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레위인의 왜곡된 증언과 이스라엘의 분열 [사사기 20:1-7]
 – 2026년 10월 10일
– 2026년 10월 10일 –
레위인 첩의 토막 난 시신을 받아 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격분하여 미스바에 모였다. 그리고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고 한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고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으며,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와 함께 들려온 기브아의 소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육백 명만 남는 멸절 직전의 참극에 이른다(20:47). 이렇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1. 참으로 오랜만에 모였다!(1~2절)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 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총회로 모였다. 성경은 그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1절). 가나안 땅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까지 나아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다.

모인 수는 칼을 빼는 보병만 자그마치 40만 명이었다(2절).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미처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저마다 싸워 왔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죽였다(12:1-6).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의 트집을 부드럽게 받아 주어 그나마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8:1-3).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는 저마다 한달음에 미스바로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19:30)”라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면서,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당혹스럽기도 하다.



2. 그런데 그 레위인이…(3~7절)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낸” 일(19:25)을 꽁꽁 감춘다. 또 불량배들은 본래 레위인과 “관계하려” 하였는데(19:22),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고 말을 바꾼다(5절).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아무런 돌이킴이 없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증언이었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그의 행동은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린다. 본문은 가해자를 “불량배들”(19:22)이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이를 “기브아 사람들”(5절)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3절). 레위인은 당사자가 빠진 자리에서 그들의 해명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술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증언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갚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결국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직접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능욕을 당하게 했고,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19:28) 토막 내어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저지른 것인 양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분노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제히’ 미스바로 모인다(1~2절). 무려 40만 명이 모인다. 사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레위인이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충격적이고 기괴하였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던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웃에게로 시야를 넓히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기브아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사하고 방안을 숙의하며 잘못을 가려 징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없이 희생양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참혹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일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기도와 대안” 없는 날 선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기보다, 근본 원인을 묻고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3절). 이해당사자인 그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듯하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먼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고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야 했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의를 외면하고 공동체의 연합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13절). 이런 베냐민 지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앞세워 진실을 왜곡한다면 공의와 정의는 세워질 수 없고, 공동체도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하면 불편하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늘 모든 일에 그릇됨 없이 공평하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레위인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4~6절). 그의 설명은 대체로 사건의 전말에 부합하지만, 곳곳에 자기중심적인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 첩을 무책임하게 내어 준 일은 숨기고 자신이 받은 피해만 강조한다. 죽은 첩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과장한다. 마땅히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일인지는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또한 훼손된 시신을 보내 분노를 일으키고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도 회피한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악한 자기중심성부터 회개해야 했다. 죄악을 고발하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도 살펴야 했다.

-레위인은 의견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7절). 그러나 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으라는 꼴이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진상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다르고, 대책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결의하고(8~11절), 하나님께는 누가 먼저 올라갈지만 물었다(18절). 자기 소견만 난무하는 사회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미스바 결집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할지라도 사안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동족 간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분에 차 있을 때는 누구도 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심 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당한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정말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19:22)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외쳐 대던 그 소리를 기브아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겪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기브아 사람들은 철저히 범죄의 현장을 외면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사 시대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철저히 파괴된 시대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19:25). 첩이 당한 능욕은 자기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의 결과였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떠한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받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5:15-17), 율법을 거스른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자기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17:6; 21:25) 사사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을 뿐,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서 철저히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멸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사 시대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 저마다 judge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내세우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체한 듯하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 기도제목

*주님, 나부터 돌아볼 마음을 주십시오.
*주님, 지체의 죄 앞에서 의인의 꼿꼿함보다 죄인의 두려움으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