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부르짖음 없는 절망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사사기 13:1-14]
– 2026년 09월 28일
– 2026년 09월 28일 –
13-16장까지는 삼손 이야기이다. 8번째 사사 입다에 이어 입산, 엘론, 압돈이 다스린 31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몹시 상하셨다.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다. 사사기의 압제 기간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했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아도 구원하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사랑이 감동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주님, 구원하시기 위해 아기를 보내 주시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그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주님, 구원하시기 위해 아기를 보내 주시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그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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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5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야고보서 5:13-20]
야고보의 마지막 권면이다. “기도”와 “진리를 떠난 형제를 돌아오게 하는 것”을 다룬다. 기도는 야고보서를 시작하면서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1:2)을 마주할 때 취해야 할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야고보는 기도를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황을 들어 구체적으로 권면한다.
1. 고난당할 때, 즐거워할 때(13절)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새번역_5:13)”
고난과 즐거움은 삶의 어떤 순간에든 찾아온다. 극심한 고난도, 최고의 기쁨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살다 보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기쁨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의 모든 순간에 세상에 속한 이들과 달리, 고통과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하라고 권면한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의식하며 살라는 의미겠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만날 때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난과 기쁨의 상황에서 세상처럼 사람이나 제도에 하소연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삶의 모든 정황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고난에 맞설 힘을 구하는 겸손이고, 찬송은 기쁨이 넘치고 넘칠 때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늘 먼저여야 한다.
2. 병들었을 때(14~18절)
육신의 병이 찾아올 때 절망과 외로움, 당혹감 같은 마음의 불청객도 함께 찾아온다. 사실 이런 마음이 육신의 질병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육신의 질병과 함께 어느새 마음을 잠식한 불안과 염려, 절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한다(14절). ‘장로’로 번역된 단어(프레스뷔테로스)에는 “연장자, 연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직분상의 ‘장로’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육 간에 연륜이 있는 “어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 15절의 “믿음의 기도”와 16절의 “간절히 비는 기도”가 지닌 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들을 “기도의 용사”, “믿음의 용사”로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주목되는 것은 “청하라(부르라)”는 말이다. 믿음의 방법, 믿음의 시도를 먼저 하라는 것이다. 용한 의원을 찾도록 도와주라거나 신박한 약재를 구해 주라는 식의 권면이 아니라,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줄 공동체의 어른”을 찾으라는 것이다. 당시에 기름은 상처와 병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치료제였다(눅 10:34). 그런 일반적인 의술과 약재를 사용하는 것(기름을 바르고, 14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할” 사람을 찾으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믿으라는 의미다. 세상의 방법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할 구체적인 근거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든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해갈의 단비를 내렸음을 상기시킨다(17~18절; 왕상 17:1, 18:42~45).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새번역_5:16)”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서로”… 한국 교회에는 이와 관련해 매우 부적절한 모습이 있다. 병이 나면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며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발병의 원인을 그의 죄로 단정하고 “회개하면”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병이 낫는 은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임하는 것이지 “회개의 기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에는, 혹시 죄를 범하였더라도 사죄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15절). 이를 보면 무조건 회개의 기도만이 치유의 열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공동체의 장로들을 청할 수 있고, “간절히 비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여기에 그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서로”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병들었을 때는 어떤 기도보다 “믿음의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고,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이다. 또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3. 공동체(지체)를 포기하지 않는(19~20절)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떠난 지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도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지체를 포기하지 않는 그를 극찬하신다.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새번역_5:19하~20)”
두말해서 무엇하겠나…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고난 중에 혹 신앙을 저버릴 수 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그를 잠시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해진 이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주의 진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스스로 그 길을 찾고 용기를 내어 다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다. 먼저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도록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그 어떤 믿음의 행동에도 뒤처지지 않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나는?
-무조건 기도하라는 명령인 듯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소통과 공감,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명령이다.
-고난을 만날 때나 즐거워할 인생의 순간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병듦에 지친 영혼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는 최고의 방법은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소통과 공감은 나눔과 기도이다.
-1세기 성도들의 삶은 곤고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해 이어진 흉년(행 11:28)으로 늘 배고팠고, 유대인들의 핍박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신생 종교로서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핍박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사회와 제도, 정부가 그 억울함을 지켜 주지 않았다. 세상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아였기에 당해도 싸다고 여겨졌다.
-세상은 그렇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조리돌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끝까지 함께하셨다. 친히 함께 조리돌림당하셨다. 그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기대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전적 의지”였다. 기도와 찬송은 전적 의지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런 “전적 의지”의 열매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1. 고난당할 때, 즐거워할 때(13절)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새번역_5:13)”
고난과 즐거움은 삶의 어떤 순간에든 찾아온다. 극심한 고난도, 최고의 기쁨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살다 보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기쁨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의 모든 순간에 세상에 속한 이들과 달리, 고통과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하라고 권면한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의식하며 살라는 의미겠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만날 때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난과 기쁨의 상황에서 세상처럼 사람이나 제도에 하소연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삶의 모든 정황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고난에 맞설 힘을 구하는 겸손이고, 찬송은 기쁨이 넘치고 넘칠 때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늘 먼저여야 한다.
2. 병들었을 때(14~18절)
육신의 병이 찾아올 때 절망과 외로움, 당혹감 같은 마음의 불청객도 함께 찾아온다. 사실 이런 마음이 육신의 질병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육신의 질병과 함께 어느새 마음을 잠식한 불안과 염려, 절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한다(14절). ‘장로’로 번역된 단어(프레스뷔테로스)에는 “연장자, 연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직분상의 ‘장로’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육 간에 연륜이 있는 “어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 15절의 “믿음의 기도”와 16절의 “간절히 비는 기도”가 지닌 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들을 “기도의 용사”, “믿음의 용사”로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주목되는 것은 “청하라(부르라)”는 말이다. 믿음의 방법, 믿음의 시도를 먼저 하라는 것이다. 용한 의원을 찾도록 도와주라거나 신박한 약재를 구해 주라는 식의 권면이 아니라,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줄 공동체의 어른”을 찾으라는 것이다. 당시에 기름은 상처와 병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치료제였다(눅 10:34). 그런 일반적인 의술과 약재를 사용하는 것(기름을 바르고, 14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할” 사람을 찾으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믿으라는 의미다. 세상의 방법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할 구체적인 근거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든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해갈의 단비를 내렸음을 상기시킨다(17~18절; 왕상 17:1, 18:42~45).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새번역_5:16)”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서로”… 한국 교회에는 이와 관련해 매우 부적절한 모습이 있다. 병이 나면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며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발병의 원인을 그의 죄로 단정하고 “회개하면”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병이 낫는 은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임하는 것이지 “회개의 기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에는, 혹시 죄를 범하였더라도 사죄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15절). 이를 보면 무조건 회개의 기도만이 치유의 열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공동체의 장로들을 청할 수 있고, “간절히 비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여기에 그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서로”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병들었을 때는 어떤 기도보다 “믿음의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고,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이다. 또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3. 공동체(지체)를 포기하지 않는(19~20절)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떠난 지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도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지체를 포기하지 않는 그를 극찬하신다.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새번역_5:19하~20)”
두말해서 무엇하겠나…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고난 중에 혹 신앙을 저버릴 수 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그를 잠시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해진 이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주의 진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스스로 그 길을 찾고 용기를 내어 다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다. 먼저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도록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그 어떤 믿음의 행동에도 뒤처지지 않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나는?
-무조건 기도하라는 명령인 듯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소통과 공감,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명령이다.
-고난을 만날 때나 즐거워할 인생의 순간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병듦에 지친 영혼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는 최고의 방법은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소통과 공감은 나눔과 기도이다.
-1세기 성도들의 삶은 곤고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해 이어진 흉년(행 11:28)으로 늘 배고팠고, 유대인들의 핍박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신생 종교로서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핍박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사회와 제도, 정부가 그 억울함을 지켜 주지 않았다. 세상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아였기에 당해도 싸다고 여겨졌다.
-세상은 그렇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조리돌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끝까지 함께하셨다. 친히 함께 조리돌림당하셨다. 그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기대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전적 의지”였다. 기도와 찬송은 전적 의지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런 “전적 의지”의 열매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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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4일
기다림…
[야고보서 5:7-12]
시험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시기까지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인내해야 한다. 그 인내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다고 해서 그날로 인생이 확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해도 인생의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과 번민은 여전히 삶을 쥐고 있다. 야고보의 편지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승천하실 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주님(행 1:11)은 아직 오시지 않았고, 성도들은 삶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떠나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1:1; 행 8:1). 계속되는 흉년에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외부에서 위협하는 핍박도 여전하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서로 원망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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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3일
허망한 자랑을 경계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
[야고보서 4:13-5:6]
화제를 전환하여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세상과 벗하지 말라는 권면(4:4)과 연결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와 가난으로 인한 성도들의 시험 상황을 다루었던 1:2~18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내용은 등장인물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4:13~17은 상인들을 예로 들어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교만한 자랑을 경고한다. 둘째, 5:1~6은 부유한 땅 주인을 예로 들어 탐욕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심판을 경고한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생각은 늘 솟아난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허망한 자랑”에 빠지지 않는 삶임을 밝힌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어떻게 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이익을 낼 것을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13~14절) 건강과 재물에 대한 ‘허망한 자랑’의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어지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허망한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4:13~17)
야고보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한다(16절).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이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생을 허망하게, 그리고 악하게 만든다.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15절). 또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안다(17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기에게 있는 자랑거리를 감추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형편을 적당히 나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자기 자랑”이 문제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예로 든 자랑은 “건강과 재물”이다. “들으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새번역_4:13)” 그러나 “건강과 재물”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맞다. 여기저기 경고등이 켜진 건강, 지금 내가 소유한 재물, 혹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수입을 예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쇠약해질 수 있고, 많은 재물을 누리다가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새번역_4:14)” 그러니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화려한 삶인 듯하지만 안개처럼 홀연히,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깨우치는 하늘의 지혜가 있다면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_4:15)”라는 말씀처럼 고백하게 된다.
*”주의 뜻”(개역개정)에 담긴 의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행하는 삶이다. 아!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과 행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채운다.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소망(5:1~6)
땅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야고보가 단호하게, 탄식하며 묘사하는 대목은 놀랍기 그지없다. “비참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니 울며 부르짖으라(1절).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다(2절).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할 것이다(3절).”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 이것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는 “말세에 재물을 쌓고(3절),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며(4절),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5절),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6절)”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착취와 갈취를 당한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부자들은 묵묵히 당하기만 하는 선량한 이들을 끝내 정죄하고 죽인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약자들에게는 인내를 동시에 선포한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당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5:7~8). 1장에서 강조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이 다시 강조된다.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린다(1:12).
*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보상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은 바로 이 소망에서 나온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부자, 일꾼들(약자들)의 품삯을 가로채는(주지 않거나 체불하는) 부자,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부자, 무엇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죽이는) 부자… 그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1년 후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와 인생의 참 주인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본문의 사람은 할 일(장사)도 있고, 투자할 곳(도시)도 정했으며, 투자 기간(1년)도 신중하게 결정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의 힘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교회 역시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돈은 늘 위협과 유혹의 대상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왕상 18:21), 신약에서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마 6:24) 섬길 주인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와 성도에게 세상의 부는 억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문은 결국 부자 이야기다. 부자들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물, 그 재물을 끌어모으는 수완, 완벽한 계획을 통한 최대 이익의 추구와 달성 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재물을 자랑하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익과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보시고 기억하시는 그들의 행동이 있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맨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계획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멋진 청사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행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계획을 관철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정욕에서 나온 죄다(17절).
-‘돈’이 큰 시험거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돈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2:1~4), 돈이 주는 권력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기도 하며(4:11), 돈을 벌려는 계획을 떠벌리기도 한다(4:13). 부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라 울고 통곡할 때다. 그들은 썩은 재물과 좀먹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중에 심판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
-착복한 돈과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이 그들을 고소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슬퍼하고, 울고, 통회하며, 손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 종말의 때에(4:7~9) 그들은 심판을 앞당기는 악행을 쌓고 있다. 의인을 정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는(1:15) 세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허망한 자랑에 대한 유혹이 없을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평판에 참 신경을 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다. 슈퍼맨에게도 안티가 있는데, 나는 안티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허망한 자랑에 대해 안티가 되어야 한다. 자기 욕심과 탐욕에서 오는 부정 축재에 안티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나 감탄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내 생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 때(4:14), 비로소 내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생각은 늘 솟아난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허망한 자랑”에 빠지지 않는 삶임을 밝힌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어떻게 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이익을 낼 것을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13~14절) 건강과 재물에 대한 ‘허망한 자랑’의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어지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허망한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4:13~17)
야고보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한다(16절).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이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생을 허망하게, 그리고 악하게 만든다.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15절). 또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안다(17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기에게 있는 자랑거리를 감추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형편을 적당히 나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자기 자랑”이 문제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예로 든 자랑은 “건강과 재물”이다. “들으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새번역_4:13)” 그러나 “건강과 재물”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맞다. 여기저기 경고등이 켜진 건강, 지금 내가 소유한 재물, 혹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수입을 예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쇠약해질 수 있고, 많은 재물을 누리다가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새번역_4:14)” 그러니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화려한 삶인 듯하지만 안개처럼 홀연히,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깨우치는 하늘의 지혜가 있다면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_4:15)”라는 말씀처럼 고백하게 된다.
*”주의 뜻”(개역개정)에 담긴 의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행하는 삶이다. 아!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과 행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채운다.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소망(5:1~6)
땅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야고보가 단호하게, 탄식하며 묘사하는 대목은 놀랍기 그지없다. “비참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니 울며 부르짖으라(1절).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다(2절).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할 것이다(3절).”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 이것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는 “말세에 재물을 쌓고(3절),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며(4절),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5절),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6절)”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착취와 갈취를 당한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부자들은 묵묵히 당하기만 하는 선량한 이들을 끝내 정죄하고 죽인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약자들에게는 인내를 동시에 선포한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당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5:7~8). 1장에서 강조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이 다시 강조된다.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린다(1:12).
*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보상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은 바로 이 소망에서 나온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부자, 일꾼들(약자들)의 품삯을 가로채는(주지 않거나 체불하는) 부자,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부자, 무엇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죽이는) 부자… 그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1년 후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와 인생의 참 주인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본문의 사람은 할 일(장사)도 있고, 투자할 곳(도시)도 정했으며, 투자 기간(1년)도 신중하게 결정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의 힘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교회 역시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돈은 늘 위협과 유혹의 대상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왕상 18:21), 신약에서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마 6:24) 섬길 주인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와 성도에게 세상의 부는 억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문은 결국 부자 이야기다. 부자들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물, 그 재물을 끌어모으는 수완, 완벽한 계획을 통한 최대 이익의 추구와 달성 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재물을 자랑하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익과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보시고 기억하시는 그들의 행동이 있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맨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계획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멋진 청사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행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계획을 관철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정욕에서 나온 죄다(17절).
-‘돈’이 큰 시험거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돈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2:1~4), 돈이 주는 권력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기도 하며(4:11), 돈을 벌려는 계획을 떠벌리기도 한다(4:13). 부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라 울고 통곡할 때다. 그들은 썩은 재물과 좀먹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중에 심판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
-착복한 돈과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이 그들을 고소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슬퍼하고, 울고, 통회하며, 손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 종말의 때에(4:7~9) 그들은 심판을 앞당기는 악행을 쌓고 있다. 의인을 정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는(1:15) 세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허망한 자랑에 대한 유혹이 없을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평판에 참 신경을 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다. 슈퍼맨에게도 안티가 있는데, 나는 안티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허망한 자랑에 대해 안티가 되어야 한다. 자기 욕심과 탐욕에서 오는 부정 축재에 안티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나 감탄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내 생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 때(4:14), 비로소 내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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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2일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란?
[야고보서 4:1-12]
세상을 벗하는 것(1~10절)과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11~12절)를 다룬다. 3장 후반부에서 언급한 “지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땅에 속한 지혜를 따라 세상과 벗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경고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을 가까이할 때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또한 본 단락은 1:27에서 말하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과 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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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1일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와 땅의 지혜
[야고보서 3:13-18]
선생과 관련된 두 번째 권면으로, 참 지혜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지혜와 총명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본 단락은 땅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설명한다. 독한 시기와 다툼은 땅의 지혜에서 나오며, 땅의 지혜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참 지혜는 위로부터 난 것으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참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온유함으로 선행을 나타내야 한다.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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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0일
혀의 영향력
[야고보서 3:1-12]
가르치는 자의 ‘혀’ 사용에 대한 권면이다. 참된 의로움과 혀 사용을 말한 1:19~27 권면의 구체적인 예다. 본 단락은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며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1~2절), 말과 혀 사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3~12절). 3~12절은 다시 둘로 나뉘어, 3~8절은 여러 예를 통해 말과 혀 사용을 설명하고, 9~12절은 혀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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