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란? [야고보서 4:1-12]
 – 2026년 10월 22일
– 2026년 10월 22일 –
세상을 벗하는 것(1~10절)과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11~12절)를 다룬다. 3장 후반부에서 언급한 “지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땅에 속한 지혜를 따라 세상과 벗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경고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을 가까이할 때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또한 본 단락은 1:27에서 말하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과 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나의 욕심 때문에 가정과 공동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세상의 벗이 되기보다 하나님의 벗, 말씀의 벗이고 싶습니다.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십시오.
*주님, 비방의 유혹에서 제 입술을 지켜 주십시오!
*주님, 하늘의 지혜로 살기 위한 발버둥을 멈추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