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27-36 말씀을 듣고 행하여 진정한 복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 제자
본 단락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판하고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의 운명(29~32절)을 경고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수용하는 자들의 상태를 복(27~28절)과 빛(33~36절)의 용어로 설명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복되고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인생이 된다.
1.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복되다(27~28절).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 때 무리 중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27절)”라고 외친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이 사탄의 도성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인은 좋은 아들을 낳은 어머니의 복을 언급한다. 이는 자녀의 업적이나 능력 덕분에 부모가 존경을 받는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 여인의 말은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은 후 드린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1:48).”라는 찬양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엘리사벳도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1:42).”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여인의 평가를 교정해 주신다(28절). 하나님 나라는 겉으로 보이는 형편으로 복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 복은 마리아가 유일하므로 그녀의 복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주의 모친이 된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마리아가 순종했기 때문에(1:38) 복된 인생이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부모에 대한 평가가 자녀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나라가 아니다. 혈육의 성공으로 가족이 존중받고 높여지는 나라도 아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을 복되다고 평가한다(8:15). 앞 단락에서 다룬 것처럼 예수님의 편에 서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복되다(11:24~26).
하나님 나라에서는 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이렇게 달라진 복에 대한 평가 기준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된 개인과 공동체가 기준으로 삼는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겉보기에 내세울 것 없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되다.
2.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29~32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세대는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님은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신다(29절). 악한 세대의 특징은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을 때 표적을 요구하게 된다. 즉, 완고함과 불신이 표적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악한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던 조상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신뢰로 받아들이기보다 표적을 보여 자신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마 12:39~40) 외에는 그들에게 주어질 표적이 없다. 심판을 설교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30절; 욘 3:4). 심판을 경고한 인자(예수님)도 “이 세대”에 표적이다(5:32; 10:13; 15:7; 19:10). 심판의 때에 니느웨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한 이스라엘의 악한 세대는 그 완고함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 표적이 될 것이다.
심판의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스바 여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끝에서 왔다. 예수님은 지금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와서 청중이 보는 데서 활동하고 말씀을 전하는데도 악한 세대는 그의 사역이 바알세불의 사역이라고 폄훼한 것이다. 심판의 때가 오면 여왕의 행위가 예수님의 정체를 배척한 악한 세대의 무지와 죄를 드러낼 것이다. 또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문제를 정죄할 것이다(32절).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단기간 전도에 회개하였으나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이 와서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이 세대는 회개하지 않았다.
3. 성한 눈과 악한 눈(33~36절)
악한 세대의 문제를 지적하신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악한 눈과 건강한 눈의 주제로 확장하신다. 등불을 저장고나 말 아래에 두려고 켜는 사람은 없다(33절). 등불을 등경 위에 놓고 방 전체를 밝힌다. 그런데 등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빛이 생길 수 없다. 이처럼 사람 몸의 등불은 눈이다. 등불처럼 눈이 제 기능을 해야 한다. 즉,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눈의 상태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성한(하플루스)”은 “단순한, 초점을 맞추는” 등과 같이 눈의 건강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시야가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맞추어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건강한 눈이다. 반면에 눈이 나쁘면(포네로스) 빛이 눈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몸이 어두워진다. 예수님은 신체의 건강을 가리키는 “성한”의 반대어로, 윤리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포네로스를 사용하신다.
빛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주어진다.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가 빛이고, 예수님이 보여주고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빛이다. 건강한 눈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좋은 태도로 그의 기적과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마음의 눈은 나쁜 상태다. 이런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등불이 건물 안과 사물을 비추는 것처럼 눈은 외부 세계를 볼 수 있고 안전하게 걷도록 돕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등불과 눈의 기능을 신앙의 교훈을 위해 그 사람의 몸 안을 비추는 것으로 변경하신다. 이런 점에서 등불(눈)을 통해 빛이 들어오게 된다는 논리가 생긴다. 눈의 상태에 따라 빛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결정된다. 눈이 성하면 빛이 등불인 눈을 통해 몸을 밝힌다(34절). 눈으로 빛이 들어오면 몸이 밝아지고 들어오지 못하면 몸이 어두워진다. 눈이 마음의 상태를 대변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로 빛과 같은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사탄의 어두운 속박 가운데 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운지” 점검해야 한다(35절). 이것은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8:18)”는 교훈과 같은 의미다. 온몸이 밝아서 어두운 곳이 없다면 등불의 빛이 몸을 비춘 것과 같이 몸이 밝은 상태다(36절). 즉,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인 것이다. 빛으로 밝아진 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28절)” 사람을 가리킨다. 밝게 빛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밝은 길로 인도하는 빛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예수님은 마음의 빛이 어두운지 점검하도록 도전하신다. 제자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빛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야만 몸이 빛으로 채워진다. 만일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몸은 어둡게 된다. 욕망과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채워진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예수님의 시선에 눈을 감아버리게 만든다. 어둡게 된 인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염려 가운데 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29절의 “악한 세대”다.
37~54절은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예법에 충실했으나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언급하신다(39절). 종교적인 전통에 충실하다고 해서 빛이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신 것이다. 욕망과 염려뿐만 아니라 영적인 무관심이나 긴장하지 않는 태도 역시 눈을 감아버리게 만드는 중대한 요소이다. 신앙에는 중립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눈을 열지 않는 사람이 빛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열린 눈으로 들어온 빛은 제자의 인생을 채우고 다시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빛의 인생이 되게 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복을 경험하게 된다(27~28절).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은 한 여인이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진정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하신다. 이 상황은 지금 예수님 자신의 위대함에 주목할 때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전에 응답할 때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통치에 복종하는 데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더 온전한 데 나아가지 않으면 믿기 전보다 더 형편이 나빠질 것이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복되다는 찬양을 들으시고 단순히 자신을 찬양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진정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핵심이 그분을 찬양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제자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할 진리다.
-예수님을 인정한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증명할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있다. 당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알아볼 만큼은 이미 충분히 말씀하셨고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요나의 표적을 보고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심했고,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 남방 여인이 찾아오지 않았던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을 마음이 없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믿음을 위해 많은 배움이 필요하지만, 많은 배움이 곧장 믿음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이 세대는 더 큰 표적을 구하기보다는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종종 특별한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표적이자 증거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와 표적을 신뢰하여 주님의 말씀에 더욱 가까이,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등불을 켜 놓고 숨겨 놓는 법은 없다. 등불은 누구든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등경 위에 둔다. 예수님도 누구든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한 등불이다.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이들처럼, 이 등불을 알아차리고 영접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그 사람의 몸도 어두울 것이다. 말씀의 참뜻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바로 해석함으로써 내 존재 전체가 환한 주의 빛이 되는 자, 그들이 바로 제자다.
-하나님 나라 제자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다양한 정보와 가치가 혼재된 세상 속에서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의 빛을 더 깊이 경험하기 위해 묵상과 기도, 공동체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말씀으로 내면을 채우고 그것이 삶과 행동으로 드러날 때 세상 속에서 진정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진정한 복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이 드러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이미 확실한 구원의 증거이신 주님을 신뢰하며 세상 속에서 빛 된 존재로 서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