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혀의 영향력 [야고보서 3:1-12]
 – 2026년 10월 20일
– 2026년 10월 20일 –
가르치는 자의 ‘혀’ 사용에 대한 권면이다. 참된 의로움과 혀 사용을 말한 1:19~27 권면의 구체적인 예다. 본 단락은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며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1~2절), 말과 혀 사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3~12절). 3~12절은 다시 둘로 나뉘어, 3~8절은 여러 예를 통해 말과 혀 사용을 설명하고, 9~12절은 혀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 기도제목

*주님, 이미 선생의 자리에 있기에 오늘 말씀이 더 두렵습니다.
*주님, 위험한 나의 혀와 말을 성령께서 제어하시도록 내어 드립니다. 도우소서.
*주님, 위험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혀와 말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위험에서 보호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