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스라엘 연합군의 참패와 교훈 [사사기 20:8-28]
 – 2026년 10월 11일
– 2026년 10월 11일 –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기브아로 진격한다. 희한한 것은 한 사람도 일방적인 레위인의 주장에 기브아 혹은 베냐민 지파의 말을 들어 보자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패역한 기브아의 불량배를 응징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편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아예 미스바로 모이지 않았다. 기브아의 불량배를 내어 놓으라는 이스라엘 연합의 요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연약한 자신들을 치려고 11지파가 연합한 것을 보고 더욱 굳은 결심으로 항전을 불사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연합은 베냐민 지파와 세 번의 전투로 충돌했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연합이 이만 이천 명을 잃었고, 두 번째는 만 팔천 명이 죽었다. 당황스러웠다. 베냐민 지파는 겨우 이만 육천 명(기브아 거민 칠백 명을 더해도 이만 육천칠백 명, 15절)이었기에 이런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1. 이해할 수 없는 참패 앞에(18, 23절)
40만 명의 이스라엘 11지파 백성들과 2만 6천 7백 명의 베냐민 지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18절)”라고 물었다. 유다가 올라가라는 말씀에 힘껏 나아갔지만 22,000명이 전사한다.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벧엘(27절)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며 다시 여쭙는다(23절)”.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싸워라”고 말씀하셨다.

*기브아의 죄악은 결코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이 범죄의 도시가 되어 버린 곳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두 번의 전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에도 모두 패배한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공명정대한 대의가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는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싸움을 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이 첫 번째 전투에서 참패하고 날이 저물도록 울부짖으며 “이 싸움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 하신 죄악에 대하여 대의를 모으고 행한 전쟁이었기에 참패의 충격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본문이 참패의 원인을 직접 지적해 주지는 않지만, 사사들의 기록들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어떤 전쟁이든 대의나 명분, 전력의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문은 참전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전력을 비슷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기록했다.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잘 싸우는 용사_새번역_17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대열을 갖추었던 그곳으로,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새번역_22절)’, ‘… 죽은 이들은 모두 칼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25절)’. 칼을 잘 쓰는 자들, 스스로 용기를 내어… 등의 표현은,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견을 구하고 참담하게 울부짖었을지라도 결국 전쟁의 과정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을 더 의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쟁의 승패는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했다. 자신들의 전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규모의 차이로 승리를 이끌어 오지 못함을 첫 번째 참패 이후 곧바로 깨달아야 했다. 숫자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일이 기브아의 죄악이나 이를 두둔하는 베냐민 지파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레위인의 당혹스러운 타락 생활이나, 그의 말 한마디에 섣불리 동족을 원수 취급하는 저급한 공동체 의식,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고 있었을 우상숭배와 각종 범죄들,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단 지파의 상상하지 못할 우상숭배의 전횡이나 에브라임의 미가가 보인 참담한 도덕 수준과 우상숭배를 생각해 보라. 과연 미가나 단 지파만 독특하게 그런 일을 벌였을까?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한 정서가 이스라엘 온 지파들에게 만연했기에 오히려 잠잠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레위인의 선동에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며 마치 자신들은 온전히 깨끗하고 기브아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는 척결해야 할 혐오스러운 범죄자들이라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꿰뚫고 계셨다.

*결국 지나친 이기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2. 베냐민 지파의 태도(12-16절)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기브아의 불량배를 내놓으라고 할 때 순순히 협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불의하고 패역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용납하고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11지파가 왜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응징하려는지 그 진위를 들어 보았어야 했다. 이런 소문일수록 재빨리 퍼지는 속성이 있으니, 좀 더 신속하게 움직여서 회개와 반성의 몸짓을 보여 주었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왜 이렇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베냐민 지파는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뼈를 깎는 심정으로 참회하기보다 소수의 범죄자들과 한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다. 다른 지파들이 자기 지파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다.

더구나 싸움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뽑힌 칠백 명 왼손잡이들은, 무릿매로 돌을 던져 머리카락도 빗나가지 않고 맞히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16절)” 이런 자신감 때문에 공멸의 길로 들어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민감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에 민감하였다. 자신의 죄를 자존심의 상처로 포장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결국 심판받는다.



나는?
-섣부른 전쟁을 결의했다. 레위인의 자기 반성 없는 오기 어린 고발과 선동뿐인 발언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은 채 전쟁을 결의한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그토록 몸을 사리던 이스라엘이 약한 동족의 잘못을 응징하는 데는 지나치게 용감하다. 이런 비겁함이 또 있을까.

-레위인의 진술을 들은 이스라엘 총회는 기브아인들의 악행을 처벌하기로 결정한다(8~11절). ‘외세의 침입’에선 소극적으로 방어하던 자들이 ‘형제의 범죄’에서는 의분을 삭이지 못한다. 비극적 결말을 내다보지 못한 지극히 충동적인 판단이다.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황은 지혜로운 왕이 부재한(21:25) 한계와 현실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인도와 뜻보다 앞서는 섣부른 결정과 행동은 또 하나의 기만이자 오만이다.

-한편 기브아 비류들의 악행을 전해 듣고 그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베냐민 지파는 거절한다. 그 대신 그들도 전쟁을 결정한다(12~17절). 힘만 있으면 선악도 정의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들에게는 물매로 돌을 던질 수 있는 7백 명의 왼손잡이 용사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자기 지파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악행자들을 처단하여 공동체 안에 공의를 세우려는 의지를 꺾는다. 베냐민 지파의 독단적인 행태는 원칙도 명분도 없이 지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뭉치고 흩어지기를 거듭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의 이기적인 삶이 가져온 관계의 균열이나 붕괴는 없는지 돌아보라. 불의한 일임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없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유다는 하나님께 전쟁에 대하여 묻는다. 하지만 누가 올라갈지를 물었을 뿐 전쟁을 원하시는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가르쳐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 도움 없이도 객관적 전력상 베냐민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차례나 패하고 만다. 하나님이 지게 만드신 것이다. 베냐민이 심판받기 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심판받아야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베냐민이나 레위인이나 기브아나 이스라엘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400,000명 vs 26,700명…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싸움… 두 번의 결전은 의외로 이스라엘 400,000명의 참패였다. 22,000명, 18,000명 전사… 반면에 베냐민 지파의 피해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를 열어 의사 결정을 하고, 개전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참패 이후 벧엘로 올라가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었고(23절)”, 두 번째 참패 이후에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 울었다(26절).

-새번역은 이 장면을 두 번이나 “주님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두 울음은 같은 울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허락하신 전쟁에서 이어진 참패를 놓고 터져 나온 이 울음이 과연 어떤 울음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울음(23절)은 회개와 참회의 통곡이 아니었다. 황당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다. 그들은 울고 나서 곧바로 “다시 싸워도 됩니까?”를 묻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의 대열로 다시 나아간다(22절). 울음은 있었지만 돌이킴은 없었다. 그들은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약한 베냐민 지파에게 참패당하여 분하고 억울해서 통곡해서는 안 됐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전진한 전쟁이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참패 앞에 분노한 통곡이어서는 안 됐다.

-두 번째 울음(26절)은 달랐다. 이번에는 “온 백성”이 벧엘로 올라가 울고, 그 자리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형제의 죄를 통한히 여기며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눈물이다. 자신들의 오랜 반역을 시인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구하며, 이 사태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억울함의 울음이 참회의 울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대답이 달라진다. 18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은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금식과 제사가 드려진 뒤 28절에서는 처음으로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고 승리를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싸움’을 허락하셨지만 ‘승리’를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승인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전력’이 아니라 ‘관계(26절)’였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임을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때로 고통스러운 실패는 기고만장하던 나를 낮추고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작은 실패를 통해 내 허물을 드러내시고 더 큰 실패를 막아 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두고 통곡해야 했을까? 레위인이 첩을 두었고, 불량배들이 약자를 능욕하며, 그렇게 죽어간(죽인) 시체를 토막 내어 거짓으로 포장하여 이스라엘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자신들의 완악함에 통곡하며 참회했어야 했다.

-레위인이 자신의 체면이나 정의로움(?)을 입증하려고, 거짓으로 정의를 포장하기 위해 총회 앞에서 거짓 증언을 서슴지 않는 “자기 소견에 지나치게 치우친”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했어야 했다.

-이스라엘 지파의 연합군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인 양 칼을 빼기 전에,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의 모습을 자기 자신들에게 대입해 보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치우치며 범죄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통회했어야 했다.

+ 기도제목

*주님, 그때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이 오늘에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황당하고 분노합니다. 하지만 참회의 통곡을 잊지 않겠습니다. 억울함의 울음이 아니라 돌이킴의 울음을, 내가 먼저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헛된 자만심이 공동체를 무너뜨림을 보았습니다. 내가 가진 헛된 힘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을 더욱 의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