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는 대략 주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다. 그와 동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아모스, 호세아 그리고 미가가 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고, 이사야와 미가는 남 유다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에서 시작한 앗수르가 대제국을 이루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시기다. 앗수르의 등장은 유다 주변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주변 약소 국가들은 반 앗수르와 친 앗수르로 나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반역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자식이요 소와 나귀보다 못한 자들이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악의 백성이 됐다. 멀리해야 할 죄가 이스라엘의 본성과 성품의 중심에 주인처럼 자리잡고 말았다.
이사야는 이처럼 패륜적인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다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개와 순종으로써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을 명확히 알린다.
1.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하나님(1~3절)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어간까지, 어림잡아 40년 동안(학자에 따라 주전 740~686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에 따르면 50~60여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는 민족들의 신탁을 포함해 이사야에 수집된 모든 말씀은 그가 본 하나님의 계시(환상)이고, 그 내용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준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확실한 ‘하늘과 땅’을 불러 세우신다. 땅은 피 흘림과 황폐함을 초래한(7절)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경험한 증인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두 개의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고발하신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다. 이스라엘은 키워주고 돌봐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파렴치한 아들이다. 신 21:18~21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은 죽음에 처해진다.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행태는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의 패역과 같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다. 소나 나귀도 먹을 것을 주고 키워준 주인을 알아보고 따르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3절).
“내가 기르고 키운 자식이 나를 거역했다(2절)” “소,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3절)”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한탄이 베어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 만큼 낙심되는 상황은 드물 것이다. 가축들도 알아보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기가 막힐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심판 구형(4~17절)
4-9절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4절)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상태를 부연한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깨닫지 못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심판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뻔 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 하신다(9절).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며 등을 돌렸다(4절).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패역을 거듭하여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골병이 들었다(5절).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으나,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6절). 철저하게 “황폐해진 땅(7절)”이 되었고 도성은 오두막처럼 서 있다(8절).
이어서 10-17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상세하게 다루며 황폐해진 이유를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는 관심없고 종교적인 제의만 열심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너희들이 가져오는 제물 지겹다” “너희들이 바치는 피도 싫다” “나에게 보이러만 오는 것 다 쓸모없다!” “분향도 역겹다!” “절기 지키는 것, 참을 수 없다! 견딜 수 없다! 싫다!” “그런 것들은 나에게 짐만 된다! 나는 지쳤다!” “기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듣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덮고자 “더 많은 제물들”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을 직시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지 제물들의 피를 드림으로 자신들이 흘리게한 사람들의 피는 가증스럽게 외면했다. 그러니 기도하여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황폐함”이 온 땅에 드리웠다!
삶의 황폐함은 우연히,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죄악의 향기를 맡고 멀리서부터 살며시 엄습해 온다.
3. 그러나 살아날 길이 있다(18-20절)
불쑥 뒤덮은 황폐함이 결말일까? 결코 아니다. 살아날 길이 있다. 선택하면 된다. 이미 황폐함이 몰려 올 때 그 징조를 보여 주셨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새번역_9절)” 원두막 같이 남아있는 도성도 없어졌을 것이다. 또한 손에 가득한 피를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새번역_16-17절).”라고 명령하신다.
황폐함 속에 썩어질 심판이 결정된 백성이라면 굳이 이런 명령을 하실 이유가 없다. 살리시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고 죄악의 위선이 역겹고 견딜 수 없이 지쳤을 지라도 끝까지 심판이 아니라 살리시고 싶으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싶으신 것이다. 지금까지 역겹고 역겨운 죄악의 피내음 가득한 삶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라고 쉴새없이 촉구하신다. 그 쉼 없는 촉구속에 담긴 살아날 길이 있다.
그것은 변론과 순종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새번역_18절)” 변론은 직역하면 “결정하다, 판단하다, 입증하자, 꾸짖다, 징계하다”라는 의미들이 있다. 본문은 “논증해 보자!”라는 의미다.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는 제의들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하면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서로 논증해 보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말씀)을 매우 잘 알아야 ‘논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서로 논증하며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죄악의 꺼풀들을 벗겨낼 수 있다. 그래야 주홍같은 죄를 바라보고 발견하여 벗겨내고 눈과 같이 회복되는 길을 깨우칠 수 있다. 그래야 산다.
또, 순종하면 산다고 하신다. 그런데 순종도 그냥 순종이 아니다. “즐겨 순종하면” 이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새번역_19절).”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 역시 “기꺼이 혹은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매우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해박하고도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잘 알아야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 지식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잘 알고 있어야 기꺼이 순종하며 살 수 있다. 적어도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에서 “가장 좋은 소산”을 얻어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능력임을 알고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반면, 황폐함 속에 더 완전한 진멸로 빠질 길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거절)과 배반이다. 이 길은 그들이 경험했던(히스기야 시대,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칼의 춤사위에 던져 지는 것이다. 결코 물려지지 않을 칼춤이 벌어지는 길이 “거역과 배반”이다.
이 두 가지 길중에서 선택하라 하신다. 살아날 길과 칼춤이 벌어질 길 중에서 살아날 길을 제발 선택해다오! 이스라엘아! 라고 간절히 염원하시는듯 하다.
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이며 자식으로서(출 19:6) 언약의 특권을 남용하였다. 주인과 구유를 알아보는 고집 센 소와 나귀보다 못하게, 사랑으로 자식을 양육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말았다(1~4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등을 돌렸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새 언약의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내야 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드신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 없고 마음까지 멍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일 만큼 심각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큰 매를 부른 것이다. 토지가 황폐하고 성읍은 불타고 포도원에는 사람이 없고 무너진 망대만 황량하게 남을 것이다(5~8절). 혹시 지금 하나님께 사랑의 매를 맞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버지의 더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서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멈추고 돌아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성도가 돌이켜야 할 과오들이 있다. 먼저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를 잊고 주님의 법을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과오일 것이다. 그리고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내면에 뿌리박힌 죄의 성향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이다. 나는 어떤가? 곱씹고 곱씹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법을 떠난 자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그들이 지키는 성일과 모이는 성회를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여기신다. 피 묻은 손을 들어 드리는 기도를 아무리 간절하게 많이 드리더라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먼저 죄에서 돌아서서 깨끗해지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약자들을 선대하고 편들어줄 때에야 주님은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10~17절). 오늘 우리 공동체의 예배는 과연 어떨까?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자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마당만 밟고 떠나지는 않는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녀로 서지 못하는 것은 왜곡된 영성을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시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예배의 외형과 헌금의 물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를 종교적인 행위로 상쇄하려는 악한 마음과 행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도를 담은 종교적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잘못된 영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먼저 스스로 결단하여 악행을 버리고 실제로 선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패륜과 악행 그리고 잘못된 영성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악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속죄의 은혜에 대한 신뢰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사야 묵상이 시작되면서 공교롭게도 ‘제사가 역겹다, 기도를 듣지 않겠다, 너희들이 지키는 절기가 지겹다’하시는 하나님의 노함 앞에 직면했다. 하필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시기다. 소름이 끼친다! 지금 나에게, 우리들에게, 한국교회에게 외치시는 절규처럼 들려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두드리던 자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몇 번이고 멈추고 멈추는 자판 앞에 오늘 이 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새기기 위해 꾸역 꾸역 자판을 두드리고서야 묵상이 마무리되어 간다.
*지겹다!, 싫다!, 쓸모없다!, 역겹다!,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 싫다!, 짐만 된다!, 지쳤다!, 보지 않겠다!, 듣지 않겠다!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 나의 예배를 향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향해, 한국교회를 향해 쏟아진다.
*반면 그럼에도 한줄기 살아날 희망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짙고 짙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기에 가늘디 가는 한 줄기 빛이라도 강렬하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 무엇보다 나와 논증해보자! 그리고 깨닫게 되어 기꺼이 순종해보라!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너무 감사하다! 이미 말씀해 주신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논증해 가며 깨우치고 또 깨우치도록 도와주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구나! 기꺼이 깨달아 순종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청원도 해야 한다. 씻고, 버리고, 그치고, 배우고, 찾고, 돕고 변호하는 것도 물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다! 변론이 살아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를 위해 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더 하나님의 뜻과 말씀들이 실제가 되도록 깨우쳐 져야 한다. 그러면 “기꺼이 순종” 할 수 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말씀이 깨우쳐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는 거다! 지식담론을 논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깨우쳐지기를 바라며 깨우쳐 주신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변론(논증)하자”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 선명한 집중, 기꺼운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향방을 알지 못하고,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주문처럼 읊조리기만 하는 기도, 말씀구절이 아니라 영혼이 깨우쳐지고, 그 깨우쳐진 말씀에 “기꺼이 온 삶을 걸어” 순종함으로 하나님 살아계신 실제를 누리는 “참된 실제”, “참된 임마누엘”의 실제 은혜 말이다!
*이것이 살아날 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반역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자식이요 소와 나귀보다 못한 자들이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악의 백성이 됐다. 멀리해야 할 죄가 이스라엘의 본성과 성품의 중심에 주인처럼 자리잡고 말았다.
이사야는 이처럼 패륜적인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다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개와 순종으로써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을 명확히 알린다.
1.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하나님(1~3절)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어간까지, 어림잡아 40년 동안(학자에 따라 주전 740~686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에 따르면 50~60여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는 민족들의 신탁을 포함해 이사야에 수집된 모든 말씀은 그가 본 하나님의 계시(환상)이고, 그 내용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준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확실한 ‘하늘과 땅’을 불러 세우신다. 땅은 피 흘림과 황폐함을 초래한(7절)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경험한 증인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두 개의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고발하신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다. 이스라엘은 키워주고 돌봐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파렴치한 아들이다. 신 21:18~21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은 죽음에 처해진다.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행태는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의 패역과 같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다. 소나 나귀도 먹을 것을 주고 키워준 주인을 알아보고 따르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3절).
“내가 기르고 키운 자식이 나를 거역했다(2절)” “소,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3절)”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한탄이 베어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 만큼 낙심되는 상황은 드물 것이다. 가축들도 알아보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기가 막힐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심판 구형(4~17절)
4-9절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4절)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상태를 부연한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깨닫지 못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심판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뻔 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 하신다(9절).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며 등을 돌렸다(4절).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패역을 거듭하여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골병이 들었다(5절).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으나,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6절). 철저하게 “황폐해진 땅(7절)”이 되었고 도성은 오두막처럼 서 있다(8절).
이어서 10-17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상세하게 다루며 황폐해진 이유를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는 관심없고 종교적인 제의만 열심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너희들이 가져오는 제물 지겹다” “너희들이 바치는 피도 싫다” “나에게 보이러만 오는 것 다 쓸모없다!” “분향도 역겹다!” “절기 지키는 것, 참을 수 없다! 견딜 수 없다! 싫다!” “그런 것들은 나에게 짐만 된다! 나는 지쳤다!” “기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듣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덮고자 “더 많은 제물들”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을 직시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지 제물들의 피를 드림으로 자신들이 흘리게한 사람들의 피는 가증스럽게 외면했다. 그러니 기도하여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황폐함”이 온 땅에 드리웠다!
삶의 황폐함은 우연히,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죄악의 향기를 맡고 멀리서부터 살며시 엄습해 온다.
3. 그러나 살아날 길이 있다(18-20절)
불쑥 뒤덮은 황폐함이 결말일까? 결코 아니다. 살아날 길이 있다. 선택하면 된다. 이미 황폐함이 몰려 올 때 그 징조를 보여 주셨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새번역_9절)” 원두막 같이 남아있는 도성도 없어졌을 것이다. 또한 손에 가득한 피를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새번역_16-17절).”라고 명령하신다.
황폐함 속에 썩어질 심판이 결정된 백성이라면 굳이 이런 명령을 하실 이유가 없다. 살리시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고 죄악의 위선이 역겹고 견딜 수 없이 지쳤을 지라도 끝까지 심판이 아니라 살리시고 싶으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싶으신 것이다. 지금까지 역겹고 역겨운 죄악의 피내음 가득한 삶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라고 쉴새없이 촉구하신다. 그 쉼 없는 촉구속에 담긴 살아날 길이 있다.
그것은 변론과 순종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새번역_18절)” 변론은 직역하면 “결정하다, 판단하다, 입증하자, 꾸짖다, 징계하다”라는 의미들이 있다. 본문은 “논증해 보자!”라는 의미다.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는 제의들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하면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서로 논증해 보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말씀)을 매우 잘 알아야 ‘논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서로 논증하며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죄악의 꺼풀들을 벗겨낼 수 있다. 그래야 주홍같은 죄를 바라보고 발견하여 벗겨내고 눈과 같이 회복되는 길을 깨우칠 수 있다. 그래야 산다.
또, 순종하면 산다고 하신다. 그런데 순종도 그냥 순종이 아니다. “즐겨 순종하면” 이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새번역_19절).”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 역시 “기꺼이 혹은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매우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해박하고도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잘 알아야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 지식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잘 알고 있어야 기꺼이 순종하며 살 수 있다. 적어도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에서 “가장 좋은 소산”을 얻어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능력임을 알고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반면, 황폐함 속에 더 완전한 진멸로 빠질 길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거절)과 배반이다. 이 길은 그들이 경험했던(히스기야 시대,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칼의 춤사위에 던져 지는 것이다. 결코 물려지지 않을 칼춤이 벌어지는 길이 “거역과 배반”이다.
이 두 가지 길중에서 선택하라 하신다. 살아날 길과 칼춤이 벌어질 길 중에서 살아날 길을 제발 선택해다오! 이스라엘아! 라고 간절히 염원하시는듯 하다.
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이며 자식으로서(출 19:6) 언약의 특권을 남용하였다. 주인과 구유를 알아보는 고집 센 소와 나귀보다 못하게, 사랑으로 자식을 양육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말았다(1~4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등을 돌렸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새 언약의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내야 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드신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 없고 마음까지 멍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일 만큼 심각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큰 매를 부른 것이다. 토지가 황폐하고 성읍은 불타고 포도원에는 사람이 없고 무너진 망대만 황량하게 남을 것이다(5~8절). 혹시 지금 하나님께 사랑의 매를 맞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버지의 더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서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멈추고 돌아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성도가 돌이켜야 할 과오들이 있다. 먼저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를 잊고 주님의 법을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과오일 것이다. 그리고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내면에 뿌리박힌 죄의 성향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이다. 나는 어떤가? 곱씹고 곱씹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법을 떠난 자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그들이 지키는 성일과 모이는 성회를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여기신다. 피 묻은 손을 들어 드리는 기도를 아무리 간절하게 많이 드리더라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먼저 죄에서 돌아서서 깨끗해지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약자들을 선대하고 편들어줄 때에야 주님은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10~17절). 오늘 우리 공동체의 예배는 과연 어떨까?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자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마당만 밟고 떠나지는 않는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녀로 서지 못하는 것은 왜곡된 영성을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시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예배의 외형과 헌금의 물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를 종교적인 행위로 상쇄하려는 악한 마음과 행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도를 담은 종교적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잘못된 영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먼저 스스로 결단하여 악행을 버리고 실제로 선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패륜과 악행 그리고 잘못된 영성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악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속죄의 은혜에 대한 신뢰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사야 묵상이 시작되면서 공교롭게도 ‘제사가 역겹다, 기도를 듣지 않겠다, 너희들이 지키는 절기가 지겹다’하시는 하나님의 노함 앞에 직면했다. 하필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시기다. 소름이 끼친다! 지금 나에게, 우리들에게, 한국교회에게 외치시는 절규처럼 들려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두드리던 자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몇 번이고 멈추고 멈추는 자판 앞에 오늘 이 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새기기 위해 꾸역 꾸역 자판을 두드리고서야 묵상이 마무리되어 간다.
*지겹다!, 싫다!, 쓸모없다!, 역겹다!,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 싫다!, 짐만 된다!, 지쳤다!, 보지 않겠다!, 듣지 않겠다!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 나의 예배를 향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향해, 한국교회를 향해 쏟아진다.
*반면 그럼에도 한줄기 살아날 희망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짙고 짙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기에 가늘디 가는 한 줄기 빛이라도 강렬하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 무엇보다 나와 논증해보자! 그리고 깨닫게 되어 기꺼이 순종해보라!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너무 감사하다! 이미 말씀해 주신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논증해 가며 깨우치고 또 깨우치도록 도와주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구나! 기꺼이 깨달아 순종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청원도 해야 한다. 씻고, 버리고, 그치고, 배우고, 찾고, 돕고 변호하는 것도 물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다! 변론이 살아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를 위해 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더 하나님의 뜻과 말씀들이 실제가 되도록 깨우쳐 져야 한다. 그러면 “기꺼이 순종” 할 수 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말씀이 깨우쳐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는 거다! 지식담론을 논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깨우쳐지기를 바라며 깨우쳐 주신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변론(논증)하자”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 선명한 집중, 기꺼운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향방을 알지 못하고,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주문처럼 읊조리기만 하는 기도, 말씀구절이 아니라 영혼이 깨우쳐지고, 그 깨우쳐진 말씀에 “기꺼이 온 삶을 걸어” 순종함으로 하나님 살아계신 실제를 누리는 “참된 실제”, “참된 임마누엘”의 실제 은혜 말이다!
*이것이 살아날 길이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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