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폐할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2. 블레셋의 착각 (28-32)
블레셋은 남유다의 아하스왕이 죽자 많이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남유다가 블레셋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고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너희의 큰 착각 임을 밝히시면서 유다는 부러졌지만 더 강력한 북쪽에서 오는 연기가 너희를 집어삼킬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결국엔 블레셋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궤멸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3. 하룻밤만에 무너진 모압 (5장)
모압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모압의 특징은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철옹성과 같은 요새가 있었는데 이사야 15장1절에서는 하룻밤 만에 모압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일평생 일궈낸 저 철옹성과 같은 요새가 하나님의 심판에 하룻밤만에 사라지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닌 우상을 찾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이렇게 세 나라를 보면서 이 이방나라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무시한다는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찾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는 삶이 정말 바르고 귀한 삶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대로 살아내는 삶이 되길 소망하게 되었다.
1. 앗수르의 심판 선언 (14:24-27)
당시 남유다를 가장 두렵게 하던 거대 제국인 북쪽의 앗수르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던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반드시 되며 경영 하시는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멍에와 짐을 벗어주심으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폐할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2. 블레셋의 착각 (28-32)
블레셋은 남유다의 아하스왕이 죽자 많이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남유다가 블레셋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고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너희의 큰 착각 임을 밝히시면서 유다는 부러졌지만 더 강력한 북쪽에서 오는 연기가 너희를 집어삼킬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결국엔 블레셋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궤멸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3. 하룻밤만에 무너진 모압 (5장)
모압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모압의 특징은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철옹성과 같은 요새가 있었는데 이사야 15장1절에서는 하룻밤 만에 모압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일평생 일궈낸 저 철옹성과 같은 요새가 하나님의 심판에 하룻밤만에 사라지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닌 우상을 찾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이렇게 세 나라를 보면서 이 이방나라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무시한다는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찾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는 삶이 정말 바르고 귀한 삶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대로 살아내는 삶이 되길 소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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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2일
안식을 주시는 날
[이사야 14:1-2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회복하신다. 이스라엘은 다시금 회복되어 땅을 얻게 되며, 이전에 주인으로 섬겼던 자들이 노예의 위치로 바뀔 것이다. 바벨론은, 온 세상을 짓밟고 두렵게 했지만, 그 교만의 끝에 깊은 곳에 떨어져 멸망한다.
1. 이스라엘의 회복(1-2)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작을 긍휼과 택함에 두고 있다.(1절)
1) 긍휼 –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신다. 여기서 긍휼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자녀에게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한다.이는 곧 어머니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갓난 아이를 품는 사랑을 의미한다. 야곱 스스로의 노력으로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이 이 공동체의 회복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은 주님 앞에 끝없이 범죄하고, 불순종하였으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들을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신다.
2) 다시 택하심 –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다윗 왕조가 무너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이들을 버린 적이 없으셨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고향으로 귀환한다.(2절) 자신들을 압제하였던 자들을 이제는 종으로 부리게 되며, 불볍과 폭력으로 억압하던 자들이 피지배자의 신분으로 떨어진다.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2.조롱의 노래(3-11)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은, 적들로부터 가나안 땅을 지켜주시는 보호를 의미한다. ‘슬픔, 곤고, 고역’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며 쉬도록 하시는 날을 허락하신다. (3절)
이어지는 4절부터는, 바벨론에 대한 멸망을 선포한다.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환호와 반응이 나타난다. 전쟁과 폭력, 압제가 사라지며 환호하는 모습이 향나무와 백향목의 환성을 통해 나타난다. 폭군에 대한 심판은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에도 기쁨으로 이어진다.
본문은 스올(보이지 않는 지하의 세계)까지도 이어진다. 스올에 있던 민족들의 왕들이 바벨론이 스올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라고 묻는다. 세상의 모든 권력들의 말로이다. 여호와의 진노 아래에, 스올에서 가장 밑바닥에 처하게 된다. (11절)
3.바벨론의 추락(12-23)
세상을 정복한 폭군은 교만하여 하늘까지 오르려 한다. 이 폭군은 가장 높은 구름에 우르려 하였지만(14절) 스올 맨 밑에 결국 떨어지게 된다. 열방의 모든 왕들은 편안하게 무덤으로 들어가지만, 이 폭군은 망하게 되었고 백성을 죽임에 대한 대가로 함께 안장되지 못한다. 폭군에게는 무덤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21절) 세상의 악함에 대해 하나님은 그 죄악을 징계하신다. 멸망의 빗자루로, 바벨론을 멸절하시며, 바벨론을 끊을 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회복, 긍휼 : 열국의 심판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지나온 걸음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구원과 회복을 받을 이유가 본인들에게는 전혀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 가운데 선택하시고, 이들을 받아주셨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은 ‘긍휼’과 ‘택하심’으로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신다. 때로, 나와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까?’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이는 늘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 긍휼하심을 다시 한 번 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돌아오도록 하신다. 이전의 상황은 역전이 되며,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위에서 회복된다. 다시 그 땅을 밟을 때의 환희와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한다. 그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일을 하고 계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 이 모든 본문의 예언들은, 약 150-200년 후의 상황들을 내다보고 있다. 오늘 우리가 눈에 보이는 열국의 흥망성쇠 앞에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나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교만의 무서움 : 바벨론이 심판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없는 분 취급했던 것. 하나님을 무시함이 얼마나 두려운 죄인지에 대해서 바벨론은 몰랐다. 오늘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결정을 함께하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너무나 쉽게 마음에 교만이 올라오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따르며 구할 때가 있다. 다시금 모든 일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기를 구한다.
1. 이스라엘의 회복(1-2)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작을 긍휼과 택함에 두고 있다.(1절)
1) 긍휼 –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신다. 여기서 긍휼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자녀에게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한다.이는 곧 어머니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갓난 아이를 품는 사랑을 의미한다. 야곱 스스로의 노력으로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이 이 공동체의 회복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은 주님 앞에 끝없이 범죄하고, 불순종하였으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들을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신다.
2) 다시 택하심 –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다윗 왕조가 무너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이들을 버린 적이 없으셨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고향으로 귀환한다.(2절) 자신들을 압제하였던 자들을 이제는 종으로 부리게 되며, 불볍과 폭력으로 억압하던 자들이 피지배자의 신분으로 떨어진다.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2.조롱의 노래(3-11)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은, 적들로부터 가나안 땅을 지켜주시는 보호를 의미한다. ‘슬픔, 곤고, 고역’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며 쉬도록 하시는 날을 허락하신다. (3절)
이어지는 4절부터는, 바벨론에 대한 멸망을 선포한다.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환호와 반응이 나타난다. 전쟁과 폭력, 압제가 사라지며 환호하는 모습이 향나무와 백향목의 환성을 통해 나타난다. 폭군에 대한 심판은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에도 기쁨으로 이어진다.
본문은 스올(보이지 않는 지하의 세계)까지도 이어진다. 스올에 있던 민족들의 왕들이 바벨론이 스올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라고 묻는다. 세상의 모든 권력들의 말로이다. 여호와의 진노 아래에, 스올에서 가장 밑바닥에 처하게 된다. (11절)
3.바벨론의 추락(12-23)
세상을 정복한 폭군은 교만하여 하늘까지 오르려 한다. 이 폭군은 가장 높은 구름에 우르려 하였지만(14절) 스올 맨 밑에 결국 떨어지게 된다. 열방의 모든 왕들은 편안하게 무덤으로 들어가지만, 이 폭군은 망하게 되었고 백성을 죽임에 대한 대가로 함께 안장되지 못한다. 폭군에게는 무덤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21절) 세상의 악함에 대해 하나님은 그 죄악을 징계하신다. 멸망의 빗자루로, 바벨론을 멸절하시며, 바벨론을 끊을 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회복, 긍휼 : 열국의 심판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지나온 걸음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구원과 회복을 받을 이유가 본인들에게는 전혀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 가운데 선택하시고, 이들을 받아주셨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은 ‘긍휼’과 ‘택하심’으로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신다. 때로, 나와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까?’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이는 늘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 긍휼하심을 다시 한 번 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돌아오도록 하신다. 이전의 상황은 역전이 되며,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위에서 회복된다. 다시 그 땅을 밟을 때의 환희와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한다. 그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일을 하고 계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 이 모든 본문의 예언들은, 약 150-200년 후의 상황들을 내다보고 있다. 오늘 우리가 눈에 보이는 열국의 흥망성쇠 앞에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나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교만의 무서움 : 바벨론이 심판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없는 분 취급했던 것. 하나님을 무시함이 얼마나 두려운 죄인지에 대해서 바벨론은 몰랐다. 오늘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결정을 함께하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너무나 쉽게 마음에 교만이 올라오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따르며 구할 때가 있다. 다시금 모든 일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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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1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13:1-22]
이사야 13장부터는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다. 아마도 이 심판의 내용들은, 당시 그 나라들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보여지며, 나아가 온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가 의지해야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며, 강대국 의존정치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다. 13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14:1-23에서는 바벨론 왕에 대한 애가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군대의 소집 (1-5)
1절에 ‘경고’는 곧 이제부터 나올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의미한다. 2-3절은 하나님이, 4-5절은 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군대가 점차 다가오는 모습과 소환되는 과정을 묘사한다.(2절) 여호와의 전쟁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하나님의 용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할 것이다.(3절) 예언자는 화자로 등장하여, 도착한 수많은 군대의 소리를 묘사한다.(4절) 하나님의 징집 명령에 응답하여, ‘진노의 병기’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하는 도구이다.
2.놀람과 애곡 (6-8)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탄식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곧 그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였음을 의미한다.(6절)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은 힘이 풀리고, 놀라며, 해산이 임박한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된다.(7-8절)
3.여호와의 날 선포(9-16) 여호와의 날이 선포됨에 따라, 그 땅이 황폐해진다.(9절)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10절) 세상의 악과 교만한 자의 오만,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신다.(11절)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극히 일부가 살아남을 묘사한다. (12절) 13-16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더욱 상세히 묘사한다. 그 분의 진노 속에 하늘은 진동하며, 심판의 대상은 본향으로 도망하지만, 만나는 자마다 창과 칼에 엎드려진다. 아이들, 집, 아내까지 모두가 진멸됨을 말한다. (16절)
4.심판의 도구, 메대 사람들(17-22)
하나님께서는 메대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 페르시아의 고레스2세는 원래 메대 제국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메대의 수도를 정복한다. 이후 메대, 페르시아의 연합군은, B.C.539년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며, 그 죄악의 심각함을 말하고 있다. 화려했던 모든 자리들은, 야생동물의 거처로 전락하며, 이처럼 단기간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나는?
-당시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강대국을 향하여 이같은 예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바벨론 입장에서는 우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크고, 강력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오늘의 삶속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본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진정 믿는 사람에게는 오늘을 살아갈 소망과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1. 하나님의 군대의 소집 (1-5)
1절에 ‘경고’는 곧 이제부터 나올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의미한다. 2-3절은 하나님이, 4-5절은 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군대가 점차 다가오는 모습과 소환되는 과정을 묘사한다.(2절) 여호와의 전쟁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하나님의 용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할 것이다.(3절) 예언자는 화자로 등장하여, 도착한 수많은 군대의 소리를 묘사한다.(4절) 하나님의 징집 명령에 응답하여, ‘진노의 병기’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하는 도구이다.
2.놀람과 애곡 (6-8)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탄식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곧 그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였음을 의미한다.(6절)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은 힘이 풀리고, 놀라며, 해산이 임박한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된다.(7-8절)
3.여호와의 날 선포(9-16) 여호와의 날이 선포됨에 따라, 그 땅이 황폐해진다.(9절)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10절) 세상의 악과 교만한 자의 오만,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신다.(11절)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극히 일부가 살아남을 묘사한다. (12절) 13-16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더욱 상세히 묘사한다. 그 분의 진노 속에 하늘은 진동하며, 심판의 대상은 본향으로 도망하지만, 만나는 자마다 창과 칼에 엎드려진다. 아이들, 집, 아내까지 모두가 진멸됨을 말한다. (16절)
4.심판의 도구, 메대 사람들(17-22)
하나님께서는 메대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 페르시아의 고레스2세는 원래 메대 제국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메대의 수도를 정복한다. 이후 메대, 페르시아의 연합군은, B.C.539년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며, 그 죄악의 심각함을 말하고 있다. 화려했던 모든 자리들은, 야생동물의 거처로 전락하며, 이처럼 단기간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나는?
-당시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강대국을 향하여 이같은 예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바벨론 입장에서는 우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크고, 강력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오늘의 삶속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본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진정 믿는 사람에게는 오늘을 살아갈 소망과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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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31일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한다!
[이사야 12:1-6]
이사야 1~10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시며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감격이 이사야 12장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터져 나온다.
본문은 “그 날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 “그 날”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날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고 회복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심판받던 백성이 이제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된다.
1절에서는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개인의 감사가 나타나고, 4절에서는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공동체의 찬양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은혜이며, 나아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다.
1.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1~3절)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백성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 징계하시지만 사랑으로 다시 품으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위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의 감사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2~3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을 고백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노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또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누리는 생명의 은혜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된다.
2. 구원받은 성도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높인다(4절)
4절부터는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선포해야 하는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이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한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한다(5~6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온 땅에 알리라고 선포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는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으며,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가 넘치고, 감사하는 사람은 찬양하게 되며, 찬양하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가?
어려움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나의 힘과 구원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족과 이웃,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끝까지 품으셨다. 성도의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신다.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영혼의 새 힘을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높이는 공동체이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감사에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그 날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 “그 날”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날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고 회복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심판받던 백성이 이제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된다.
1절에서는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개인의 감사가 나타나고, 4절에서는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공동체의 찬양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은혜이며, 나아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다.
1.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1~3절)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백성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 징계하시지만 사랑으로 다시 품으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위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의 감사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2~3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을 고백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노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또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누리는 생명의 은혜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된다.
2. 구원받은 성도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높인다(4절)
4절부터는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선포해야 하는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이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한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한다(5~6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온 땅에 알리라고 선포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는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으며,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가 넘치고, 감사하는 사람은 찬양하게 되며, 찬양하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가?
어려움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나의 힘과 구원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족과 이웃,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끝까지 품으셨다. 성도의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신다.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영혼의 새 힘을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높이는 공동체이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감사에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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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30일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
[이사야 11장 1-16절]
오늘의 본문은 앞선 10장에 앗수르의 심판 속에서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와 대조되면서 멸망한 것만 같았던 다윗 왕조 속에서 소망의 새싹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조명하고 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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