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24-38 아시고도 맡겨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제자들은 권력자들과 부자들처럼 되기를 원하고 누가 큰지 논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처럼 섬기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신다(24~27절). 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는 특권을 부여하신다(28~30절). 특히 시몬(베드로)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부정하고 나서 회복된 이후에 겸손하게 교회를 섬길 것을 당부하신다(31~34절).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을 예고하신다(35~38절).
1. 누가 크냐? (24~27절)
유월절 식사 중에 제자들은 누가 큰지 논쟁한다(24절). 기막힌 것은 자신들 가운데서 배반자가 있고 예수님을 팔고 비참한 운명에 처할 것을 듣고서도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신다(25~27절).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은 은인들로 불린다(25절). “은인”은 당시 부자들이 도시의 재정을 일정 부분 충당함으로써 불린 것을 가리킨다. 부자들의 혜택을 얻은 도시와 마을의 시민은 부를 베푼 사람을 “은인(유에르게테스)”이라고 불렀다. 제자들도 이러한 은인의 권세와 명예를 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것을 열망하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제자들 가운데 큰 자는 젊은이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자처럼 되어야 한다(26절). ‘젊은 자’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고, ‘섬기는 자’는 식사를 섬기는 신분의 사람을 가리킨다.
제자들은 초대교회를 인도하고 어떤 역할들을 맡게 될 것이다. 그때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명예와 특권과 권세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세상 관점에서는 식사를 섬기는 자보다 식사 자리에 앉아서 섬김을 받는 자가 더 크지만(27절) 제자들은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모본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집권자들과 은인들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왕과 주가 되시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섬기셨고, 미래에도 섬기실 것이다.
2. 하나님 나라를 맡게 될 제자들(28~30절)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의 자세를 가르치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라를 맡기신다(28~30절). 비록 지금은 누가 크니 싸우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시험 가운데 함께 했다(28절).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반대자들을 동원하여 공격한 것을 가리킨다(8:12~15). 그런 과정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께 나라를 맡기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신실하게 인내한 제자들에게 나라를 맡기신다.
제자 공동체에 맡기신 나라는 “내 나라” 즉, 예수님의 나라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에 마련된 식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다(30절). 언제 이렇게 될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다. 예수님은 승천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제자들은 섬기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3. 시몬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31~32절)
예수님을 공격한 사탄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너희(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날려버리려고 예수님에게 요구했다. “까부르듯”으로 번역된 시니아조는 “체질하다, 거르다”라는 뜻인데 체로 밀을 거르면 이삭이나 이물질은 걸러지고 알곡만 통과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탄이 이렇게 체질하듯 제자들을 공격한다는 의미다. 현재 누가 큰지 다투는 수준으로는 제자 중 누구도 사탄의 체질을 견디고 통과할 수 없다. 이미 사탄은 가룟 유다를 체로 흔들었고 파괴할 것이다(3절; 행 1:25).
예수님께서 보호자로 계실 때는 시험을 이기고 예수님과 함께 통과할 수 있었으나 곧이어 예수님이 체포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면 뿔뿔이 흩어져 제자들은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36절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팔아 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실 것인데, 이는 제자들에게 무서운 위협이 닥친다는 뜻이다.
특히 사탄은 시몬 베드로를 정조준하고 있다. 시몬은 누구보다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확신했으므로 사탄의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사탄은 시몬의 믿음이 체를 통과할 수 없는 수준임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그런 시몬을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시몬은 “돌이킨” 후에는(실패에서 회복되고 나서)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알고도 인내하고 기도하신 예수님 때문에 일시적인 실패 가운데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시몬은 자신이 맡은 직분은 섬기는 종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권세와 명예를 지닌 “은인”으로 불리기를 원했으나(25절), 앞으로는 예수의 기도와 긍휼 덕분에 하나님의 일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신 예수님의 기도와 섬김을 생각하면서 핍박과 시험 가운데 있는 형제와 자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굳세게 붙잡아 주어야 한다.
4. 시몬이 부인할 것과 닥쳐올 위기를 경고하시는 예수님(33~38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예고하신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주와 함께 감옥에도 갈 수 있고, 주께서 죽는 장소에도 갈 수 있다고 단언한다(33절).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바로 오늘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정할 것을 예고하신다(34절).
그리고서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냄을 받았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는지 질문하신다(35절). 9:2~3과 10:3~4의 전도 여행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제 전대와 배낭을 가져야 한다(36절)고 말씀하신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고도 하신다. 이 표현은 다가올 위협을 경고하고 각오를 다지도록 하는 의도된 은유적 표현이다.
제자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경험을 하고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예수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취급받기 때문에 그를 따른 제자들도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불법자의 동류”로 취급받는 운명을 예고하신다(37절; 사 53:12). 이런 예수님의 경고에 제자들은 칼 두 자루로 방어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제안한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은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라고 칼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다. “족하다”는 실제 칼을 거론하지 말라는 의미다.
나는?
-고난과 배반이 예고되는데도 제자들은 서열 다툼에 여념이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보다는 그분이 세우실 ‘나라'(16절)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를 정치적 군주로, 그 나라를 눈에 보이는 나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말씀(나라)만 듣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취했을 뿐, 들어야 할 말씀(고난)은 듣지 않았다. 말씀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곳에는 주의 나라와 뜻은 없고 자기주장과 사리사욕만 있다.
-새 언약을 맺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군림하고 높아지려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자리다툼 하는 제자들 가운데서 섬기는 자로 계신 예수님처럼, 강한 자만 살아남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섬기는 자로 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 나라는 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삶, 섬기는 삶에 동참한 제자들에게 맡겨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며, 약한 자들의 숨죽이는 평화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군림하면서도 명성(25절, 은인)을 얻기를 원하고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도 영광을 취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섬김 없이 존귀가 없고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
-예수님은 사탄의 집요하고 거센 시험 속에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섬김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탄의 공격에 자신이 노출된 것도 몰랐다. 어디든, 함께 옥에도, 함께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다는 베드로의 비장함보다 변함없이 그를 붙드시는 주의 신실함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믿음을 되찾고 형제를 굳게 세우는 자로 회복될 수 있었다.
-닭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아셨지만, 그를 향한 기도와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사랑의 기다림이 그를 다시 온전한 자리로 회복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이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세웠다.
*제자들은 권력자들과 부자들처럼 되기를 원했다. 스스로 죽으실 준비를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은 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마련이니까….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신양명”만 바라보고 있다. 에휴… 이런 다툼이라니….
*세상은 높아지려고 안달한다. 그게 성공이라고 여긴다. 다스리고 군림하는 삶을 꿈꾼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시킬 수 있는 나라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다. 섬김과 베풂의 기쁨을 아는 자들의 나라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 겸손하게 누구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참 복임을 아는 자들의 나라다.
*섬기는 자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는 항상 예수님이 함께하시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기 위해 시험당하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나라다. 예수님 혼자 통치하시지 않고 자기 백성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여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 그가 가능한 것은 시험을 받는 중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했는데도 교회의 중요한 리더가 된 것도 예수님이 이 기도 덕분이다.
*전에는 여분의 전대와 배낭과 신발을 갖지 말고 전도하러 나가라고 하신다. 믿음으로 선교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낭과 전대도 갖추고 심지어 칼도 사라고 하신다. “불법자와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라는 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미 제자들에게는 칼이 두 개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폭력적인 전복을 꿈꾸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 맡기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분명히 하셨다. 그럼에도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그 넉넉한 품을 닮고 싶다. 그 너른 품을 품고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을 섬기기라.
*주님, 부인할 것을 아시고도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겠습니다.
*주님, 제자들의 실패를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는 주님의 품이 넉넉합니다. 그 품을 닮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