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스라엘의 타락 [사사기 21:13-25]
 – 2026년 10월 14일
– 2026년 10월 14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아내를 얻지 못한 베냐민 사람 2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려고 ‘묘책’을 마련한다. 놀랍게도 그 방법은 실로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씩 붙잡아 가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출애굽 은혜와 광야의 보호하심을 기념하며 지켜야 할 절기에, 기뻐하며 춤추는 여인들을 말이다.

이 절기는 초막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대의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절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즐거이 외치며 춤추는 바로 그때, 실로의 여인들이 베냐민 청년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상식을 벗어난,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납치한 뒤에야 당사자들의 마음과 부모의 승인을 타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피하려고 마련한 극히 비상적인 방법이었기에 전례가 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비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 시대는 몰상식마저 상식이 되는 시대였다.

한편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납치당한 여인들의 아버지들을 달랜다. 지파의 멸족은 막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이렇게 납치해서라도 멸족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공동체 전체의 짐을 몇몇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렇게 멸족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베냐민 지파는 각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고통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놀랍게도 훗날 이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 에훗이 나온다(3:15).





1. 결혼으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나는 책

사사기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옷니엘과 악사의 결혼으로 시작해, 무참한 폭력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으로 끝난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약자들에게 떠넘겨지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 레위인의 첩에서 시작해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과 실로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타락한 사회가 만든 폭력의 희생자였다.




2. 누구를 위한 회복이었나 (13~18절)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13~15절). 그러나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존속’이라는 명분일 뿐, 그들의 진의는 알 길이 없다. 언약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지, 권력을 행사할 영역을 잃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태도는 ‘만용’이 아니라 ‘수용’인 듯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평하기보다, 내 죄가 자초한 결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여인의 수가 아직 부족했지만, 장로들은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그것을 어기면 화를 당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변명한다(16~18절).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희생할 의지가 없었다.

베냐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때늦은 행동들을 보라. 한 지파를 향한 사랑을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강제로 잡아 온 처녀 400명을 베냐민에게 보내고 평화를 선포했다. 그 와중에 고통당한 수많은 여인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베냐민을 지나치게 응징한 데 대한 후회는 있었지만, 야베스 길르앗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무슨 평화 선포인가.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하나도 없다. 회개와 반성은커녕, 수습한다며 하는 일이 또 다른 살육과 진멸, 납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3. 절기를 이용한 납치 계획 (19~24절)

부족한 신부 200명을 구하려는 이스라엘의 묘안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첫 해결책이 실패하자 장로들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계획을 추진한다.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묵인하고 편법을 자행한다. 그들의 영적·도덕적 무감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들의 묘안을 이루려고 여호와의 절기까지 이용한다. 실로의 처녀들이 명절을 지키러 나올 때 납치하도록 사주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은혜를 베풀라”고 말하라고 일러 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로의 처녀들을 대속물로 내준 일은, 레위인이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첩을 내준 일과 무엇이 다른가?




4. 사사기의 결론 (25절)

25절은 사사기의 결론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풀면 이렇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말씀이 없으면 죄는 실수로 바뀌고, 통회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로 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에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행했다. 누구도 남을 판단하거나 응징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깊게 할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 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내놓은 처방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전통과 꾀로 해결하려 하니 자꾸 빈틈이 생겼다. 조금만 고민하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생각과 계획을 다졌다면 금세 알아챘을 텐데, 꽉 막힌 생각과 시선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수렁에 빠졌다. 죄가 반복되고 가중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외면한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소견이 난무하니 악영향이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부대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기리시탄(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상당수가 루터교 성도였지만 나치의 광기를 막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조선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침묵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가?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의 평범성”에 젖어 든다. 악은 몇몇 악인이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눈앞의 악행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저항하지 않을 때, 그것은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거나 깨닫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조차 하지 않으니, 총회에서 결정한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주저 없이 행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악의 평범성”이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꼬인 상황 속에서 내놓은 고육지책은 가장 합리적이고 탁월한 묘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후세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혜안 없는 고통의 결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기도제목

*주님, 고육지책도 죄가 되어버린 결정을 오늘도 조급하게 결정합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고민하는 영성을 주십시오.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고민하며 치열하게 깨닫겠습니다.
*주님, 사사기가 자기 생각이 최고인 것을 포기하지 않는 완고하고 답답한 시대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생각, 하나님 뜻이 최고, 최선인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