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에브라임의 교만과 입다의 내전 그리고 불안한 평화 [사사기 12:1-15]
– 2026년 09월 27일
– 2026년 09월 27일 –
암몬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동족과의 전쟁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또다시 교만하게 시기와 질투를 부린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며 요단강을 건너와 협박했다. “….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새번역_1절).” 이 황당한 작태 앞에 입다는 단호하게 반응한다. 암몬과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은 점(2절)을 지적하고, 자신과 길르앗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겼는데 어찌하여 전리품을 나누자고 하느냐고 반문한다(3절).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 기도제목
*주님, 에브라임의 교만과 입다의 분노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매사에 분노로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되새기며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추구하고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지도자로서 시대적 소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본이 되는 삶과 지도력을 추구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지도자로서 시대적 소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본이 되는 삶과 지도력을 추구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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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4일
기다림…
[야고보서 5:7-12]
시험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시기까지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인내해야 한다. 그 인내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다고 해서 그날로 인생이 확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해도 인생의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과 번민은 여전히 삶을 쥐고 있다. 야고보의 편지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승천하실 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주님(행 1:11)은 아직 오시지 않았고, 성도들은 삶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떠나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1:1; 행 8:1). 계속되는 흉년에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외부에서 위협하는 핍박도 여전하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서로 원망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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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3일
허망한 자랑을 경계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
[야고보서 4:13-5:6]
화제를 전환하여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세상과 벗하지 말라는 권면(4:4)과 연결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와 가난으로 인한 성도들의 시험 상황을 다루었던 1:2~18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내용은 등장인물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4:13~17은 상인들을 예로 들어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교만한 자랑을 경고한다. 둘째, 5:1~6은 부유한 땅 주인을 예로 들어 탐욕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심판을 경고한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생각은 늘 솟아난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허망한 자랑”에 빠지지 않는 삶임을 밝힌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어떻게 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이익을 낼 것을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13~14절) 건강과 재물에 대한 ‘허망한 자랑’의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어지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허망한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4:13~17)
야고보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한다(16절).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이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생을 허망하게, 그리고 악하게 만든다.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15절). 또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안다(17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기에게 있는 자랑거리를 감추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형편을 적당히 나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자기 자랑”이 문제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예로 든 자랑은 “건강과 재물”이다. “들으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새번역_4:13)” 그러나 “건강과 재물”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맞다. 여기저기 경고등이 켜진 건강, 지금 내가 소유한 재물, 혹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수입을 예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쇠약해질 수 있고, 많은 재물을 누리다가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새번역_4:14)” 그러니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화려한 삶인 듯하지만 안개처럼 홀연히,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깨우치는 하늘의 지혜가 있다면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_4:15)”라는 말씀처럼 고백하게 된다.
*”주의 뜻”(개역개정)에 담긴 의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행하는 삶이다. 아!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과 행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채운다.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소망(5:1~6)
땅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야고보가 단호하게, 탄식하며 묘사하는 대목은 놀랍기 그지없다. “비참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니 울며 부르짖으라(1절).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다(2절).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할 것이다(3절).”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 이것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는 “말세에 재물을 쌓고(3절),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며(4절),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5절),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6절)”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착취와 갈취를 당한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부자들은 묵묵히 당하기만 하는 선량한 이들을 끝내 정죄하고 죽인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약자들에게는 인내를 동시에 선포한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당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5:7~8). 1장에서 강조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이 다시 강조된다.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린다(1:12).
*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보상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은 바로 이 소망에서 나온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부자, 일꾼들(약자들)의 품삯을 가로채는(주지 않거나 체불하는) 부자,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부자, 무엇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죽이는) 부자… 그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1년 후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와 인생의 참 주인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본문의 사람은 할 일(장사)도 있고, 투자할 곳(도시)도 정했으며, 투자 기간(1년)도 신중하게 결정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의 힘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교회 역시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돈은 늘 위협과 유혹의 대상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왕상 18:21), 신약에서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마 6:24) 섬길 주인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와 성도에게 세상의 부는 억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문은 결국 부자 이야기다. 부자들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물, 그 재물을 끌어모으는 수완, 완벽한 계획을 통한 최대 이익의 추구와 달성 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재물을 자랑하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익과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보시고 기억하시는 그들의 행동이 있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맨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계획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멋진 청사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행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계획을 관철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정욕에서 나온 죄다(17절).
-‘돈’이 큰 시험거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돈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2:1~4), 돈이 주는 권력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기도 하며(4:11), 돈을 벌려는 계획을 떠벌리기도 한다(4:13). 부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라 울고 통곡할 때다. 그들은 썩은 재물과 좀먹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중에 심판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
-착복한 돈과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이 그들을 고소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슬퍼하고, 울고, 통회하며, 손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 종말의 때에(4:7~9) 그들은 심판을 앞당기는 악행을 쌓고 있다. 의인을 정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는(1:15) 세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허망한 자랑에 대한 유혹이 없을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평판에 참 신경을 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다. 슈퍼맨에게도 안티가 있는데, 나는 안티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허망한 자랑에 대해 안티가 되어야 한다. 자기 욕심과 탐욕에서 오는 부정 축재에 안티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나 감탄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내 생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 때(4:14), 비로소 내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생각은 늘 솟아난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허망한 자랑”에 빠지지 않는 삶임을 밝힌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어떻게 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이익을 낼 것을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13~14절) 건강과 재물에 대한 ‘허망한 자랑’의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어지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허망한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4:13~17)
야고보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한다(16절).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이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생을 허망하게, 그리고 악하게 만든다.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15절). 또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안다(17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기에게 있는 자랑거리를 감추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형편을 적당히 나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자기 자랑”이 문제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예로 든 자랑은 “건강과 재물”이다. “들으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새번역_4:13)” 그러나 “건강과 재물”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맞다. 여기저기 경고등이 켜진 건강, 지금 내가 소유한 재물, 혹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수입을 예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쇠약해질 수 있고, 많은 재물을 누리다가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새번역_4:14)” 그러니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화려한 삶인 듯하지만 안개처럼 홀연히,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깨우치는 하늘의 지혜가 있다면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_4:15)”라는 말씀처럼 고백하게 된다.
*”주의 뜻”(개역개정)에 담긴 의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행하는 삶이다. 아!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과 행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채운다.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소망(5:1~6)
땅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야고보가 단호하게, 탄식하며 묘사하는 대목은 놀랍기 그지없다. “비참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니 울며 부르짖으라(1절).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다(2절).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할 것이다(3절).”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 이것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는 “말세에 재물을 쌓고(3절),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며(4절),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5절),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6절)”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착취와 갈취를 당한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부자들은 묵묵히 당하기만 하는 선량한 이들을 끝내 정죄하고 죽인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약자들에게는 인내를 동시에 선포한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당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5:7~8). 1장에서 강조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이 다시 강조된다.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린다(1:12).
*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보상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은 바로 이 소망에서 나온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부자, 일꾼들(약자들)의 품삯을 가로채는(주지 않거나 체불하는) 부자,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부자, 무엇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죽이는) 부자… 그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1년 후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와 인생의 참 주인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본문의 사람은 할 일(장사)도 있고, 투자할 곳(도시)도 정했으며, 투자 기간(1년)도 신중하게 결정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의 힘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교회 역시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돈은 늘 위협과 유혹의 대상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왕상 18:21), 신약에서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마 6:24) 섬길 주인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와 성도에게 세상의 부는 억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문은 결국 부자 이야기다. 부자들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물, 그 재물을 끌어모으는 수완, 완벽한 계획을 통한 최대 이익의 추구와 달성 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재물을 자랑하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익과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보시고 기억하시는 그들의 행동이 있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맨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계획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멋진 청사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행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계획을 관철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정욕에서 나온 죄다(17절).
-‘돈’이 큰 시험거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돈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2:1~4), 돈이 주는 권력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기도 하며(4:11), 돈을 벌려는 계획을 떠벌리기도 한다(4:13). 부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라 울고 통곡할 때다. 그들은 썩은 재물과 좀먹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중에 심판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
-착복한 돈과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이 그들을 고소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슬퍼하고, 울고, 통회하며, 손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 종말의 때에(4:7~9) 그들은 심판을 앞당기는 악행을 쌓고 있다. 의인을 정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는(1:15) 세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허망한 자랑에 대한 유혹이 없을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평판에 참 신경을 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다. 슈퍼맨에게도 안티가 있는데, 나는 안티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허망한 자랑에 대해 안티가 되어야 한다. 자기 욕심과 탐욕에서 오는 부정 축재에 안티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나 감탄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내 생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 때(4:14), 비로소 내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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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2일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란?
[야고보서 4:1-12]
세상을 벗하는 것(1~10절)과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11~12절)를 다룬다. 3장 후반부에서 언급한 “지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땅에 속한 지혜를 따라 세상과 벗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경고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을 가까이할 때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또한 본 단락은 1:27에서 말하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과 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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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1일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와 땅의 지혜
[야고보서 3:13-18]
선생과 관련된 두 번째 권면으로, 참 지혜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지혜와 총명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본 단락은 땅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설명한다. 독한 시기와 다툼은 땅의 지혜에서 나오며, 땅의 지혜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참 지혜는 위로부터 난 것으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참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온유함으로 선행을 나타내야 한다.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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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0일
혀의 영향력
[야고보서 3:1-12]
가르치는 자의 ‘혀’ 사용에 대한 권면이다. 참된 의로움과 혀 사용을 말한 1:19~27 권면의 구체적인 예다. 본 단락은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며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1~2절), 말과 혀 사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3~12절). 3~12절은 다시 둘로 나뉘어, 3~8절은 여러 예를 통해 말과 혀 사용을 설명하고, 9~12절은 혀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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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9일
행함으로 증명되는 살아 있는 믿음
[야고보서 2:14-26]
2:1~13에 이어 말씀 순종과 의로움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본문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두 축인 믿음과 말씀 순종의 관계를 다룬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17절은 행함 없는 믿음은 무익하고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18~19절은 잘못된 믿음의 형태들을 예로 들며, 20~26절은 행함이 수반된 참 믿음을 구약 인물들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믿음과 행위… 본문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단호하게 가르친다. 오죽하면 그런 행함 없는 믿음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며, 이런 헛된 믿음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한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신학의 오랜 주제였다. 루터는 이 본문이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표면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고, 1522년 독일어 신약 번역에서는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맨 뒤에 따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 아니다. 본문의 배경은 죄 사함과 새 언약 관계를 얻는 이신칭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충실함, 곧 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말씀 순종의 의무와 관계 유지에 초점이 있다. 바울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요소들에 대한 초점과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1. 두말할 필요 없이…(14~17절)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혈통과 율법 준수로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이들의 오만한 구원관을 뒤흔드는 “이신칭의”를 전하며, 구원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반박했다(롬 3:28; 갈 2:16). 율법의 틀에 갇힌 그들에게는 “은혜”를,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믿음’으로 구원만 받으면 된다며, 삶에서 행위가 배제된 교리화된 믿음만 추구하게 된 것이다. 속칭 “신앙은 있는데 생활은 빠져 버린” 우스운 모습이 되었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예배는 철저하게 지키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도무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그저 기도해 주는 것만으로 이웃 사랑이 충분하다고 착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종교 생활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도덕적인 삶을 대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잘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스스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런 모습에 주저 없이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새번역_16절)”
*두말할 필요 없이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어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존재(마 5:13-14)가 세상의 윤리 수준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라면, 지금 우리의 믿음은 죽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교회의 윤리 의식이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교회의 도덕 지수가 사회를 이끌지 못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스스로 착각하여 “이신칭의”에 함몰된 채 행함 없이 살아왔음을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건강한 믿음, 곧 행함과 믿음이 균형을 이루는 순종을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2. 지금 우리는…(20~26절)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일깨운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새번역_20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순종한 것(21절; 창 22장)이나 라합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행동(25절; 수 2장)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독자였지만 수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아들을 번제단으로 이끌 수 있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믿었기에(수 2:9) 정탐꾼들을 숨겨 줄 수 있었고, 자기 집 창문으로 줄을 내려 그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수 2:15). 아브라함과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26절)” 믿음이 있다면 행함으로 나 자신(영혼)을 살려라. 믿음이 있다면 (구제하고 섬기며 필요를 채워 주는) 행함으로 이웃을 살려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공허한 신앙고백과 공허한 기도로 돕는다는 ‘기가 막힌’ 믿음의 허울을 깨뜨리고,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야지… 오죽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시지 않았던가! 벳새다 들녘(눅 9:10)에서 말씀을 듣는 데 빠져 허기졌을 백성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 하지 않으셨던가!
*차별하지 말라(1~13절)는 말씀과 굶주린 이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도우라(16절)는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행함 있는 믿음”이란 차별하고 외면하는 인간의 완악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 헛심 쓰는 것이다.
*행동하는 믿음이 생동하는 믿음이다.
나는?
-행함 없는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도리어 우리를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해악을 끼친다. 거짓 경건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추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 경건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결국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참 믿음은 실천을 동반한 믿음이다.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마 7:20) 마음의 진실은 오직 행위로만 증명된다. 숨 쉬지 않는 몸이 죽은 몸이듯, 행함 없이 지적인 동의에만 그치는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것이며, 실상 아무도 살리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언약의 조건인 토라에 신실한 것을 의미하기에, 진정한 믿음은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속이 텅 빈 과실과 같다. 우리의 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는 참 행실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신앙고백은 귀신도 한다. 귀신은 머리와 입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 존재를 알기에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19절). 하지만 귀신은 결코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종하지 않는다. 그 존재 목적은 늘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뿐이다. 이렇듯 행함 없는 믿음은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헛된 믿음일 뿐이다.
-아무리 입술의 고백이 바르다 할지라도 형제를 외적 조건으로 판단하고, 내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약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배만 채우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새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 구원의 자비를 구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악행이다(13절). 나눌 수 있는데도 나누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를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위선적인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나 자신이 먼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기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은 태에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롬 4:19-21).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기시고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하게 하셨음을 믿었고, 가나안도 정복하게 하실 것임을 믿었다(수 2:10-11). 그 믿음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참 믿음은 목숨을 거는 믿음이고,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 생명을 걸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결국 믿음이 아니다.
-이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죽음에 넘겨주라는 요구에도 주저 없이 순종함으로써 그 믿음이 참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수도, 가져가실 수도 있으며,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도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히 11:17-19).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린 ‘하나님의 벗'(23절)이었다.
-외모로 보면 라합은 아브라함과 너무나 달랐다. 여자이고, 이방인이고, 게다가 기생이었다. 하지만 라합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 여리고와 그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바로를 심판하시고 그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신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 편에 섰다(수 2:11). 옳다고 믿은 것을 실천에 옮긴, 목숨을 건 믿음이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믿음에 부요한 자녀였다(5절).
믿음과 행위… 본문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단호하게 가르친다. 오죽하면 그런 행함 없는 믿음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며, 이런 헛된 믿음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한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신학의 오랜 주제였다. 루터는 이 본문이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표면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고, 1522년 독일어 신약 번역에서는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맨 뒤에 따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 아니다. 본문의 배경은 죄 사함과 새 언약 관계를 얻는 이신칭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충실함, 곧 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말씀 순종의 의무와 관계 유지에 초점이 있다. 바울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요소들에 대한 초점과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1. 두말할 필요 없이…(14~17절)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혈통과 율법 준수로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이들의 오만한 구원관을 뒤흔드는 “이신칭의”를 전하며, 구원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반박했다(롬 3:28; 갈 2:16). 율법의 틀에 갇힌 그들에게는 “은혜”를,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믿음’으로 구원만 받으면 된다며, 삶에서 행위가 배제된 교리화된 믿음만 추구하게 된 것이다. 속칭 “신앙은 있는데 생활은 빠져 버린” 우스운 모습이 되었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예배는 철저하게 지키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도무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그저 기도해 주는 것만으로 이웃 사랑이 충분하다고 착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종교 생활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도덕적인 삶을 대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잘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스스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런 모습에 주저 없이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새번역_16절)”
*두말할 필요 없이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어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존재(마 5:13-14)가 세상의 윤리 수준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라면, 지금 우리의 믿음은 죽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교회의 윤리 의식이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교회의 도덕 지수가 사회를 이끌지 못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스스로 착각하여 “이신칭의”에 함몰된 채 행함 없이 살아왔음을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건강한 믿음, 곧 행함과 믿음이 균형을 이루는 순종을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2. 지금 우리는…(20~26절)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일깨운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새번역_20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순종한 것(21절; 창 22장)이나 라합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행동(25절; 수 2장)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독자였지만 수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아들을 번제단으로 이끌 수 있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믿었기에(수 2:9) 정탐꾼들을 숨겨 줄 수 있었고, 자기 집 창문으로 줄을 내려 그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수 2:15). 아브라함과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26절)” 믿음이 있다면 행함으로 나 자신(영혼)을 살려라. 믿음이 있다면 (구제하고 섬기며 필요를 채워 주는) 행함으로 이웃을 살려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공허한 신앙고백과 공허한 기도로 돕는다는 ‘기가 막힌’ 믿음의 허울을 깨뜨리고,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야지… 오죽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시지 않았던가! 벳새다 들녘(눅 9:10)에서 말씀을 듣는 데 빠져 허기졌을 백성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 하지 않으셨던가!
*차별하지 말라(1~13절)는 말씀과 굶주린 이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도우라(16절)는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행함 있는 믿음”이란 차별하고 외면하는 인간의 완악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 헛심 쓰는 것이다.
*행동하는 믿음이 생동하는 믿음이다.
나는?
-행함 없는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도리어 우리를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해악을 끼친다. 거짓 경건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추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 경건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결국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참 믿음은 실천을 동반한 믿음이다.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마 7:20) 마음의 진실은 오직 행위로만 증명된다. 숨 쉬지 않는 몸이 죽은 몸이듯, 행함 없이 지적인 동의에만 그치는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것이며, 실상 아무도 살리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언약의 조건인 토라에 신실한 것을 의미하기에, 진정한 믿음은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속이 텅 빈 과실과 같다. 우리의 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는 참 행실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신앙고백은 귀신도 한다. 귀신은 머리와 입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 존재를 알기에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19절). 하지만 귀신은 결코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종하지 않는다. 그 존재 목적은 늘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뿐이다. 이렇듯 행함 없는 믿음은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헛된 믿음일 뿐이다.
-아무리 입술의 고백이 바르다 할지라도 형제를 외적 조건으로 판단하고, 내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약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배만 채우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새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 구원의 자비를 구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악행이다(13절). 나눌 수 있는데도 나누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를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위선적인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나 자신이 먼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기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은 태에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롬 4:19-21).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기시고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하게 하셨음을 믿었고, 가나안도 정복하게 하실 것임을 믿었다(수 2:10-11). 그 믿음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참 믿음은 목숨을 거는 믿음이고,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 생명을 걸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결국 믿음이 아니다.
-이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죽음에 넘겨주라는 요구에도 주저 없이 순종함으로써 그 믿음이 참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수도, 가져가실 수도 있으며,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도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히 11:17-19).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린 ‘하나님의 벗'(23절)이었다.
-외모로 보면 라합은 아브라함과 너무나 달랐다. 여자이고, 이방인이고, 게다가 기생이었다. 하지만 라합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 여리고와 그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바로를 심판하시고 그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신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 편에 섰다(수 2:11). 옳다고 믿은 것을 실천에 옮긴, 목숨을 건 믿음이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믿음에 부요한 자녀였다(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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