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죄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는 본문이다. 동시에 죄에 무뎌진 인생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이와 같은 영향력을 예측이나 했을까? 만약 예측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죄의 씨앗이 얼마나 큰 불행의 열매를 맺었는지를 살핀다.
다윗의 범죄로 인해 다윗의 집안에 재난이 임할 것을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삼하 13장부터 20장까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주신다. 그 출발이 암논의 근친상간이다.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을 암논이 짝사랑하고 암논의 사촌 요나답이 제안한 간교한 방법을 따라 다말과 강제로 동침한다. 하지만 다말을 욕보인 후에는 그녀를 더욱 싫어한다. 암논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정욕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암논은 이 일로 인해 자기 무덤을 파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위기 20장 13-17절에서 나타나듯 이스라엘 내의 근친상간은 수간과 남색하는 죄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이 일을 보고 받고 격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다윗의 가정에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고 이스라엘에 어려움을 불러 왔다.
이 일로 인해 결국 아들끼리의 살인이 벌어진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의 사건이 벌어진지 2년 후 암논을 살해한다. 그의 살인동기는 겉으로는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이었지만, 내적 동기는 복수심이었다. 그는 암논을 죽이기 위해 2년 동안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철저하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분노가 올라올 수 있으나 그 분노가 복수심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곧바로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그술로 도피하여 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이 모든 일을 알게 된 다윗은 옷을 찢으며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편으로는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염려한다.
1.기회를 놓친다(23절)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하나님은 매몰찬 분이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 암몬, 압살롬등을 바라보며 방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신다.
먼저 23절을 살펴보자 “만 이년 후에…” 본문은 암논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한 후 이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암논에게는 사건이 잘 해결되었구나 라는 안도의 착각을, 압살롬과 다말에게는 치욕스러운 고통의 상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와 시퍼런 칼을 어찌할지 와신상담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을까? 만약에 그 사건이후 2년 동안 암논이 치열하게 다말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쉽게 열려질 마음과 용서를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책임지려 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만약 그런 과정을 통해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면 훌륭한 왕이 될 기회를 얻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암논은 2년 동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암논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신 것이다.
*죄가 조용히 넘어 갔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죄는 크기만 점점 더 커질 뿐이다. 죄를 암덩이로 비유한 것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암 환자가 생활 태도와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암덩이가 더 커지듯이 죄에 대하여 해결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면 오히려 더 커질 뿐이다.
2.도무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압살롬은 이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시퍼런 칼날을 꺼내든다. 23절은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바알하솔이란 동네는 벧엘에서 북동쪽으로 8-10km 떨어진 해발 1,000m의 고산 지대로서 목축업을 하기에 적절한 지역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20km정도 떨어져 있어서 다윗 왕이 조치를 취하기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이점도 있기도 했다. 또 양털을 깎는 시기인데, 이 날은 대단한 축제일로 지켰다. 모든 가족들과 주민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 날이다.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시기이다. 압살롬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죄로 치닫는 인생은 이처럼 그것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임에도 올바른 길이라고 착각하여 죄악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더욱 치밀하고 대담하게 죄를 기획한다.
압살롬은 왜 양털깍는 날에 다윗을 초청했을까? 본문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암논을 초청하겠다고 하면 복수하겠구나 라고 눈치를 챌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의 마음을 먼저 안심 시킨 후 아들들을 초청한다. 아버지를 이용하여 아들을 끌어들이는 계략은 놀랍게도 암논이 아버지를 이용하여 다말을 끌어들이는 모습과 똑같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무말 없이 암논을 비롯해 아들들을 함께 보낸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 적잖게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보통의 판단력이라면 그 치욕스러운 가정 내의 근친상간의 사건의 후폭풍이 얼마나 심각할지 간파하고 있어야 했고 압살롬의 이런 행동에 저의가 담겨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음에도 다윗에게 이런 판단력과 총기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밧세바와의 간은 사건 이후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암논이 다말을 보내달라는 비상식적인 요청을 그대로 허락하는 장면이나, 암논이 근친상간을 했을 때 분노만 할 뿐 말씀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 모습, 압살롬이 암논과 아들을 양털깍는 날의 축제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쉽사리 허락하는 모습 등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모습이다. 왜 이렇게 판단력과 분별력이 떨어진 것일까? 그가 죄의 대하여 무뎌지고 무뎌져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총기가 사라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죄에 무뎌진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아는 광야의 다윗, 즉위 초기의 다윗의 모습과 비교하여 이런 다윗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분명하다. 삼하 2:1, 5:19를 보라. 어떤 일을 하든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떤가? 다윗을 비롯해 암논, 압살롬 모두 하나같이 묻지 않는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지혜롭게 묻는 사람이 묻지 않는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있다. 삶의 지혜들이 묻는 행동 속에 들어있다.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묻지 않고 홀로 생각하다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지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께 묻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묻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물음에 응답해 주신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답을 정해 놓고 묻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즉 묻는 태도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응답을 겸손하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3.늘 뒷북만 친다(30-31)
28-29절은 압살롬은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28절 “이미”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압살롬은 그 사건 이후 삶의 초점이 암논 제거에 두고 준비한 듯 보인다. 암논은 차기 왕위 서열 1순위다. 이에 관련하여 “압살롬은 이미 자기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암논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질 때를 잘 지켜 보아라. 그러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죽이라고 하면, 너희는 겁내지 말고 그를 죽여라.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니, 책임은 내가 진다. 다만, 너희는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해치워라!”(새번역_28절) 라고 독려한다.
*책임은 내가 진다는 압살롬의 말에 맹신하고 암논을 찔러 죽인다. 한편 암논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2년 전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다면 조심했어야 횄다. 그런데 그는 술 취해 있다. 통상 죄를 지은 사람은 예민하기 그지 없다. 늘 주위를 둘러보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는 술 취해 있다. 이 모습은 그렇게 악한 일을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기 커녕 무디고 무디어진 모습이 충격적이다. 오히려 아무 거리낌 없이 평상시와 다름 없는 삶을 사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30-31절을 함께 읽어보자. 죄에 무뎌진 인생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인가? “뒷북”이다. 죄로 인해 판단이 무뎌진 이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금만 생각하고 그보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방관했다가 일이 발생하면 옷을 찢고 통곡을 하고 재를 뿌린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된다. “뒷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렇기에 내가 죄를 멀리해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뒷북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죄에 대하여 민감해 져야 한다.
또 다윗은 이 일을 소문(소식)으로 듣는다(30-31절). 그런데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인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소문만 듣고도 통곡하고 슬퍼한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행동한다. 확인하지 않는다.
4.공감이 결여된다. 자기만 생각한다.
이 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요나답”이다. 32-33절 이다. 이 사건의 발단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아주 간교한 사람이다. 요나답은 정말 노답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암몬의 죽음 소식이 들려오면 뭔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일말의 슬픔도 없다. 오히려 왕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다 죽지 않았다.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차가운 말인가! 위로와 공감부터가 아닌가? 걱정하지 말라니… 다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를 믿으라니..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을 보라 사건만 생기면 더 부풀리고 군중심리를 이용해 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 사건을 통해 이익만 보려한다. 성경은 이런 요나답의 모습을 우리에게 투영한다. 내게 유리한 것이 생기면 기회다 싶어 아픔과 슬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좁은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2년 동안의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공인가? 34, 37-38절을 살펴보자. 자기딴에는 정의구현으로 복수에 성공하나 그것의 댓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과도 멀어진다. 그술 땅은 가나안 전쟁 때 바산왕 옥이 다스리던 땅이다. 우상이 가득했던 땅이고 헤렘 명령을 받았던 땅이다. 그 땅에서 3년을 거한다. 하나님을 섬겼을까?
또 다윗은 어땠을까? 39절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70인역 번역은 시간이 흘러 압살롬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4장은 이로 인해 다윗이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했다.
다윗, 압살롬, 암논이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에 무뎌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밧세바 사건 이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죄에 무뎌진 이들의 특징이다.
죄는 나쁜일을 한 것을 죄라 하지 않는다. 하난미을 떠난 상태를 죄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지금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모두 고통 중에 있다. 다윗은 큰 아들은 죽고, 한 아들은 망명중이다. 암논은 회개에 무지했다. 압살롬은 우상의 땅에서 우상에 물들어 있다. 요나답은 어떤가 이 기록 이후로 더 이상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
롬 1:28-31절이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바울이 이렇게 죄에 무뎌진 인생을 묘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죄에 무뎌진 인생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각성 시키실 때…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자!
*주님, 죄에 무뎌지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습니다
*주님, 기회를 붙잡고, 늘 묻고 물으며, 뒷북치지 않는 삶이고 싶습니다.
*주님, 이기적이고 공감하는 마음이 없는 메마른 삶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부어 주십시오.
매일성경 묵상
죄에 무뎌진 사람의 특징 [삼하 13:24-39]
– 2022년 10월 09일
– 2022년 10월 09일 –
한 사람의 죄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는 본문이다. 동시에 죄에 무뎌진 인생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이와 같은 영향력을 예측이나 했을까? 만약 예측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죄의 씨앗이 얼마나 큰 불행의 열매를 맺었는지를 살핀다.다윗의 범죄로 인해 다윗의 집안에 재난이 임할 것을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삼하 13장부터 20장까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주신다. 그 출발이 암논의 근친상간이다.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을 암논이 짝사랑하고 암논의 사촌 요나답이 제안한 간교한 방법을 따라 다말과 강제로 동침한다. 하지만 다말을 욕보인 후에는 그녀를 더욱 싫어한다. 암논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정욕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암논은 이 일로 인해 자기 무덤을 파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위기 20장 13-17절에서 나타나듯 이스라엘 내의 근친상간은 수간과 남색하는 죄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이 일을 보고 받고 격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다윗의 가정에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고 이스라엘에 어려움을 불러 왔다.이 일로 인해 결국 아들끼리의 살인이 벌어진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의 사건이 벌어진지 2년 후 암논을 살해한다. 그의 살인동기는 겉으로는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이었지만, 내적 동기는 복수심이었다. 그는 암논을 죽이기 위해 2년 동안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철저하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분노가 올라올 수 있으나 그 분노가 복수심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곧바로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그술로 도피하여 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이 모든 일을 알게 된 다윗은 옷을 찢으며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편으로는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염려한다.1.기회를 놓친다(23절)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하나님은 매몰찬 분이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 암몬, 압살롬등을 바라보며 방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신다.먼저 23절을 살펴보자 “만 이년 후에…” 본문은 암논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한 후 이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암논에게는 사건이 잘 해결되었구나 라는 안도의 착각을, 압살롬과 다말에게는 치욕스러운 고통의 상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와 시퍼런 칼을 어찌할지 와신상담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을까? 만약에 그 사건이후 2년 동안 암논이 치열하게 다말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쉽게 열려질 마음과 용서를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책임지려 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만약 그런 과정을 통해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면 훌륭한 왕이 될 기회를 얻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암논은 2년 동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암논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신 것이다.*죄가 조용히 넘어 갔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죄는 크기만 점점 더 커질 뿐이다. 죄를 암덩이로 비유한 것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암 환자가 생활 태도와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암덩이가 더 커지듯이 죄에 대하여 해결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면 오히려 더 커질 뿐이다.2.도무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압살롬은 이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시퍼런 칼날을 꺼내든다. 23절은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바알하솔이란 동네는 벧엘에서 북동쪽으로 8-10km 떨어진 해발 1,000m의 고산 지대로서 목축업을 하기에 적절한 지역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20km정도 떨어져 있어서 다윗 왕이 조치를 취하기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이점도 있기도 했다. 또 양털을 깎는 시기인데, 이 날은 대단한 축제일로 지켰다. 모든 가족들과 주민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 날이다.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시기이다. 압살롬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죄로 치닫는 인생은 이처럼 그것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임에도 올바른 길이라고 착각하여 죄악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더욱 치밀하고 대담하게 죄를 기획한다.압살롬은 왜 양털깍는 날에 다윗을 초청했을까? 본문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암논을 초청하겠다고 하면 복수하겠구나 라고 눈치를 챌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의 마음을 먼저 안심 시킨 후 아들들을 초청한다. 아버지를 이용하여 아들을 끌어들이는 계략은 놀랍게도 암논이 아버지를 이용하여 다말을 끌어들이는 모습과 똑같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무말 없이 암논을 비롯해 아들들을 함께 보낸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 적잖게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보통의 판단력이라면 그 치욕스러운 가정 내의 근친상간의 사건의 후폭풍이 얼마나 심각할지 간파하고 있어야 했고 압살롬의 이런 행동에 저의가 담겨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음에도 다윗에게 이런 판단력과 총기가 사라진 것이다.이런 다윗의 모습은 밧세바와의 간은 사건 이후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암논이 다말을 보내달라는 비상식적인 요청을 그대로 허락하는 장면이나, 암논이 근친상간을 했을 때 분노만 할 뿐 말씀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 모습, 압살롬이 암논과 아들을 양털깍는 날의 축제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쉽사리 허락하는 모습 등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모습이다. 왜 이렇게 판단력과 분별력이 떨어진 것일까? 그가 죄의 대하여 무뎌지고 무뎌져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총기가 사라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다.*죄에 무뎌진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아는 광야의 다윗, 즉위 초기의 다윗의 모습과 비교하여 이런 다윗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분명하다. 삼하 2:1, 5:19를 보라. 어떤 일을 하든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떤가? 다윗을 비롯해 암논, 압살롬 모두 하나같이 묻지 않는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지혜롭게 묻는 사람이 묻지 않는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있다. 삶의 지혜들이 묻는 행동 속에 들어있다.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묻지 않고 홀로 생각하다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지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께 묻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묻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물음에 응답해 주신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답을 정해 놓고 묻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즉 묻는 태도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하나님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응답을 겸손하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한다.3.늘 뒷북만 친다(30-31)28-29절은 압살롬은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28절 “이미”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압살롬은 그 사건 이후 삶의 초점이 암논 제거에 두고 준비한 듯 보인다. 암논은 차기 왕위 서열 1순위다. 이에 관련하여 “압살롬은 이미 자기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암논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질 때를 잘 지켜 보아라. 그러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죽이라고 하면, 너희는 겁내지 말고 그를 죽여라.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니, 책임은 내가 진다. 다만, 너희는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해치워라!”(새번역_28절) 라고 독려한다.*책임은 내가 진다는 압살롬의 말에 맹신하고 암논을 찔러 죽인다. 한편 암논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2년 전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다면 조심했어야 횄다. 그런데 그는 술 취해 있다. 통상 죄를 지은 사람은 예민하기 그지 없다. 늘 주위를 둘러보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는 술 취해 있다. 이 모습은 그렇게 악한 일을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기 커녕 무디고 무디어진 모습이 충격적이다. 오히려 아무 거리낌 없이 평상시와 다름 없는 삶을 사는 모습이라는 것이다.30-31절을 함께 읽어보자. 죄에 무뎌진 인생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인가? “뒷북”이다. 죄로 인해 판단이 무뎌진 이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금만 생각하고 그보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방관했다가 일이 발생하면 옷을 찢고 통곡을 하고 재를 뿌린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된다. “뒷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그렇기에 내가 죄를 멀리해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뒷북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죄에 대하여 민감해 져야 한다.또 다윗은 이 일을 소문(소식)으로 듣는다(30-31절). 그런데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인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소문만 듣고도 통곡하고 슬퍼한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행동한다. 확인하지 않는다.4.공감이 결여된다. 자기만 생각한다.이 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요나답”이다. 32-33절 이다. 이 사건의 발단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아주 간교한 사람이다. 요나답은 정말 노답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암몬의 죽음 소식이 들려오면 뭔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일말의 슬픔도 없다. 오히려 왕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다 죽지 않았다.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차가운 말인가! 위로와 공감부터가 아닌가? 걱정하지 말라니… 다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를 믿으라니..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을 보라 사건만 생기면 더 부풀리고 군중심리를 이용해 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 사건을 통해 이익만 보려한다. 성경은 이런 요나답의 모습을 우리에게 투영한다. 내게 유리한 것이 생기면 기회다 싶어 아픔과 슬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좁은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결과적으로 압살롬은 2년 동안의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공인가? 34, 37-38절을 살펴보자. 자기딴에는 정의구현으로 복수에 성공하나 그것의 댓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과도 멀어진다. 그술 땅은 가나안 전쟁 때 바산왕 옥이 다스리던 땅이다. 우상이 가득했던 땅이고 헤렘 명령을 받았던 땅이다. 그 땅에서 3년을 거한다. 하나님을 섬겼을까?또 다윗은 어땠을까? 39절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70인역 번역은 시간이 흘러 압살롬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4장은 이로 인해 다윗이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했다.다윗, 압살롬, 암논이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에 무뎌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밧세바 사건 이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죄에 무뎌진 이들의 특징이다.죄는 나쁜일을 한 것을 죄라 하지 않는다. 하난미을 떠난 상태를 죄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지금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모두 고통 중에 있다. 다윗은 큰 아들은 죽고, 한 아들은 망명중이다. 암논은 회개에 무지했다. 압살롬은 우상의 땅에서 우상에 물들어 있다. 요나답은 어떤가 이 기록 이후로 더 이상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롬 1:28-31절이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바울이 이렇게 죄에 무뎌진 인생을 묘사한다.*우리는 이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죄에 무뎌진 인생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각성 시키실 때…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자!
+ 기도제목
* 주님, 죄에 무뎌지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습니다
* 주님, 기회를 붙잡고, 늘 묻고 물으며, 뒷북치지 않는 삶이고 싶습니다.
* 주님, 이기적이고 공감하는 마음이 없는 메마른 삶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부어 주십시오.
* 주님, 기회를 붙잡고, 늘 묻고 물으며, 뒷북치지 않는 삶이고 싶습니다.
* 주님, 이기적이고 공감하는 마음이 없는 메마른 삶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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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6일
광야에 꽃이 피고 거룩한 길이 열리리라
[이사야 35:1-10]
이사야 35장 1~10절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삶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회복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다. 이사야 34장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준다면, 35장은 그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준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에 꽃이 피며, 약한 손이 강해지고 떨리는 무릎이 굳세어지며,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게 된다. 또한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길이 없는 광야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마침내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으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메마른 땅에도 꽃이 피고 길이 열리며 마침내 구원과 기쁨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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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5일
하나님의 심판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사야 34:1-17]
오늘의 본문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과 특히 에돔의 철저한 멸망을 선포한 묵시적 심판의 말씀입니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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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4일
시온성을 보는 눈
[이사야 33:1-24]
28-35장의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6부분의 마지막 부분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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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3일
곤비한 땅 큰 바위 그늘
[이사야 32:1-20]
본문의 배경은 히스기야 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드는 영’(27:10)을 보내셔서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곧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의미하며, 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섬기는 것을 공식화하였고 정의와 공의는 이미 무너져 있는 상황이었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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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2일
물러섬 없는 은혜
[이사야 31:1-9]
31장은 아직도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며 앗수르의 패망을 예언함으로 애굽을 더이상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한다. 앗수르의 계속되는 위협 앞에서 유다 지도자들이 애굽과 군사동맹을 맺어 의지하려 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행위임을 경고하신다.
31장 전체 내용의 흐름은 이렇다.
1-3절 :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책망하심
4-5절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심
6-7절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8-9절 : 앗수르 패망 예언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을 의지하려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선지서에 많이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형식의 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자들과 그를 돕는 자들을 치실 것이다(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애굽도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말들도 육체일 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3절). 결국 그들은 엎드러져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눈 앞에 다가온 위기의 순간, 그럴 때일수록 사람의 힘과 방법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람의 도움인가 하나님인가.
– 눈에 보이는 능력이 커보여도 그것이 꼭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눈 앞에 애굽이 보일 수 있다. 많은 말과 병거가 보이고 손만 내밀면 나를 도와줄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도 다 헛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신 후 그 책망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위협이 크고, 눈에 보이는 도움도 커보이지만 무엇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나를 그렇게 보호하실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6-7절은 이제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촉구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우상도 섬겼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역이고 음행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사야서에서, 선지서들 안에서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듯 내가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돈과 명예도 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그 삶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을 하는 이유가 8-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엉뚱한 것을 의지하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대해 보이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었다.
9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앗수르는 물러갈 것이나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다. 앗수르의 반석은 겨우 ‘두려움’ 때문에 물러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보호하심이다. 결국 승리는 인간적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앗수르는 강하고 위대해 보였지만 영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앗수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러저리 치이는 약소국의 신으로 존재하셨지만 세상 그 어떤 신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결코 물러섬이 없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내 건강, 내 재산이나 명예, 혹은 친구나 아는 사람, 내가 의지할만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 물러섬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으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번도 언약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고 약속을 뒤집지도 않으셨다.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며 내 마음을 점검하라고 하신다. 진짜 알고 있는가. 진짜 믿고 있는가.
마음을 돌아보며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는지 돌아보라 하신다. 세상은 변하고 내 마음도, 내가 의지하는 다른 것들도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물러섬이 없고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신다.
31장 전체 내용의 흐름은 이렇다.
1-3절 :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책망하심
4-5절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심
6-7절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8-9절 : 앗수르 패망 예언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을 의지하려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선지서에 많이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형식의 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자들과 그를 돕는 자들을 치실 것이다(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애굽도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말들도 육체일 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3절). 결국 그들은 엎드러져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눈 앞에 다가온 위기의 순간, 그럴 때일수록 사람의 힘과 방법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람의 도움인가 하나님인가.
– 눈에 보이는 능력이 커보여도 그것이 꼭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눈 앞에 애굽이 보일 수 있다. 많은 말과 병거가 보이고 손만 내밀면 나를 도와줄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도 다 헛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신 후 그 책망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위협이 크고, 눈에 보이는 도움도 커보이지만 무엇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나를 그렇게 보호하실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6-7절은 이제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촉구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우상도 섬겼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역이고 음행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사야서에서, 선지서들 안에서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듯 내가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돈과 명예도 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그 삶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을 하는 이유가 8-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엉뚱한 것을 의지하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대해 보이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었다.
9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앗수르는 물러갈 것이나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다. 앗수르의 반석은 겨우 ‘두려움’ 때문에 물러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보호하심이다. 결국 승리는 인간적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앗수르는 강하고 위대해 보였지만 영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앗수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러저리 치이는 약소국의 신으로 존재하셨지만 세상 그 어떤 신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결코 물러섬이 없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내 건강, 내 재산이나 명예, 혹은 친구나 아는 사람, 내가 의지할만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 물러섬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으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번도 언약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고 약속을 뒤집지도 않으셨다.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며 내 마음을 점검하라고 하신다. 진짜 알고 있는가. 진짜 믿고 있는가.
마음을 돌아보며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는지 돌아보라 하신다. 세상은 변하고 내 마음도, 내가 의지하는 다른 것들도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물러섬이 없고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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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1일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사야 30:18-33]
이사야 30장 18~33절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힘을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회복과 구원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려 했다. 눈앞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다. 18절은 이 본문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시며, 마침내 친히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8~20절)
18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빨리 도와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기다리십니까?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 금은보화가 많아지는 것일까? 건강을 얻는 것일까? 권력을 얻는 것일까?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수 있다. 건강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공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며 가장 큰 복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을 의지했다. 자기들의 방법을 붙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오늘 우리도 돌아보아야 한다. 돈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경험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대상이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2.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신다. (21~26절)
21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장면을 말씀한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애굽이 도움이 될까? 다른 나라가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바른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사사기 21장 25절에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하고, 서로 싸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결국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버린다. “나가라 하리라.” 그동안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우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23~25절에서는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며, 가축들이 풍성한 목장에서 먹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메마른 삶에 다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린다. 죽어가는 땅에서 싹이 난다.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메마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메마른 영혼에 다시 생명의 비가 내린다. 주님안에서 기도가 살아난다. 말씀이 살아난다. 예배가 살아난다. 가정이 회복된다. 관계가 회복된다. 2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다.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가족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다. 일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실패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죄 때문에 생긴 상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상처를 싸매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상처 입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싸매시고 고치신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리로 가라.” 중요한 것은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길은 당장에는 달콤해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길은 결국 우리를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3.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27~33절)
27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향하여 심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30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대적을 막아주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33절에는 도벳이 등장한다. 도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늦게 오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나는?
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과 사람을 먼저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것을 내려놓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나는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알고 계시며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임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조급함 대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과 물질과 경험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신다. 사람은 우리의 상처를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우리의 눈에는 지연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8~20절)
18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빨리 도와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기다리십니까?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 금은보화가 많아지는 것일까? 건강을 얻는 것일까? 권력을 얻는 것일까?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수 있다. 건강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공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며 가장 큰 복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을 의지했다. 자기들의 방법을 붙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오늘 우리도 돌아보아야 한다. 돈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경험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대상이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2.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신다. (21~26절)
21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장면을 말씀한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애굽이 도움이 될까? 다른 나라가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바른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사사기 21장 25절에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하고, 서로 싸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결국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버린다. “나가라 하리라.” 그동안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우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23~25절에서는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며, 가축들이 풍성한 목장에서 먹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메마른 삶에 다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린다. 죽어가는 땅에서 싹이 난다.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메마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메마른 영혼에 다시 생명의 비가 내린다. 주님안에서 기도가 살아난다. 말씀이 살아난다. 예배가 살아난다. 가정이 회복된다. 관계가 회복된다. 2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다.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가족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다. 일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실패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죄 때문에 생긴 상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상처를 싸매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상처 입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싸매시고 고치신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리로 가라.” 중요한 것은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길은 당장에는 달콤해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길은 결국 우리를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3.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27~33절)
27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향하여 심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30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대적을 막아주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33절에는 도벳이 등장한다. 도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늦게 오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나는?
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과 사람을 먼저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것을 내려놓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나는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알고 계시며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임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조급함 대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과 물질과 경험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신다. 사람은 우리의 상처를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우리의 눈에는 지연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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