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삼손의 실패와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혜 [사사기 16:15-31]
 – 2026년 10월 03일
– 2026년 10월 03일 –
세 번의 실패에도 들릴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대로 세 번의 경고(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들릴라의 품에 방치한 삼손은 결국 힘이 빠져나가 붙잡히고, ‘가사’의 깊은 감옥에서 놋줄에 묶여 맷돌을 갈다가, 자신을 웃음거리로 즐기는 다곤 신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사사들을 보내 무수한 기회와 경고를 주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곧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무수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함에도 돌이켜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 나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들릴라를 사랑했기로서니, 자신의 약점을 캐물으며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에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니…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이었지만, 들릴라는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약속한 블레셋 방백들에게 진심이었다. 참 딱하다… 그런데 삼손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내가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나를 옭아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들릴라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의 무릎베개에서 이내 잠들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릴라는 사람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의 머리털을 깎게 한 다음 일부러 괴롭혀 보기까지(새번역_19절)” 하며, 블레셋 방백들이 주기로 한 은 5,500세겔을 위해 ‘진심’으로 행한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라는 들릴라의 외침에 깨어나 “전과 같이” 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20절)”. 결국 붙잡혀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가사’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이 떠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감각하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삶이 맞이하게 될 ‘조롱과 멸시’의 비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 하나님이 떠난 교회가 맞이하게 될 모습이 분명하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노역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삼손의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인 듯하여 고통스럽다.

*암울한 조선에 들어와 의식을 깨우고 삶을 변화시켰던 개화기 한국교회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1. 부끄럽고 민망하고 송구하고 송구하지만…
삼손은 돈을 향한 들릴라의 진심 때문에, 자신이 진심이었던 사랑에 배신당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 땅을 망쳐 놓은 원수,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새번역_24절)”며 삼손을 구경거리, 멸시거리로 삼았다. 이를 고스란히 당하는 삼손의 마음에 뒤늦은 후회와 울분이 넘쳐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큰 제사를 드리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다곤 신전에 끌려 나갔을 때, 자신을 향해 모욕과 비웃음을 던지며 유흥을 즐기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_28절)”라고 외쳤다.

삼손은 끝까지 자기 생각만 했다. 자신을 태에서부터 불러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원수”를 갚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다. 사사로서의 사명을 위해,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려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달라고” 애원했을 뿐이었다. 여인을 보고 즐기는 삶을 산 결과로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사사로 20년을 보냈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기 힘을 따라 막무가내로 살아온 것을 도무지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이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고 송구하다…



2. ‘그러나 다시’ 그냥…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22절)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새번역_22절).” 삼손은 머리털이 깎였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자기 힘의 원천에 관한 비밀을 진심으로 털어놓았을 때(17절), 이미 하나님의 영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눈앞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의 소중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만 것이다. 정욕에 눈이 먼 그는 들릴라의 의도도 간파하지 못한 채 나실인의 언약조차 내팽개쳤다. 머리털은 깎였고, 두 눈은 뽑혔다. 지난 20년 동안 그에게 있던 힘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았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손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맷돌을 돌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진 힘으로 인해 버겁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무력해졌다. 그 상태에서 회복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사치였다.

*우리의 구원 얻음이 이와 같지 않겠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여망을 심어 주신다. 나의 욕망과 집착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머리털을 자라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털은 자연스레, 그냥 자라났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은 이와 같다.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처럼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이다.

*어쩌다 망할 수도 있다. 아니, 반복된 실수가 큰 죄를 짓게 하고, 큰 죄가 쌓여 재앙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큰 재앙이 몰려와 비참하게 되었어도 기억해야 한다. “머리털은 그냥 다시 자라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회복과 구원의 싹이 그냥 다시 자라난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덧 자라난 머리털을 보고 ‘아… 머리가 길었구나’ 느끼듯,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아무리 실패한 듯 보이고 완전히 무너진 듯 보여도 그곳에서 다시 자라난다. 머리털이 밀렸어도 다시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이 맞다! 완전한 실패에서도 다시 자라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요 사랑이다.



3. 부르짖으며 간구하되(28-31절)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 그 희미한 복선(희망)만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다. 삼손의 최후는 결코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한 모습이 아니다. 비록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약속하신 대로(13:5)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최후를 맞게 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삼손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개인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철없는 삼손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다.

*어떤 동기에서든 삼손은 하나님을 찾았다. 평생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던 그였지만,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 이처럼 “그냥 다시 머리털을 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이다.

*사사기의 기록에서 삼손은 딱 한 번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딱 한 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딱 한 번 찾고 구한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자신도 죽어 갔다. 이런 삼손의 모습을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늘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 그래야 할까? 늘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는 이것을 잃어버린 시대였다. 삼손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 최후의 순간에 딱 한 번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했을 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삶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나는?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 ‘이번만’을 외치며 부르짖는 삼손을 외면하지 않으신다(22, 28~31절). 적에게 밀린 머리를 다시 자라게 하시고 잃어버린 힘을 되찾게 하신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 허락하신다. 대적의 성문(16:3)에 이어 신전까지 무너뜨리고, 그들의 축제의 날을 심판의 날이 되게 하신다. 내 맘대로 내 생의 마침표를 찍기 전에 주의 은혜를 바라야 하리라. 진정한 ‘은혜’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다.

-들릴라의 끈질긴 추궁에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인 ‘나실인의 비밀’을 털어놓고 만다(15~18절). 삼손의 눈먼 사랑은 그에게 번뇌와 고통만 안겨 주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는다. 한순간의 쾌락이 낳는 결과와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은가? 이제 이 세상을 향한 구애를 멈추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또 인간의 정욕을 부채질하는 ‘사탄의 기만’과 자기 부정으로 이끄는 ‘주님의 권능’을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리라.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지만 이미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후였다(19~21절). 하나님이 떠나시자 삼손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대적에게 끌려가 두 눈이 뽑히고 대적의 노예와 노리개(25절)로 전락한다.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면, 그분을 떠나서는 생명도 능력도, 내 생의 의미와 목적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블레셋 방백과 백성은 두 눈이 뽑힌 삼손을 희롱하고 자신들의 신을 찬양하며 승리를 만끽한다. 그러나 삼손을 향한 대적들의 조롱은 이스라엘을 향한 조롱이자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구원자)가 삼손이 아닌 하나님이시요, 삼손과 이스라엘을 그들에게 넘긴 것이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알지 못했다. 삼손 이야기는 연약한 인간의 허점과 허물,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과 배신, 변절과 반역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왕으로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심을 웅변한다.

-포기할 줄 모르는 들릴라의 집요한 요구와, 이 여인의 불온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삼손의 얼빠진 안일함이 어우러져 결국 힘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나실인 서약이 끝나고서야 가능했는데, 삼손은 들릴라에 의해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린 채 원수의 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깊은 영적 잠에 빠져든 것이다.

-삼손은 힘을 잃고 눈이 뽑힌 채 놋줄에 매여 가사로 끌려가,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가사는 일전에 삼손이 성문을 떼어 가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곳이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무력하게 치욕을 당한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짝사랑하는 인생은 ‘이성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

-삼손은 다곤 신의 축제에 웃음거리로 끌려온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신전에서 죽을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구한다. 삼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삼손은 기둥을 무너뜨려 신전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떠난 셈이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각종 사건 사고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이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사(목사)다… 화가 난다. 이 사회를 향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악영향만 끼치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드러난 그리스도인의 민낯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금의 교회는 그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회복의 길이 아닐까 싶다. ‘인간적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라.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며 온갖 조롱과 수치, 모욕을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런 것 같다. 이것이 현실이자 현주소이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무력하게 무너져 가야 할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삼손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한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새번역_28절)” 우리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 기도제목

*주님,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지만,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주님, 지금 한국교회의 기막힌 상황에서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머리털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