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22-32]
 – 2026년 04월 30일
– 2026년 04월 30일 –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라헬은 오래도록 임신하지 못한다. 아들을 무려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야곱과 언쟁한다.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에서 사랑하는 모습 이후 처음 등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싸움이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자신도 자식을 낳게 하라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시작된다. 라헬은 자신이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자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게 된다. 마침내 라헬도 요셉을 낳음으로 두 자매의 출산 경쟁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열두 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1. 라헬의 여종 빌하의 출산(1~8절)29장에서 아들을 넷이나 낳은 레아와 대조적으로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는 열지 않으셔서(29:31)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다. 라헬은 아들을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를 질투한다.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실상 행복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남편에게 아들을 낳게 하라고 요구한다.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이런 라헬에게 야곱은 아이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냐며 반박한다. 야곱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실을 알고 리브가를 위해 무려 20년을 기도했었다. 그런데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불임의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이때 라헬이 생각한 방법은 예전에 사라가 한 것처럼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 대신 아들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무릎에 둔다’라는 뜻은 그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여 자신이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헬은 양자를 얻어서라도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라헬은 이 결심을 곧바로 결행한다. 4절에서 라헬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었고 야곱은 그녀에게 들어갔다. 그 결과 빌하는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서 변호해 주셨다는 의미로 ‘단’이라고 짓고, 둘째 아들은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면서 ‘납달리’로 짓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라헬이 모든 면에서 언니를 이기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예전에 형의 장자권을 갖고 싶어 에서와 갈등하던 야곱의 모습과 닮았다. 그로 인해 가정에 갈등이 불거지고, 결국 집에서 도망 나오게 된 것처럼, 야곱의 가정에서 그런 불안이 재현되고 있다.

2. 레아의 여종 실바의 출산(9~13절)9절도 레아가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레아는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보았다. 둘 다 불임의 상태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알게 된 레아는 라헬이 했던 방법과 동일하게 자신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어, 실바를 통해서도 ‘복되다’, ‘행운이다’라는 의미의 아들 ‘갓’과 ‘행복’이라는 의미의 아들 ‘아셀’을 얻게 된다. 레아는 실바를 통해 얻은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신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라헬뿐 아니라 레아 또한 동생과 경쟁하는 모습은 레아 또한 완전한 평안의 상태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두 자매의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을 많아지게 하셨다.

3. 레아의 출산(14~21절)이 단락은 레아와 라헬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여종들을 통해 대리적으로 경쟁했다면 이제는 레아와 라헬이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발단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추수하러 들로 나갔다가 우연히 합환채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합환채는 당시에 성욕을 자극하며 임신을 돕는 역할을 하는 식물로 알려져 있었다. 르우벤은 출산이 멈춘 어머니를 위해 챙겨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헬은 레아를 찾아와 자신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레아는 겉으로 정중하게 보이지만, 단호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레아는 남편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합환채까지 가져가려는 라헬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라헬은 화를 내는 레아에게 야곱과 동침할 기회를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보는 남편보다 임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합환채가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레아는 라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합환채보다 남편과 함께하는 기회가 더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밤 야곱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한편, 레아는 합환채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합환채를 양보한 레아에게 아들 잇사갈과 스불론, 딸 디나를 주시고, 합환채를 가져간 라헬에게는 아무 자식도 주지 않으신다. 태를 여닫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모든 꾀를 무용지물로 만드셨다.

4. 라헬의 출산(22~24절)남편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했던 라헬이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즉,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소리를 들으셨고, 마침내 아들을 주셨다. ‘부르짖었다’라는 단어 뒤에 ‘하나님이 기억하셨다’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은 라헬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은 라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감사하며, 여호와께 아들을 더 달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요셉’으로 짓는다. 이제 라헬은 자식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야곱의 결혼생활은 라반의 속임수로 시작하여 레아에 대한 박대와 라헬의 질투와 갈등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로 야기된 불행을 불행으로 두지 않으시고 많은 자녀(12명)를 주시는 계기로 삼으신다. 인간은 악하게 행동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다. 나는?-레아와 라헬은 경쟁하듯 아이를 낳고 남편 쟁탈전을 벌인다. 레아는 아들이 있고 남편의 사랑은 없었으며,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었다. 둘은 빌하와 실바라는 여종들을 동원하고 합환채(최음제)까지 사용하여 자식 낳기 경쟁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야곱에게 약속하신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는 라헬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레아의 합환채를 넘겨받아 그 힘으로 자식을 낳아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 사이에 레아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얻는다. 자식을 낳는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야곱의 말을 라헬은 새겨듣지 않았다. -평생 자기 힘과 지혜로만 원하던 것을 얻어 내던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만이 자식을 주실 수 있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라헬마저도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태를 여셨다. 요셉을 주셔서 아이 못 낳은 수치를 라헬에게서 거두신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다. 이유는 라반의 사기행각과 관련 있다. 라반에 대한 분풀이 대상이 레아였다. 레아의 처지가 기구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잘 아셨다.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와 관련하여 야곱에게 그 원인을 둔다. 하나님께서는 결혼까지 한 이상 레아에 대한 책임을 라반에게 묻지 않으셨다. 야곱의 행동을 기억하셨다. *한편,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음에도(사랑받지 못함_29:31) 육체적인 관계는 맺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늘어날수록 레아가 붙인 아들들의 이름은 야곱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 훗날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부인은 레아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한 라헬은 이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들레헴 근처 길에 장사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아에 대한 야곱의 마음이 미움에서 사랑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본문은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주”를 보여준다. 한 남자 야곱의 사랑을 구하고 찾는 레아와 자신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는 라헬이 자신들의 몸종까지 아내로 주어 자녀 출산에 여념이 없다. 마치 부부간의 사랑 확인이 출산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긋난 출산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고 계신다. 야곱의 어긋난 라헬만을 향한 사랑과 이런 야곱에게 지아비의 사랑을 기다리는 레아의 마음과 출산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는 지파들의 출발은 성스럽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의 출발이 아니라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다투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순탄하고 평이하기보다 왜곡된 가정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환경과 조건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인도하심이 더욱 발휘되고 드러날 것이다. *출산 경주의 결승선은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에 임신과 출산이 달려 있음을 레아든 라헬이든 깨달은 것이었다.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추구했던 레아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깨달았고, 합환채가 임신시켜 줄 것이라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던 라헬도 임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임을 깨달아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화하였다. 길고 긴 출산 경주의 결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한 것이다. 레아든 라헬이든 하나님을 깨달았다. *한편, 하란에서 자란 하란의 딸들이 이제 하나님의 딸들이 되는데 이리 오래 걸렸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출산 경주의 결과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레아는 하나님께 사랑받음을 깨달았고, 레아의 거듭된 출산에서 시기와 질투로 몸종을 통해서라도, 합환채를 사용하여서라도 자녀들을 원했던 라헬은 임신은 인간적이고 우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철저히 깨닫고 결국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한다. 하나님은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도 후손에 대한 약속을 철저히 이루고 계셨고, 야곱의 부인들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역사하셨다.

-역시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 기도제목

* 주님, 생명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 주님, 야곱의 가정이 북적북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북적거림이 아니라 불안정한 부부관계로 인해 어지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후손들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32:22-32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밤에 일어나 식구들과 모든 소유를 강 건너편으로 보낸 후 에서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 홀로 얍복강 나루에서 서성이다가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게 된다. 자신을 축복해주지 않으면 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끈질기게 붙잡는다.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침으로써 씨름이 끝난다. 이로써 그는 축복도 받고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가축들과 식구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한 후 홀로 남아있는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설명하지 않는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씨름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씨름한 지명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한 것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이나 천사로 인식했다면 씨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축복을 받기 위해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25절은 야곱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했다고 기록한다. 이런 와중에 야곱은 그 사람의 허리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축복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한다. 한쪽 다리뼈가 탈골 되도록 그를 붙들고 야곱은 무엇을 원했을까? 
 
모든 식구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바라보고, 한편으로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에서를 생각하면서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에서와 평화로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상상하던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형제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될 것인데 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마음과 씨름하고 있는 “홀로” 남겨진 야곱이었다. 
 
씨름(싸움)의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야곱은 필사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축복으로 받는다. 하지만 그의 허벅지 관절은 상하여 다리를 절게 된다. 
 
야곱은 승리했으나 절뚝발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의 이런 외모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살 수 없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의 후손들은 이 사실을 선명하게 각인하게 된다. 다리를 절게 된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알게 된다. 야곱은 이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으면서도 살아 있음을 찬양한다. 
 
 
 
나는?
-홀로 남아 번민하던 야곱과 씨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낯선 어떤 사람(24절)인줄 알았지만, 날이 샐 때 보니 하나님이었다. 깊은 두려움에 홀로 번민하던 야곱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요즘 나의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실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씨름을 걸어오셨다. 일평생 자기 힘으로만 씨름하여 복을 쟁취하려고 한 야곱과 꼼수 없이 가장 정직한 씨름을 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이기신다. 야곱이 제 힘으로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씨름에서 진 야곱은 그를 보내지 않고 붙들고는 울며(호 12:3~4) 축복을 간청하고 강청한다. 이름을 묻는 질문에 ‘야곱’ 즉, ‘속이는 자’로 인정한다. 그는 평생 이 순간 처음으로 축복을 구하고 있다. 속이는 지혜와 자기 힘만 믿고 살던 그가 이제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먹는 것임을 드디어 인정한다. 그때 비로소 패자 야곱은 승리자의 이름 ‘이스라엘’을 얻는다.
 
-새 이름을 얻는 대신 절름발이가 된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패배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절뚝거림은 얍복 강가의 씨름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동시에 그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이 장면은 아버지 이삭이 축복해주려고 이름을 물을 때 ‘에서’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창 27:19, 24)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 이후 야곱은 자기 이름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산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이름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런 자신을 인정한다.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남의 것을 뻬앗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긴 자’라고 하신다. 20년 전 시시하게 에서의 것을 노리며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 풍성한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누리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주님,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이 도전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사모하는 그 마음도 도전됩니다. 저의 걸음도 이처럼 주님께서 부어주실 복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주님, 나의 이름이 주님께서 주신 이름임을 감사하며, 이름에 담긴 의미를 구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