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 피함 [시편 7:1-17]
 – 2026년 07월 07일
– 2026년 07월 07일 –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표제에 따르면 이 시편은 다윗이 지었으며,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부른 노래다. 그러나 베냐민인 구시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말을 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사울, 사울 주변 인물, 베냐민 사람 미스이나 세바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시편의 내용에 근거하면 구시가 다윗을 모함했을 가능성이 보인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억울한 고발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호소한다. 이에 따르면 이 시편은 애가 형식을 띤 개인 탄식시이자 무죄 탄원시로 불린다.

살다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함을 받을 때가 있다. 자존심처럼 지켜온 삶의 태도와 가치들이 폄훼 당하고, 모함 당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빠져든다. 특히 한 개인을 향한 조직적인 모함이나 계략으로 인해 평생 정죄 당하고 여론에 의해 매장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밝혀지곤 한다. 어떤 형태이든지 이런 경우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 슬며시, 혹은 자신도 모른 채 크고 작게 이미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 죄가 만연하니 죄의 크고 작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윗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보자!



1. 내가 주께 피하오니…(1-2절)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기를 추적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한다. 이때 ‘내가 당신께 피합니다(1A절)’라는 말은 추격당하면서도 자기를 도와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고백이자 절절한 호소다. 원수들로부터 억울한 고발을 당한 사람의 고백이다. “구원하다(야샤)”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구출하다(나찰)”라는 말은 “와락 붙잡거나 낚아채고 움켜쥐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 긴급한 마음과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과 개입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역시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먼저 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대적들이 사자처럼 달려들어 나를 찢어 발기어도 목숨을 구해 줄 이는 ‘여호와 내 하나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일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센 계략들에게서 피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2. 나의 삶을 아시오니(3-13절)
다윗은 여호와 이름만 부르지 않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친밀한 언약의 이름 여호와뿐만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호명하여 다윗 자신과 밀착을 시킨다. 다윗은 신속한 구원을 요청했지만(2절) 충분하지 않다. 그는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일관되게 ‘만일 ~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다면’을 세 번 반복한다(3~5절). 다윗의 마음은 자기 자신이 이러이러하다면 원수가 자기 생명을 땅에 짓밟고 자기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해도 괜찮다(5절)는 항변이었다. 그만큼 다윗은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3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4절)’, ‘땅에 짓밟히고 명예를 잃어도(5절)’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다윗의 이런 언행은 고대 사회에서 무죄를 맹세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와 같은 정황은 다윗의 원수들이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과 관련된 거짓 증거로 다윗을 옭아매려 했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모략한 것이 사실이 아님을 하나님이 아시오니… 이다. 그래서 담대하게 외친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만일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벌을 내려 주십시오(새번역_3절)” 그들의 모함처럼 내가 살았다면 마땅히 벌을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담대하다.

6~9절은 자신의 무죄 맹세 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정당한 판결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세 개의 명령어를 내세워 직접 간청한다(6절). ‘당신의 진노로, 대적들의 격분’에 맞서 일어나도록 청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미 판결하신 듯이 ‘당신이 심판을 명하셨습니다(6절 하)’라며 정리한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재판장되심을 상상하며 중재와 재판을 요청한다. ‘높은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십시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판결하십시오(7~8절), 악인을 끊어주십시오, 의인을 세워주십시오’라고 고백한 후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고백한다(9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은…..마음이 올바른 사람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새번역_10절).” 평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음을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신다는 것이다. 이 당당함! 얼마나 멋진가! 아무리 모함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은 분명히 아시기에 “내가 주께 피할 수” 있고 “만일 모함이 사실이면 나를 벌하십시오!”라고 외친 것이다.

10~13절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간구한다. 다윗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항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10절). 무엇보다 ‘하나님은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고백한 것은 11절의 ‘매일 분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선포와 연결된다. 그렇기에 다윗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칼을 가시며, 활을 당시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확신한다(12절). 또한 하나님을 전사(용사)처럼 묘사하여 불타는 화살(13절)을 준비하신 분으로 표현한다. 고대 사회에서 불호살은 포위된 도시를 불대우는 무기다. 이런 묘사들은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담대하게 나아가 “탄원”하는 삶이었다!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라고 담대히 외치는 그 탄원 속에 자신도 심판 받을 각오를 하는 기도를 드리는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 말한대로 거둘 인생(14-17절)
악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다윗은 ‘보라 악을 잉태한 자는 분쟁(재앙)을 임신하고 거짓을 출산했다(14절)’라고 말한다. 이는 악의 끊을 수 없는 파괴적인 생산성을 묘사한듯하다. 또, 악을 잉태한 자는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웅덩이를 판 사람과 연결시킨다(15a절). 짐승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으로 묘사되나 곧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만다(15b절).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재앙이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린다(16절)’의 표현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준다.

17절을 통해 자기의 무죄를 항변하며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 악인의 심판을 청구한 다윗이 하나님께 찬미와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한다.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가장 높으신 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마무리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잘 알았다. 그것도 ‘올바로 잘’ 알았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도 너무도 잘 알았다.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신실함을 알기에 담대하게 선포한다. “(보라!) 악인은 악을 잉태하여 재앙과 거짓을 낳는구나. 함정을 깊이 파지만, 그가 만든 구덩이에 그가 빠진다. 남에게 준 고통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남에게 휘두른 폭력도 그의 정수리로 돌아간다(새번역_14-16절).” 순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만하여 모함하는 인생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재앙과 거짓”이 그의 인생에 임한다. 자신이 퍼뜨린 거짓말의 깊은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 자신의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나지만 결국 자신이 그것을 다 받는다. 자신이 행사한 폭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인생도 이와같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왜 이리 망각할까? 답답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그럴 수 있다. 잠깐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모략을 참지 못할 수 있다. 순간의 거짓의 유혹이 너무나 강력하여 어이없게 걸려들 수 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외친 “정직과 성실”이 놀랍다!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직과 성실로 인생의 밭을 일구지만 거짓과 모함의 가라지들은 언제나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직과 성실’의 열매는 반드시 맺힌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장하신다.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련다(새번역_17절)”



나는?
-다윗은 엄중한 맹세로 자기 무죄를 밝히며, 지기를 무고하게 추격하는 대적들로부터 전져주시기를 간청한다(1~5절). 참된 믿음은 아무리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 신뢰에 자기의 안위를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신뢰하며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꼭 응답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 일어나셔서 악한 대적들의 노를 잠재우시기를 간청한다(6~7절). 이것은 만민 앞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호소이자, 악이 득세하고 공의가 무너진 시대에 주님의 의로운 통치가 편만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 필요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다윗을 통해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동기까지 살펴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8~10절). 이를 통해 악인이 더는 기승부리지 못하도록 근절하시고, 무고한 고소와 악의적 비난으로부터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여 이 땅에 정의를 세우신다. 나라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위임 받은 권세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심판의 칼을 드신다(11~13절). 심판의 지연이 죄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이키지 않고도 무탈한 인생은 없기에, 오래도록 품어온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산해야 할 습관과 관계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고한 자를 음해하던 악인들의 죄악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을 정죄하고 파멸할 것이다(14~17절).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의 보응이다. 언젠가 스스로 추수해야 할 악의 씨앗을 심지 말고, 날마다 의와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윗과 관련되어 그를 대적하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 중에 “베냐민 사람 구시”는 없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는 데서 사울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중의 하나였을 수 있겠다 싶지만 성경에서 그 사건을 소개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윗은 이런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마다 그것을 당사자나, 사람들을 통해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럴수도 없었겠지만 그 답답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훗날 시로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노래하는 다윗의 모습이 내가 닮아야 할 모습이겠다. 수많은 오해들이 발생하고, 모함들이 난무 할 수 있는 목회의 일상에서 “가장 먼저, 오직 유일하게” 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기도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목양 모습이어야 하겠다.

-나의 무고함과 결백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노래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이라고 고백하기에 자신의 허물도 낱낱이 드러날 삶을 애초에 걷지 않는 목양이어야 하겠다. 그러면 어쩌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 담대하게 노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1절)” 노래할 수 있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 되도록 간구할 뿐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세상 법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오판이 없으시다. 당장의 억울함의 답답함을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내한다면, “하나님께서 재판하셔서 갚아주신다” 이 믿음이 오늘의 억울함에도 몸과 마음을 꿋꿋하게 지켜나가게 할 것이다.

-이 믿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재판 하실(이루실)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계신다.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 특히 거짓을 행하는 자들은 항상 모든 것을 은폐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기 그지없다.

-함정을 만든 자는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자신이 행한 재앙과 포악이 자신에게 돌아간다. 심는 대로 거둔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두고 의를 심는 자는 의를 거둔다. 악인은 자신이 행한 대로 반드시 돌려 받는다. 이와같이 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감사하다.


*목회가 참 변수가 많다! 어제도 그런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힘이 된다! 결국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서게 될 것이니 그때 주님의 선명한 재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속마음을 알 수 없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을 수 있지만 반드시 드러난다! 그때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면 된다. 그때 판단 당하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오늘 하지 않으면 된다. 주여 지켜주옵소서

*이런 변수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겠지? 그런데 두렵지는 않다. 은근한 담대함이 일어났다.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 다만 한 공동체 안에서 이리 다른 말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하는 것이 두렵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과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깝다!

*내가 그런 자리에, 그런 말들을 만들어 내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는 아침이다! 오늘도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잘 분별하며 말하고 행해하리라. “내가 주께 피하오니….”

+ 기도제목

*주님, 나의 방패이신 주님, 악인의 악을 끊으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세우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바라봅니다.
*주님, 악을 가까이도,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는 것도, 악이 도전과 도발을 해오더라도 의로우신 주님의 그늘 아래에 피하고, 방패되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겠습니다.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표제에 따르면 이 시편은 다윗이 지었으며,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부른 노래다. 그러나 베냐민인 구시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말을 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사울, 사울 주변 인물, 베냐민 사람 미스이나 세바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시편의 내용에 근거하면 구시가 다윗을 모함했을 가능성이 보인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억울한 고발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호소한다. 이에 따르면 이 시편은 애가 형식을 띤 개인 탄식시이자 무죄 탄원시로 불린다.

살다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함을 받을 때가 있다. 자존심처럼 지켜온 삶의 태도와 가치들이 폄훼 당하고, 모함 당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빠져든다. 특히 한 개인을 향한 조직적인 모함이나 계략으로 인해 평생 정죄 당하고 여론에 의해 매장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밝혀지곤 한다. 어떤 형태이든지 이런 경우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 슬며시, 혹은 자신도 모른 채 크고 작게 이미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 죄가 만연하니 죄의 크고 작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윗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보자!



1. 내가 주께 피하오니…(1-2절)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기를 추적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한다. 이때 ‘내가 당신께 피합니다(1A절)’라는 말은 추격당하면서도 자기를 도와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고백이자 절절한 호소다. 원수들로부터 억울한 고발을 당한 사람의 고백이다. “구원하다(야샤)”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구출하다(나찰)”라는 말은 “와락 붙잡거나 낚아채고 움켜쥐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 긴급한 마음과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과 개입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역시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먼저 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대적들이 사자처럼 달려들어 나를 찢어 발기어도 목숨을 구해 줄 이는 ‘여호와 내 하나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일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센 계략들에게서 피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2. 나의 삶을 아시오니(3-13절)
다윗은 여호와 이름만 부르지 않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친밀한 언약의 이름 여호와뿐만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호명하여 다윗 자신과 밀착을 시킨다. 다윗은 신속한 구원을 요청했지만(2절) 충분하지 않다. 그는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일관되게 ‘만일 ~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다면’을 세 번 반복한다(3~5절). 다윗의 마음은 자기 자신이 이러이러하다면 원수가 자기 생명을 땅에 짓밟고 자기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해도 괜찮다(5절)는 항변이었다. 그만큼 다윗은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3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4절)’, ‘땅에 짓밟히고 명예를 잃어도(5절)’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다윗의 이런 언행은 고대 사회에서 무죄를 맹세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와 같은 정황은 다윗의 원수들이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과 관련된 거짓 증거로 다윗을 옭아매려 했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모략한 것이 사실이 아님을 하나님이 아시오니… 이다. 그래서 담대하게 외친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만일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벌을 내려 주십시오(새번역_3절)” 그들의 모함처럼 내가 살았다면 마땅히 벌을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담대하다.

6~9절은 자신의 무죄 맹세 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정당한 판결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세 개의 명령어를 내세워 직접 간청한다(6절). ‘당신의 진노로, 대적들의 격분’에 맞서 일어나도록 청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미 판결하신 듯이 ‘당신이 심판을 명하셨습니다(6절 하)’라며 정리한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재판장되심을 상상하며 중재와 재판을 요청한다. ‘높은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십시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판결하십시오(7~8절), 악인을 끊어주십시오, 의인을 세워주십시오’라고 고백한 후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고백한다(9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은…..마음이 올바른 사람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새번역_10절).” 평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음을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신다는 것이다. 이 당당함! 얼마나 멋진가! 아무리 모함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은 분명히 아시기에 “내가 주께 피할 수” 있고 “만일 모함이 사실이면 나를 벌하십시오!”라고 외친 것이다.

10~13절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간구한다. 다윗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항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10절). 무엇보다 ‘하나님은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고백한 것은 11절의 ‘매일 분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선포와 연결된다. 그렇기에 다윗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칼을 가시며, 활을 당시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확신한다(12절). 또한 하나님을 전사(용사)처럼 묘사하여 불타는 화살(13절)을 준비하신 분으로 표현한다. 고대 사회에서 불호살은 포위된 도시를 불대우는 무기다. 이런 묘사들은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담대하게 나아가 “탄원”하는 삶이었다!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라고 담대히 외치는 그 탄원 속에 자신도 심판 받을 각오를 하는 기도를 드리는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 말한대로 거둘 인생(14-17절)
악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다윗은 ‘보라 악을 잉태한 자는 분쟁(재앙)을 임신하고 거짓을 출산했다(14절)’라고 말한다. 이는 악의 끊을 수 없는 파괴적인 생산성을 묘사한듯하다. 또, 악을 잉태한 자는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웅덩이를 판 사람과 연결시킨다(15a절). 짐승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으로 묘사되나 곧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만다(15b절).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재앙이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린다(16절)’의 표현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준다.

17절을 통해 자기의 무죄를 항변하며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 악인의 심판을 청구한 다윗이 하나님께 찬미와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한다.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가장 높으신 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마무리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잘 알았다. 그것도 ‘올바로 잘’ 알았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도 너무도 잘 알았다.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신실함을 알기에 담대하게 선포한다. “(보라!) 악인은 악을 잉태하여 재앙과 거짓을 낳는구나. 함정을 깊이 파지만, 그가 만든 구덩이에 그가 빠진다. 남에게 준 고통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남에게 휘두른 폭력도 그의 정수리로 돌아간다(새번역_14-16절).” 순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만하여 모함하는 인생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재앙과 거짓”이 그의 인생에 임한다. 자신이 퍼뜨린 거짓말의 깊은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 자신의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나지만 결국 자신이 그것을 다 받는다. 자신이 행사한 폭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인생도 이와같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왜 이리 망각할까? 답답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그럴 수 있다. 잠깐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모략을 참지 못할 수 있다. 순간의 거짓의 유혹이 너무나 강력하여 어이없게 걸려들 수 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외친 “정직과 성실”이 놀랍다!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직과 성실로 인생의 밭을 일구지만 거짓과 모함의 가라지들은 언제나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직과 성실’의 열매는 반드시 맺힌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장하신다.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련다(새번역_17절)”



나는?
-다윗은 엄중한 맹세로 자기 무죄를 밝히며, 지기를 무고하게 추격하는 대적들로부터 전져주시기를 간청한다(1~5절). 참된 믿음은 아무리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 신뢰에 자기의 안위를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신뢰하며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꼭 응답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 일어나셔서 악한 대적들의 노를 잠재우시기를 간청한다(6~7절). 이것은 만민 앞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호소이자, 악이 득세하고 공의가 무너진 시대에 주님의 의로운 통치가 편만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 필요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다윗을 통해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동기까지 살펴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8~10절). 이를 통해 악인이 더는 기승부리지 못하도록 근절하시고, 무고한 고소와 악의적 비난으로부터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여 이 땅에 정의를 세우신다. 나라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위임 받은 권세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심판의 칼을 드신다(11~13절). 심판의 지연이 죄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이키지 않고도 무탈한 인생은 없기에, 오래도록 품어온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산해야 할 습관과 관계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고한 자를 음해하던 악인들의 죄악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을 정죄하고 파멸할 것이다(14~17절).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의 보응이다. 언젠가 스스로 추수해야 할 악의 씨앗을 심지 말고, 날마다 의와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윗과 관련되어 그를 대적하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 중에 “베냐민 사람 구시”는 없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는 데서 사울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중의 하나였을 수 있겠다 싶지만 성경에서 그 사건을 소개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윗은 이런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마다 그것을 당사자나, 사람들을 통해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럴수도 없었겠지만 그 답답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훗날 시로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노래하는 다윗의 모습이 내가 닮아야 할 모습이겠다. 수많은 오해들이 발생하고, 모함들이 난무 할 수 있는 목회의 일상에서 “가장 먼저, 오직 유일하게” 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기도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목양 모습이어야 하겠다.

-나의 무고함과 결백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노래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이라고 고백하기에 자신의 허물도 낱낱이 드러날 삶을 애초에 걷지 않는 목양이어야 하겠다. 그러면 어쩌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 담대하게 노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1절)” 노래할 수 있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 되도록 간구할 뿐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세상 법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오판이 없으시다. 당장의 억울함의 답답함을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내한다면, “하나님께서 재판하셔서 갚아주신다” 이 믿음이 오늘의 억울함에도 몸과 마음을 꿋꿋하게 지켜나가게 할 것이다.

-이 믿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재판 하실(이루실)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계신다.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 특히 거짓을 행하는 자들은 항상 모든 것을 은폐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기 그지없다.

-함정을 만든 자는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자신이 행한 재앙과 포악이 자신에게 돌아간다. 심는 대로 거둔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두고 의를 심는 자는 의를 거둔다. 악인은 자신이 행한 대로 반드시 돌려 받는다. 이와같이 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감사하다.


*목회가 참 변수가 많다! 어제도 그런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힘이 된다! 결국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서게 될 것이니 그때 주님의 선명한 재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속마음을 알 수 없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을 수 있지만 반드시 드러난다! 그때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면 된다. 그때 판단 당하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오늘 하지 않으면 된다. 주여 지켜주옵소서

*이런 변수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겠지? 그런데 두렵지는 않다. 은근한 담대함이 일어났다.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 다만 한 공동체 안에서 이리 다른 말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하는 것이 두렵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과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깝다!

*내가 그런 자리에, 그런 말들을 만들어 내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는 아침이다! 오늘도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잘 분별하며 말하고 행해하리라. “내가 주께 피하오니….”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