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라맛레히에서 엔학고레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사사기 15:1-20]
 – 2026년 10월 01일
– 2026년 10월 01일 –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된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사건이다. 결혼식 이후 삼손은 다시 처가를 방문하여 아내를 찾지만, 장인은 딸을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으니 그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한다. 이에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에 풀어 놓는다. 이로 인해 이미 거두어 쌓은 곡식 단을 비롯해 베지 않은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까지 불에 탔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은 화가 나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인다. 이를 빌미로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쉰다(새번역_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그곳을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부른다.

삼손이 몹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낸다.



1. 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장인은 이미 딸을 다른 친구에게 시집보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했다. 삼손은 이런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이를 빌미로 또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에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 명이 동원됐다. 그 마음으로 블레셋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는 데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나귀의 새 턱뼈”(15절)가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집어 들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게 하신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삼손은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삼손이 홀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삼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어도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 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셨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쓰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시며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싸웠다!



2.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이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삼손은 이 싸움을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어도 결국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손은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의 갈증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버려지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목이 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기에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들게 하셨고, 그것을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르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받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를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 명을 모아 그를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갈증이 비로소 삼손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해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를 당하고도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골칫덩이이기는 했지만,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주소였다.



나는?
-급하고 무모해 보이는 삼손의 분노와 사사로운 보복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1~19절). 아내를 잃은 삼손은 장인의 궁색한 변명과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블레셋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야비한 보복(6절)은 블레셋을 향한 삼손의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블레셋과 공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의 부정한 연합을 깨뜨리신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들의 구원자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굴욕을 보인다. 심지어 블레셋의 압제를 두둔하기까지 한다(9~13절). 가장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승리한(1:1~3) 유다 지파가 지금은 그 전의(戰意)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압제에 체념한 듯 거짓 평화와 안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삼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블레셋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내재된 집요하고 끈질긴 ‘노예근성’ 혹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으로 대승을 거둔 삼손의 노래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가 했다는 자랑만 보인다(14~17절). 그는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이 전쟁이 지도자 위에 지도자가 계신 거룩한 전쟁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보이는 대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과 허영이 아닐까?

-대승을 거둔 삼손이 극심한 목마름으로 부르짖자, 그를 살리기 위해 샘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갈증을 통해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삼손은 비로소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를 허락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신다. 큰 승리의 개가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고 내일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의 고백이다.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사 시대와 다름없는 이 시대 속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삶의 거처가 어디든 그곳이 “엔학고레”가 되기를 바란다. “부르짖음”이 쇠퇴해 버린 시대다.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분열과 혼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양극화의 그림자, 교회 공동체의 쇠락 등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부르짖음”이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도리어 블레셋화되어 버린 나머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던 삼손조차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일깨워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로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을 때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처럼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 기도제목

*주님, 홀로 싸우게 하지 않으시고 늘 함께 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라맛레히에 취하지 않고 엔학고레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