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목적과 첫 사사 옷니엘 [사사기 3:1-11]
 – 2026년 09월 06일
– 2026년 09월 06일 –
사사기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문은 왜 사사기에서도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1~6절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설명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남겨 두신 이방 민족의 명단과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소개한다. 7~11절은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의 업적을 소개한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 기도제목

*주님, 세상 속에 교회를 남겨 두신 목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말씀대로 살아가 보겠습니다. 영적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