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칠십인 제자들 파송과 보고 [눅 10:1-24]
 – 2025년 03월 10일
– 2025년 03월 10일 –
눅 10:1-24 칠십인 제자들 파송과 보고
 
칠십인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동네와 지역으로 파송하신다. 이때 하나님 나라 일꾼들로 보냄받은 제자들은 어떤 준비와 태도로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제자들은 가서 평안을 전하며 치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다. 마치고 돌아와 기뻐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으로 제자들을 이끌며 축복하신다.
 
열두 제자 파송(9:1~6)에 이은 두 번째 파송이다. “칠십”은 온 열방을 상징하는데 장차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사도행전의 서사를 조망케 한다. 이 단락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과 이해를 보이며 장차 그 나라가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지 조망한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영광의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의 정체성은 옛 시대 선지자들과 임금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것이다.
 
 
 
1. 70명을 파송하며 제자들의 마음가짐을 당부하시는 예수님(1~11절)
70명의 제자그룹은 열두 제자와 다른 그룹이다. 70인의 제자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 앞서 각 동네와 지역으로 파송받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추수하는 주인, 곧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요청하다(데오마이)”는 기도를 의미한다. 농사일을 할 때 추수 시기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단느 것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결실이 맺히고 있음을 의미한다.
 
3~4절은 위험한 길로 보냄받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을 어린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던지는 것과 같다고 보신다(3절). 제자들을 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리 떼에게 어린 양은 먹잇감이다. 환대하지 않는 자들은 제자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완전 무장으로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4절). 여행에 필수적인 것들을 소지하지 말라는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5~7절은 제자들이 전도하러 간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설명한다. 70인은 거리나 시장이 아니라 가정으로 파송받는다. 가정에 가서 평화를 전하고(5~6절),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을 함께 나눈다(7절). 제자들의 선교가 “관계 선교”임을 뜻한다. 이는 유대인의 관계 지향적 특징에서 상호 간의 유대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어로 구원과 같은 개념이다. “평화의 아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화를 얻는다. 평화의 아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평화, 곧 구원의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평화를 거부하면 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제자들에게 돌아온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평화를 얻거나 거부하는 결과에 이른다.
 
8~11절은 제자들이 전도하러 들어간 동네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이다. 제자들은 방문한 집에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들이 받는 환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받는 삯이다. 그러나 환대가 부족하다고 다른 집으로 향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은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종들이므로 유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환대하고 음식을 제공해 주는대로 먹어야 한다(8절). 제자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이 그곳에 있는 목적이다. 제자들은 환대의 정도에 따라 사역을 계산하지 말고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9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으나 예수님의 활동으로 그 나라는 시작되었고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제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동네를 떠나면서 행동과 말로 경고해야 한다(10~11절).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사실을 알도록 선포해야 한다.
 
 
 
2. 제자들을 영접하는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운명(12~16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영접하지 않은 동네의 운명을 예고하신다. 심판의 날에 그런 동네는 소돔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12절).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회복을 가져다주지만, 지금 회복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미래에 닥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척한 도시로 고라신과 벳세다를 지목하신다(13절). 개별 가정은 제자들을 환대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갈릴리의 도시들은 제자들을 배척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두 도시에서 행한 권능을 이방인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하여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을 것이다(13절). 심판이 임할 때 두로와 시돈이 받을 벌이 고라신과 벳새다가 받을 벌보다 적을 것이다(14절).
 
이제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경고하신다(15절). 교만한 나라나 혹은 도시는 하늘에 오를 정도로 오만하지만, 실제 운명은 땅 아래로 몰락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도시들의 운명은 제자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제자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를 보낸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16절).
 
 
 
3. 70인 제자들의 전도 보고(17~20절)
70명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기쁨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예수님께 보고한다(17절).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전도 여정이 힘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신 능력을 경험하고 기뻐한다. 이에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화답하신다(18절). 제자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교가 사탄과의 싸움이었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원수는 로마였다. 하지만 제자들의 원수는 로마가 아니라 그런 악의 체계를 이용하는 사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싸움 대상이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를 의도하셨다. 17절뿐 아니라 20절에서도 제자들이 싸운 대상이 “귀신들”로 언급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을 좇아낸 행위를 사탄과 싸운 것으로 이해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의 패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제자들의 활동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임을 밝힌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사탄은 결정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때의 운명이 지금 제자들의 권능에 의해 실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가 사탄이 떨어지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 근거를 설명하신다(19절).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19절). 뱀과 전갈은 구약에서 악의 세력을 상징하고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뱀의 패배로 표현이 된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탄의 힘을 무너뜨리며, 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은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을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능력이 사탄과 싸울 정도인 것을 근거로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약속하신다. 한편 예수님은 귀신들을 항복시키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할 것을 당부하신다(20절). 이것은 제자들의 참된 기쁨이 그들이 행한 사역의 업적과 결과가 아니라 신분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있어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로 선택해 주신 것에 참된 기쁨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제자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개입과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 참 기쁨이다. 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으로 치유할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기쁨이다. 제자로 부름받은 생활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찾으며 기뻐해야 할 것이다.
 
 
 
4. 예수님의 감사기도 _ 제자들의 복(21~24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드린다(21~22절). 성령으로 기뻐하시면서 충만해진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이것들(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지식(22절), 구속 역사의 성취(24절)”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감사한다.
 
제자들에게 계시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서 예수님의 사역, 즉 그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드러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에서 어리석게 보이지만 계시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작은 자들이 계시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이 제자들의 깨달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는 먼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신 것을 언급하신다(22절). “모든 것(판타)”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가리킨다. 이어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을 말씀하신다. 아버지만 아들을 알고 계시기에 아들과 그의 뜻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수 있다.
 
하나님과 대화하신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향해 기쁨의 이유를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신다(23~24절). 제자들이 본 곳을 보는 눈은 복되다. 왜냐하면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을 보고 듣기 원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4절). 선지자들과 왕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하기 원했다. 하지만 구약에 소망했던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과 활동으로 열리고 전개된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 제자들은 통치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현을 보고 듣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아는 것 자체가 복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아는 것이 복이다. 제자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역시 아버지와 아들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그럴수록 누리는 복은 더욱 커진다.
 
 
 
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 왕이 이미 오셨다. 이제 그 나라로 새 언약 백성들을 불러야 한다. 그들이 구원받을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추수할 일꾼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70제자들을 먼저 보내셔서 그 나라의 도래를 전하게 하신다. 아직 충분히 메시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전하도록 보내신다. 예수님의 존재와 임재 자체가 그들의 부족한 메시지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70명의 전도자들이 기다리는 것은 험난한 세상이다. 이리 같은 세상에 비해 전도자들은 어린 양에 불과했다. 어린 양으로 이리를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채워 주실 것이다. 할 말이 필요할 때 할 말을 주실 것이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빌어주고 그 샬롬을 받는 자들의 섬김을 기꺼이 수용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도자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복음을 입증하는 통로다!
 
-전도자들은 거절을 당할 것이다. 외면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자책하지 말라. 다만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마을에서 나오라.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말로, 기적으로, 축귀와 치유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심판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이리같은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회개를 촉구하라. 오만하여 복음을 거절한 그들의 죄는 심판으로 끝난 두로와 시돈보다 더 악독하고 그래서 더 혹독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의 말이 예수님의 말이 될 것이다. 영광스럽고도 무거운 말이다. 아니 무서운 말이다. 이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나 받는 자들 모두를 긴장하게 한다. 허투루 전해서도 안 되고, 청중들보다 더 하나님을 의식하며 전해야 한다. 사람의 말로 받아서도 안 되고 정보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순종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하나님의 조치로 여겨야 할 것이다.
 
-70명의 제자들은 주께서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잘 선포했고 또 보여주었다. 흥분한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이 자기들에게 항복한 감격적인 순간을 보고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나칠 만큼 차분하게 자신이 본 것은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즉, 제자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로 보신 것이다. 그들의 보고 속에 담긴 제자들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착각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 원수를 제어할 모든 능력은 남김없이 다 주께서 주신 것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러므로 진정하게 기뻐해야 할 것은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 능력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신다. 그 대신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욕망으로 굴절시켜 그 말씀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한 사람들에게는 숨기신다. 엄밀히 표현하면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눈을 가리는 자들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을 아는 자들이 어린아이다. 자기 능력에 도취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탄을 이기시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어린아이일 것이다.
 
-참된 복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신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탄이 나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기뻐하기 보다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여 사탄의 시험과 박해를 이기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참된 복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고, 나의 나라가 아니라 그분의 나라가 서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며, 그 나라가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해서 왔음을 아는 시선을 갖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주님, 칠십인의 제자들을 파송하고 그들의 사역을 보고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담대히 세워나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음성 따라 살아가는 걸음이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께 받은 귄능과 귄위가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에 주님의 이름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걸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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