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본 시편은 도움을 구하는 기도다. 원수를 고발하고, 구원을 요청하며, 찬양과 신뢰를 고백하고, 맹세를 표하는 내용을 담았다. 다윗은 압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무죄한 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찾아내 심판하심으로 정의가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이 시편은 개인적인 탄식과 감사의 찬양이 함께 어우러진 알파벳 시다. 장르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핵심이다. 신앙적인 체험의 맥락에서 탄식, 감사, 찬양은 밀접하게 서로 연결된다. 또한 본 시편은 시편 10편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통일성 있는 하나의 시편으로 해석되곤 한다(사본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어떤 시점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온 세상을 재판하시고 열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요청, 그리고 가난한 자, 약한 자에 대한 잦은 언급으로 사회적 차원의 관심이 집중된다.
1.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찬양(1~4절)
1~2절은 히브리어 첫 자음 ‘알렙’으로 시작한다. 두 구절 모두 ‘내가 찬양합니다, 내가 전합니다, 내가 기뻐합니다, 내가 찬송합니다’로 시작하여 모두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윗은 ‘전심으로’, 곧 ‘내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모든 일들을 자세히 말하겠다는(1절)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표현한다. 이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선포한다(2절). 시편 곳곳에서 ‘지존하신 분’은 주님의 이름을 지칭한다(7:17; 47:2; 78:35). 다윗은 곧바로 가장 높으신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양할 이유를 제시하듯 주님의 행하신 일을 열거한다.
3~4절은 정의로운 판결을 하신 여호와를 찬양한다. 3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둘째 자음 ‘베트’로 시작한다. 다윗은 원수들이 물러갈 때 주님 앞에서 멸망할 것을 고백하며(3절), 이 고백의 이유를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자기의 송사와 판결을 내리실 때, 정의로운 판결을 하시기 때문(4절)이라고 고백한다. 법적인 송사에서 재판장이신 주님의 개입을 믿는다는 표현이다. 아직은 원수의 파멸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2. 공의와 정직으로 열국을 판결하시는 여호와(5~8절)
5~6절은 악인의 멸망을 노래하는데, 히브리어 셋째 자음 ‘김멜’로 5절을 시작한다. 주님이 열방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셔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음을 선포한다(5절). 주님은 옛적 이스라엘을 위해 원수와 뭇 나라들을 멸하셨다. 주님이 그 이름을 지우셨다는 것은 악인들이 후세대에 의해 잊힌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던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 철저한 파멸을 뜻한다. 다윗은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했고, 주님이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다고 선포한다(6절).
다윗은 옛적 조상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했다. 그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가나안 민족들의 성읍을 도무지 회복할 수 없게 만드셨다.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지우신 것처럼(5절), ‘기억’에서 지워지게 하셨다. 구체적인 역사의 증거는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 거주할 때 아말렉 족속에게 내린 저주였다(출 17:14). 하지만 이때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모세를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아말렉과 똑같은 경고를 받기도 했다(신 17:14). 이렇듯 언약 백성도 하나님을 떠나면 공평한 재판장의 판결에서 예외일 수 없다.
7~8절은 공의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판결을 노래한다. 히브리어 넷째 자음 ‘바브’로 시작하는 싯구를 통해 심판을 위해 보좌를 준비하시고 영원히 앉으시는 여호와를 상상한다(7절).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신다(8절). 무엇보다 심판을 위해 여호와가 보좌에 ‘영원히’ 앉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태초의 시간부터 미래의 알 수 없는 시점까지를 포괄한다.
3.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는 시온의 주를 찬양(9~14절)
9~10절은 다섯 째 자음 ‘바브’로 시작한다. 다윗은 압제 당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해 여호와가 요새가 되어 구원해주시길 기도하며 찬송한다. 다윗은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보좌에 앉으신 의로운 재판장으로 비유했다면, 이제 ‘요새’, 곧 ‘높은 곳에 위치한 피난처’ 되어주시기를 간구한다(9절). 다윗은 하나님이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재판장이자, 압제당하는 자의 높은 요새가 되셔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당신을 찾는 자’를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10절).
11~12절은 여섯 번째 자음인 ‘자인’으로 시작한다. 시온에 앉으신 이, 곧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열방 중에서 선포하자고 청한다(11절). 시온에 계신 여호와는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12절)’다. 여호와는 백성을 기억하실 뿐 아니라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12절). 다윗은 타인을 해치는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시고 보복하시는 피의 보복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를 잊지 않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보복하시며, 피난처가 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13~14절은 일곱 번 째 자음 ‘헤트’로 시작한다. 이제 다윗은 간절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아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나의 고통을 보십시오.’ 이렇게 부르짖는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을 봐주시기를 기도한다(13절). 또한 주를 향한 모든 찬양을 속속들이 전부 할 수 있도록, ‘시온의 문’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한다(14절). ‘시온의 문’과 ‘사망의 문’을 의도적으로 대비하여 시온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임으로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보좌를 강조한다.
4. 악인과 이방 나라의 심판을 간구함(15~20절)
15~16절은 여덟 번 째 자음 ‘테트’로 시작한다. 다윗은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이 자기들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 멸망하기를 바란다. ‘열방은 자기들이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발이 걸렸다(15절)’고 표현하며 열방이 자기들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을 여호와의 심판 때문이라고 믿는다.
17~20절은 아홉 번 째 자음 ‘요드’로 시작한다.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은 열방의 최종적인 심판과 멸망을 간청한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간청한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청한다(17절). 스올은 어두운 땅이며 죽은 자들의 세계다. 반대로 시인은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18절).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궁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빈곤은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인생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시오(19a절). ‘인생’은 ‘사람(에노쉬)’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함,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힘 자랑하는 ‘이방 나라들(열방)’이 ‘사람’일뿐임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다윗은 마지막으로 착취와 억압으로 고난당한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두려워 떨기를 간구한다(20절).
나는?
-본문을 묵상하며 한 줄 제목으로 정리하면, ‘원수는 무덤으로 의인은 보좌로’다. 다윗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원수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고백한다. 원수 앞에서 압제당하고 환난당하는 자신의 삶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들이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져 심판당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감사와 기쁨이 나온다(1~2, 19, 20절). 다윗은 전심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들에게서 자신을 지키시고 마침내는 승리케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를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내 안의 다른 마음들과 끝까지 분별하며 싸워야 할 이유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은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한다(3~6절). 우리가 받은 억울한 고난과 부당한 대접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올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고난의 물살 앞에 주님께 기대는 것이 괴로운 날을 견디는 유일한 방편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다. 교만한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멸망 당하지만,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7~14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잰걸음으로 움직이지만 그 끝은 무덤이며 매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인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인 의인들은 매사에 주님께 나아가 안전한 피난처로 인도받는 자들이기에 결국 영생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압제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다(15~16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의인들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구덩이를 파지만, 이들은 깊이 파면 팔수록 자신들이 묻힐 무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악인은 무덤으로 끝나지만, 의인은 영원히 기억된다(17~20절). 힘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악인들의 최종 종착지는 무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조용히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그들의 종착지다. 하나님을 잊고 살면, 우리의 인생도 잃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에는 거짓이나 편벽됨이 없다.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하시며, 강한 자라고 또는 악한 자라고 편들어주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자를 빈부귀천, 유무식에 관계없이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편애함 없이 공평하게 대신한다. 공의와 공평의 심판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을, 의로운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자가 풍성한 생명을 얻어 함께 상생하도록 하려고 공의와 정의라는 질서를 세우셨다. 공의와 정의가 깨질 때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를 당한다. 그들은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관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동조하여 불의한 부와 권력을 동경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그들에게서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리라.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들의 요새시다.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함을 꺾어 겸손하게 하는 심판을 통해서도 사진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계시하신다.
본 시편은 도움을 구하는 기도다. 원수를 고발하고, 구원을 요청하며, 찬양과 신뢰를 고백하고, 맹세를 표하는 내용을 담았다. 다윗은 압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무죄한 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찾아내 심판하심으로 정의가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이 시편은 개인적인 탄식과 감사의 찬양이 함께 어우러진 알파벳 시다. 장르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핵심이다. 신앙적인 체험의 맥락에서 탄식, 감사, 찬양은 밀접하게 서로 연결된다. 또한 본 시편은 시편 10편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통일성 있는 하나의 시편으로 해석되곤 한다(사본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어떤 시점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온 세상을 재판하시고 열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요청, 그리고 가난한 자, 약한 자에 대한 잦은 언급으로 사회적 차원의 관심이 집중된다.
1.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찬양(1~4절)
1~2절은 히브리어 첫 자음 ‘알렙’으로 시작한다. 두 구절 모두 ‘내가 찬양합니다, 내가 전합니다, 내가 기뻐합니다, 내가 찬송합니다’로 시작하여 모두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윗은 ‘전심으로’, 곧 ‘내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모든 일들을 자세히 말하겠다는(1절)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표현한다. 이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선포한다(2절). 시편 곳곳에서 ‘지존하신 분’은 주님의 이름을 지칭한다(7:17; 47:2; 78:35). 다윗은 곧바로 가장 높으신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양할 이유를 제시하듯 주님의 행하신 일을 열거한다.
3~4절은 정의로운 판결을 하신 여호와를 찬양한다. 3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둘째 자음 ‘베트’로 시작한다. 다윗은 원수들이 물러갈 때 주님 앞에서 멸망할 것을 고백하며(3절), 이 고백의 이유를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자기의 송사와 판결을 내리실 때, 정의로운 판결을 하시기 때문(4절)이라고 고백한다. 법적인 송사에서 재판장이신 주님의 개입을 믿는다는 표현이다. 아직은 원수의 파멸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2. 공의와 정직으로 열국을 판결하시는 여호와(5~8절)
5~6절은 악인의 멸망을 노래하는데, 히브리어 셋째 자음 ‘김멜’로 5절을 시작한다. 주님이 열방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셔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음을 선포한다(5절). 주님은 옛적 이스라엘을 위해 원수와 뭇 나라들을 멸하셨다. 주님이 그 이름을 지우셨다는 것은 악인들이 후세대에 의해 잊힌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던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 철저한 파멸을 뜻한다. 다윗은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했고, 주님이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다고 선포한다(6절).
다윗은 옛적 조상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했다. 그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가나안 민족들의 성읍을 도무지 회복할 수 없게 만드셨다.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지우신 것처럼(5절), ‘기억’에서 지워지게 하셨다. 구체적인 역사의 증거는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 거주할 때 아말렉 족속에게 내린 저주였다(출 17:14). 하지만 이때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모세를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아말렉과 똑같은 경고를 받기도 했다(신 17:14). 이렇듯 언약 백성도 하나님을 떠나면 공평한 재판장의 판결에서 예외일 수 없다.
7~8절은 공의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판결을 노래한다. 히브리어 넷째 자음 ‘바브’로 시작하는 싯구를 통해 심판을 위해 보좌를 준비하시고 영원히 앉으시는 여호와를 상상한다(7절).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신다(8절). 무엇보다 심판을 위해 여호와가 보좌에 ‘영원히’ 앉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태초의 시간부터 미래의 알 수 없는 시점까지를 포괄한다.
3.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는 시온의 주를 찬양(9~14절)
9~10절은 다섯 째 자음 ‘바브’로 시작한다. 다윗은 압제 당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해 여호와가 요새가 되어 구원해주시길 기도하며 찬송한다. 다윗은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보좌에 앉으신 의로운 재판장으로 비유했다면, 이제 ‘요새’, 곧 ‘높은 곳에 위치한 피난처’ 되어주시기를 간구한다(9절). 다윗은 하나님이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재판장이자, 압제당하는 자의 높은 요새가 되셔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당신을 찾는 자’를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10절).
11~12절은 여섯 번째 자음인 ‘자인’으로 시작한다. 시온에 앉으신 이, 곧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열방 중에서 선포하자고 청한다(11절). 시온에 계신 여호와는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12절)’다. 여호와는 백성을 기억하실 뿐 아니라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12절). 다윗은 타인을 해치는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시고 보복하시는 피의 보복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를 잊지 않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보복하시며, 피난처가 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13~14절은 일곱 번 째 자음 ‘헤트’로 시작한다. 이제 다윗은 간절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아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나의 고통을 보십시오.’ 이렇게 부르짖는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을 봐주시기를 기도한다(13절). 또한 주를 향한 모든 찬양을 속속들이 전부 할 수 있도록, ‘시온의 문’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한다(14절). ‘시온의 문’과 ‘사망의 문’을 의도적으로 대비하여 시온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임으로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보좌를 강조한다.
4. 악인과 이방 나라의 심판을 간구함(15~20절)
15~16절은 여덟 번 째 자음 ‘테트’로 시작한다. 다윗은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이 자기들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 멸망하기를 바란다. ‘열방은 자기들이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발이 걸렸다(15절)’고 표현하며 열방이 자기들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을 여호와의 심판 때문이라고 믿는다.
17~20절은 아홉 번 째 자음 ‘요드’로 시작한다.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은 열방의 최종적인 심판과 멸망을 간청한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간청한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청한다(17절). 스올은 어두운 땅이며 죽은 자들의 세계다. 반대로 시인은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18절).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궁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빈곤은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인생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시오(19a절). ‘인생’은 ‘사람(에노쉬)’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함,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힘 자랑하는 ‘이방 나라들(열방)’이 ‘사람’일뿐임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다윗은 마지막으로 착취와 억압으로 고난당한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두려워 떨기를 간구한다(20절).
나는?
-본문을 묵상하며 한 줄 제목으로 정리하면, ‘원수는 무덤으로 의인은 보좌로’다. 다윗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원수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고백한다. 원수 앞에서 압제당하고 환난당하는 자신의 삶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들이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져 심판당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감사와 기쁨이 나온다(1~2, 19, 20절). 다윗은 전심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들에게서 자신을 지키시고 마침내는 승리케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를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내 안의 다른 마음들과 끝까지 분별하며 싸워야 할 이유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은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한다(3~6절). 우리가 받은 억울한 고난과 부당한 대접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올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고난의 물살 앞에 주님께 기대는 것이 괴로운 날을 견디는 유일한 방편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다. 교만한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멸망 당하지만,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7~14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잰걸음으로 움직이지만 그 끝은 무덤이며 매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인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인 의인들은 매사에 주님께 나아가 안전한 피난처로 인도받는 자들이기에 결국 영생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압제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다(15~16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의인들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구덩이를 파지만, 이들은 깊이 파면 팔수록 자신들이 묻힐 무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악인은 무덤으로 끝나지만, 의인은 영원히 기억된다(17~20절). 힘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악인들의 최종 종착지는 무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조용히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그들의 종착지다. 하나님을 잊고 살면, 우리의 인생도 잃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에는 거짓이나 편벽됨이 없다.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하시며, 강한 자라고 또는 악한 자라고 편들어주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자를 빈부귀천, 유무식에 관계없이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편애함 없이 공평하게 대신한다. 공의와 공평의 심판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을, 의로운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자가 풍성한 생명을 얻어 함께 상생하도록 하려고 공의와 정의라는 질서를 세우셨다. 공의와 정의가 깨질 때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를 당한다. 그들은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관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동조하여 불의한 부와 권력을 동경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그들에게서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리라.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들의 요새시다.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함을 꺾어 겸손하게 하는 심판을 통해서도 사진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계시하신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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