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유구무언 _ 레위인과 첩의 타락과 공동체의 붕괴 [사사기 19:1-10]
 – 2026년 10월 07일
– 2026년 10월 07일 –
19장부터 21장까지는 기브아 거민들이 레위인의 첩에게 저지른 몹쓸 짓에서 비롯된 동족상잔과, 그로 인한 베냐민 지파의 붕괴를 다룬다. 18장에서 단 지파가 하나님만 섬기는 삶과 분배받은 땅을 스스로 버리고 고립을 선택한 모습,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붕괴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이 얼마나 급속히 무너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1절)”로 시작하는 본문은, 18장에서 모세의 손자로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 준 데 이어, 특히 당시 레위인들이 그 사명과 본분을 얼마나 잊어버렸는지를 가감 없이 고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이끄시고 모든 초태생에 대한 소유권을 말씀하셨다(민 3:13). 그런데 혈통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의 장자는 당연히 르우벤이 되어야 했지만, 그는 빌하와의 간통으로 인해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다(창 35:22, 49: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하게 하셨다(민 3:12). 그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의 직임을, 나머지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을 도와 거룩한 제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이는 제사를 준비하는 일, 성막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이 자리 잡은 실로와 함께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 전역의 48개 성읍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이 율법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며 돕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물과 십일조로 유지되도록 하셨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절)” 그런데 본문은 이 레위인이 어느 성읍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거류(게르)”는 “머무르다, 체류하다”라는 기본 의미가 있지만, 주로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이 레위인은 자기 가족이 있는 곳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치열한 분쟁이 여전한 가운데 스스로 산지로 숨어들었는지, 아니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레위인으로서 백성의 본이 되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첩’으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게쉬”인데, “지위는 낮지만 정식 아내”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아내인지, 그 이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첩을 얻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레위인이 ‘첩’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가 거룩함으로 구별된 삶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넉 달 동안 지냈다(2절).” 개역개정이 “행음”으로 번역한 단어 “자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 창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를 내다, 싫어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다정하게 말하여 데려오고자 하여(3절)’라는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편 전통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첩의 행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이런 첩에게 가서 “다정히 데려오고자(3절)” 했다는 것은 레위인 또한 어느 정도 첩의 행음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찌 되었든, 레위인의 구별되지 못한 삶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살아야 할 이 레위인은 웬일인지 에브라임 산지, 그것도 구석에 “거류”하고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는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미가의 제사장이었다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도 “거류”할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미가의 집에 채용되었고, 이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착하라고 주신 성읍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성읍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다.

*산지 구석에서 행음을 했다면 이미 지역 사회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이런 행음을 즐겼다면, 이는 그의 삶이 레위인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변질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냈다. 죄가 관영할수록 죄에 대한 마음은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대담하게 죄의 유혹을 즐기기 마련이다. 이는 산지 구석 공동체의 삶도 결코 거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나는?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는 신앙과 윤리가 실종된 이스라엘의 민낯을 보여 준다(1절). 첩을 취하는 것은 단지 성적 타락일 뿐 아니라, 당시 ‘부와 지위(8:31)’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언약 규정에 깨어 있어야 할 지도자가 안일과 방종에 묻혀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시대의 절망을 엿볼 수 있다.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가 있는 여인의 마음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오려고 길을 떠났다(1~3절). 첩의 마음을 되돌리려 조바심 내는 것도 문제지만, 행음하고 떠난 첩을 다시 데려오는 레위인의 태도는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최소한의 분별력조차 상실한 불순종이기 때문이다(레 21:7~9). 하나님의 요구보다 자신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을 떠나 소욕을 따라 살고, 의로운 판단 대신 부정한 감정에 매여 있다면 이미 분별력을 잃은 것이다. 내 선택과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의 기준을 낮추려 하기보다 나의 완악한 마음을 분별하고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당시 첩을 두는 것은 아내가 불임인 경우 암묵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이 레위인은 성적 만족을 위해 첩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첩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서,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 넉 달이나 소식을 끊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보아 이 레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 시대의 전형이 아닐까?

-첩의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장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4절). 이런 환대는 딸의 허물을 물질적 보상으로 무마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장인의 음흉한 동기를 모르는지 레위인은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사흘을 보낸다. 기독교가 세상의 환영을 받는 것은 감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서로 다른 왕을 섬기고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 세상이 호의와 환대를 보일 때는 그 의도가 불순할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주는 거짓의 잔에 취해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나친 접대에는 반드시 부당한 요구가 따르기 마련이다.

-장인은 딸을 데리러 온 사위를 극진히 환대했다. 그 환대는 무려 5일 동안 이어졌다(5~10절). 이 과정에서 레위인에게서는 단호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장인의 강권을 물리치지 못해 체류를 늘려 갔다.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레위인의 사명보다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장인의 말에 더 마음을 주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이 오늘날 나와 같은 목사의 모습은 아닐까?

-여지를 주는 순간 세상은 신앙의 발목을 잡는다. 의지를 굽히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주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타락과 방종, 무지와 무감각의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명의 삶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레위인은 다섯째 날이 되어도 보내 주지 않을 기세인 장인의 무리한 환대를 마침내 거절하고, 오후가 되었는데도 무리하여 출발한다. 이 시간에 출발하면 날이 밝을 때 에브라임에 도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출발한 것이다.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배경이 에브라임 산지이다. 또 주인공이 레위 사람이고, 베들레헴과도 연관이 있다. 모세의 손자 요나단은 베들레헴에 살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 또 모두 범죄와 관련이 있는데, 요나단은 “우상 숭배”, 이 레위인은 “음행”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에브라임 산지는 가나안 땅의 중심부이다. 이 사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맡은 레위 지파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모두 레위인 본연의 삶과 상관없는 데서 출발했다. 배치받은 곳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즐기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본문에서 주목해 볼 레위인의 모습은 “우유부단함”이다. 행음하고 처가로 피신한 첩을 데려오려고, 첩이 떠난 지 넉 달 만에야 베들레헴으로 내려간 일이 그렇다. 또 장인과 나흘이 넘도록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아침에는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오후까지 즐기다가 다시 미루는 일이 무려 4일 동안 반복되었다. 5일째에도 역시 아침에 출발하려다 미루었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굳이 출발했다. 첩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 것이다. 사사 시대의 핵심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 길에서 돌아서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기브아의 밤”을 만난다.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금 누리는 재미에 마음이 붙잡혀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마음의 외침에도 돌이키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다. 애초에 무너진 거룩의 삶도 문제지만, 박차고 일어날 때를 미루고 미루면 결국 기브아의 비극적인 밤이 엄습한다. 이것이 사사 시대이다.

*레위인의 모습에 “유구무언”이다. 이 참담한 모습에 도무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추악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써 갈 때, 세상은 그런 공동체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기도제목

*주님, 미루고 미루다 당할 비극이 저에게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영적 결단을 신속하게 하겠습니다.
*주님, 레위인의 무너진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꼭 반면교사로 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