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51-6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베드로의 신앙 고백(9:20) 이후 예수님은 수난 예고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야 할 목적을 말씀하셨고(9:21~50), 이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승천 장소인 예루살렘에 가기로 굳게 결심하고(51절), 가는 도중에 요한과 야고보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잘못된 제자도를 교정해주신다(52~56절). 이어서 세 명의 제자 후보에게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신다(57~62절).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려고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이 거부한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 길을걸어가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던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1세기 당시 문화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1.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의 굳은 결심(51~52절)
9:21-50에서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이르면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예고하셨다. 이어지는 변화산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엑소더스)”하실 것을 말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초지일관 죽음과 연관된다. 그렇기에 여행의 시작은 매우 결연하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얼굴을 고정하셨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은 고난과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음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성될 곳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로 결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결심하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신다. 그전에 자신보다 먼저 제자들을 파송하신다.
2. 사마리아의 거부와 제자들의 반응(53~54절)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임을 알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한다. 누가는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사이의 뿌리 깊은 반목을 부각시킨다.
사마리아인들의 거부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매우 격앙됐다. 그들은 자신들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려 심판하자고 예수님께 제안한다. 이러한 반응은 아마도 그들의 성향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기록했다(막 3:17). 한편 불을 내려 심판하자는 발언은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대결을 벌였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사마리아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은 이처럼 철저히 이방인으로, 오히려 이방인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주저없이 저주의 말을 쏟아낸 것이다.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의 말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공감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시고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들은 복음이 거부당할 때라도 폭력이 아닌 사랑과 은혜로 반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적대자들까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묵묵히(55~56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부에 대해 격하게 반응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누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본격적으로 나서시며 결연한 의지를 다지셨음을 언급했다. 이런 결연한 출발에 오랫동안 지속된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반목을 여지없이 직면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목과 반대가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자신과 제자들을 거부한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은 지나치고 다른 마을들로 지나시지만, 결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신들에게 힘(권위)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께서 올라가는 시점이니 제자들은 당연히 사람들의 환대와 환영을 기대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불렀으나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받는 종”이라고 하셨다. 고난받는 종으로 죽으실 것이므로 주의 길은 왕들처럼 권위를 행사하거나 영광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힘으로 반대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길도 아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제자들은 그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의 운명처럼 배척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이미 고난을 받았다. 제자들은 힘과 권세를 자랑하는 강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낮아져 섬기는 종들이어야 했다. 이런 형편에서도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받는 종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4. 예수님의 길과 제자의 길(57~62절)
누가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그 길로 가고 계심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는 일련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누가는 본문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람을 단순히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만, 마태는 이 사람이 “서기관”이라고 밝혀준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자신은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택한 삶은 세상에서 어떤 보장도 없는 자의 삶이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기꺼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처럼 많은 가정들이 예수님께 기꺼이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였지만, 정작 예수님은 어떠한 집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새번역_58절).” 여우나 새는 고정된 장소에서 쉬지만 예수님은 순회하는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고정된 보금자리가 없다는 의미다. “인자”는 다니엘 7:13~14에 근거한 칭호이고 하늘의 존재로 표현된다. 하늘에서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자’와 땅에서 섬기고 고난받는 길을 가는 인자의 삶은 매우 대조적이다. 인자는 하늘에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 태어나(1:31, 35) 나그네처럼 가난하고 자기 집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 안식처와 보호처가 없었다. 십자가를 향하는 길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여정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제자 역시 인자의 운명처럼 소유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사명에 우선권을 두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59절). 그러나 그는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한다(60절).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뼈를 모으는 것은 자식의 의무였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으므로 이 사람의 요구는 매우 합당하다. 매장은 유대 세계에서 최고의 덕목 중 하나였다(창 50:5~6).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람은 임종을 지켜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매장을 끝내고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한 다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장례는 첫 번째 장례가 아니라 첫 번째 매장 이후 남은 뼈를 모아서 가족 묘(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두 번째 매장이다. 보통 유족은 열두 달에 걸쳐 애곡하고 나서 뼈를 모은다. 즉, 이 사람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고 나서 따르겠다는 뜻이 아니다. 두 번째 매장의 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만 따르는 것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풍습은 이미 1세기 이전에 많은 문화권에서 행해졌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례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령하신다(60절). 이것은 비유다. 죽은 자들은 무덤에 죽은 자들 내지 조상들의 뼈를 의미한다. 가족묘에 있는 다른 뼈들로 아버지의 뼈를 다시 매장하도록 두라는 뜻이다. 당시 어떤 경험한 행위보다 중요했던 매장보다 더 긴급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는 일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긴급한 것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다(61절). 이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경고하신다(62절). 이 사람의 요청도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자녀로서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그를 따르기 전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왕상 19:19~21). 엘리사는 집에서 신변을 정리하는 쟁기질을 하고 돌아와서 엘리야를 따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쟁기질을 하고 돌아와서 더 편리한 시간에 예수를 따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엘리야가 요구하는 제자의 조건보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제자의 조건이 훨씬 더 엄격하다.
세 사람의 제자 후보는 당시 문화에서 타당성 있고 윤리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모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통해 제자의 길이 얼마나 험한 것인지 보여주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신다. 이것이 바로 9:23에서 말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원리의 실제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 사셨다. 십자가를 거쳐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오르는 여정을 향해, 많은 환호와 환대가 있는 갈릴리를 뒤로하고 배척과 소외와 거절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길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을 낳는 길이기에 순종했다. 그 결과 이 땅에서는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었다. 태어나신 순간부터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거절과 오해와 배척을 받으셨다. 그래서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요 소망이 되실 수 있었다. 주를 따르려면 그 삶도 수용해야 한다.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찾느라 영광의 본향을 잊고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로 결심하신 것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하나님 나라 사역의 장소와 대상을 옮기는 지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결단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승천하시기 전에 수난과 죽음이 있을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셨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시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소외와 외면, 우상숭배의 땅 사마리아에 생명과 희망을 주려고 방문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지만, 걷는 걸음마다 구현이 되어야 한다.
-사마리아는 예수께서 보낸 사자들을 거절하였다. 예수님 일행이 전하는 구원의 길인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 단지 민족적인 갈등 상대로만 간주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의 냉대를 거의 학대와 박대로 갚아주자고 제안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호의를 단박에 거절하고 모욕을 준 그들에게 당장 불을 내려 멸하고 싶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고, 심판은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더욱이 자신들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은총으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야고보와 요한의 시각과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대하시면 그들 자신부터 예수님으로부터 배제되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한 예루살렘을 위해서도 분노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울어주셨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종교적인 위선을 향해서는 분노하신다. 제자는 세상이 임의로 정해 놓은 경계를 넘고 담장을 헐어 누구에게든 담장을 헐어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해야 하고 누구든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예수님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남아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장사 지내는 일이나 가족과 작별하는 일마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며 그래야만 제자다.
-가장 소중한 것보다 주님을, 가장 급한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앞세워야 주님의 제자다.
*주님, 주님의 마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섬기겠습니다. 환대와 환호를 받지 않아도, 격렬한 소외와 배척을 보인다 해도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주님, 그 길을 걸을 때 나의 어떤 급하고 소중한 일보다 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살아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