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브아의 노인과 레위인의 대조적인 삶 [사사기 19:11-21]
 – 2026년 10월 08일
– 2026년 10월 08일 –
닷새 만에, 그것도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에 길을 나선 레위인은, 곧 해가 질 것을 우려한 종이 여부스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제안하자 이를 거절하고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서 유숙하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브아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져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나그네를 대접할 이를 기다렸지만,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다(11-15절).

하지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 노인의 눈에 띄어,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다. 그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지만, 베냐민 자손들이 사는 기브아에 거류하고 있었다(16절).



1. 나그네였기에 나그네를 돌아보아야…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하나님께서는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 나그네까지 돌보라고 하셨다.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5절)” 기브아 사람들은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조차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노인만이 밖에서 노숙할 위기에 놓인 레위인을 영접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2. 헛똑똑이 레위인…
그는 장인에게 5일 동안 대접만 받았다. 그러고는 기어이 오후에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유숙할 곳을 정할 때 여부스는 거절하고 기브아나 라마를 선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12절)” 레위인으로서 엉망인 삶을 살면서도 이방인의 땅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이 자세는 무엇일까? 행음한 첩을 곁에 두는 일에는 열심이면서 이방 땅은 부정하다며 멀리하고, 장인의 접대에 5일이나 머무를 만큼 섬기기보다 대접받는 데 익숙한 그는, 이방인보다 동족에게 더 융숭한 영접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여부스를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땅보다 자기 민족의 땅이 더 안전하리라는 생각은 이내 함정이 되고 만다. 기브아에는 레위인 일행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늦게라도 밭에서 일하다 들어오는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자기가 거류하던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노인이었다. 기브아 주민들은 냉담했다. 자신의 삶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하는 일에 게을렀던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관심과 냉대로 되돌려 준다. 레위인은 겉만 번드르르한 헛똑똑이다.



3. 환대한 노인…
이스라엘은 공동체였다. 무수한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어도 이스라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와 긍휼의 의무”를 꿋꿋이 감당했기 때문이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지침이었다.

그런데 사사 시대는 이 가치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시대였다. 그 많은 기브아 사람 중에 성문 앞 넓은 광장에 앉아 환대를 기다리는 레위인 일행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본문의 노인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을 발견한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레위인 일행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노인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인 ‘나그네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을, 변질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속에서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를 지키는 이는 어느 곳에나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내가 이곳에서 이 가치를 지키며 살아 내기를 소망한다.



나는?
*레위인은 오후 늦게 장인의 집에서 출발하였기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 자손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갔으나 냉대를 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류하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레위인은 가까운 예루살렘 성읍에서 유하자는 종의 제안을 거절한다(11~13절). 선민이 이방 성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방인을 부정하다며 멀리하면서 행음한 여인을 곁에 두는 것은 그의 위선적인 신앙을 부각할 뿐이다. 또한 그의 편견은 합리적인 제안마저 묵살하게 만든다. 정치적 이유든, 종교적 편견이든, 교육과 성장 배경 때문이든, 선입견과 배타심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나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할 때, 누구든지 ‘편협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아로, 신앙적 소신에 따라 무리하여 도착했지만 그들의 냉대는 밤공기만큼이나 차갑기만 했다. 자신들을 반겨 주리라는 레위인의 기대는 무너지고, 동족을 믿었던 그의 마음에는 당혹감이 물밀듯 밀려왔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언약 규정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레위인 일행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씻을 물과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다(16~21절). 타향살이에 대한 동병상련이기도 하겠으나, 그의 남다른 관심(‘눈을 들어’)과 호의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생존과 경쟁 속에서 이웃과 지체를 향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하기에 곁에 있어 주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레위인의 결정과 삶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반면 노인의 삶은 기브아 사람들이나 레위인의 삶과 달랐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에서 급속히 떠나가도 꿋꿋이 “환대법”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이 감사하다. 모두가 냉대하는 그 현장에서 그는 따뜻한 환대와 섬김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환대와 포용의 순종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 기도제목

*주님, 냉랭한 세상 속에서 섬김의 따뜻한 손길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헛똑똑이보다 묵묵히 환대를 실천한 노인처럼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