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브아의 비극과 노인과 레위인의 잔혹함 [사사기 19:22-30]
 – 2026년 10월 09일
– 2026년 10월 09일 –
17-19장은 왕이 없던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난 비극적 일화를 연이어 소개한다. 17-18장이 제사장의 사유화, 곧 생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제사장의 영적 탈선을 고발했다면, 19장은 레위인 제사장의 도덕적 탈선과 잔혹함을 고발한다. 레위인의 도덕적 탈선은 19장 초반부에서 다루었고, 본문은 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던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친다. 입에 담기조차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인이 이방인의 성읍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 수준뿐 아니라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는 흔히 무엇에도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멋대로 사는 자들, 곧 무가치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하신 ‘동성 간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이다. 이들의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의 ‘그 성읍의 불량배들’은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된 ‘사람’은 ‘이쉬’의 복수형인 ‘안셰’인데, 이 단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뜻하는 ‘에노쉬’와 같은 어근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은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방탕한 무리인지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멋대로’ 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들)가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 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를 먼저 점잖게 타이른다(23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인다. 레위인 대신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는 것이다.

레위인은 한술 더 뜬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25절), 첩을 강제로 불량배들에게 넘겨 버린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하다가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멈춘다.

노인과 레위인은 모두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 했고, 레위인은 실제로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당시 세계관에 따라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고 치더라도, 자기가 살겠다고 첩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낸 레위인의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레위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아온 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와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마저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 왜곡된 ‘환대법’에는 생명 존중도, 여성의 인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예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3. 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지만, 분노는 더욱 끓어오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낸 가련한 여인은, 강제로 “붙잡혀 끌려나간” 그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에야 풀려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 앞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는 동안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했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 준 첩에 대한 걱정을 찾아볼 수 없다. 첩을 내어 주고 확보한 안전 속에서 그가 편히 자는 동안, 그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이르러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고 증언한다(26절).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던 레위인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보고도 너무나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한다(28절). 그리고 그녀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로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로 끝날 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70인역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개역개정도 이 해석을 따라 ‘시체’로 번역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이 겪은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 둔다.

더구나 29절에서 “거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하자크)는 25절에서 첩을 “붙잡아”로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밤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쳐진 채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편에게 붙들려 그의 손에 능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원문을 따라 읽으면, 레위인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해 탈진한 그녀를 죽이고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에 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지난밤 당한 불명예를 복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레위인이 원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에 대한 복수였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인을 요구한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에 불과했다. 레위인은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폭행’을 당한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그곳은 소돔과 다를 바 없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12절), 그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23-24절). 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을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마저 그 성읍의 가치관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았다. 기브아 사건이 보여 주는 실태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노인의 시각과 태도도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비류들의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딸과 아내가 이 노인에게는 남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희생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나 양상만 다를 뿐, 불량배나 노인 모두 강자의 횡포와 갑질을 정당화하는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인은 강제로 자신의 첩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기브아의 비류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폭행했고, 그녀는 간신히 집까지 이르렀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지방에 손을 걸친 채 쓰러진다.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인다.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25-28절). 비겁하고 비정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 그가 속한 땅이 정결해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도리어 이 참극의 방관자이자 주범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이다.

-레위인은 첩의 몸을 쪼개(삼상 11:7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린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이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몰두해 행동하는 레위인의 비열한 모습이 충격적이다. 그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니 비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양만 다를 뿐 무수한 예가 이미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자기 본능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땅이 아니라,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찾아온 이가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었기에 이 잔악한 일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기브아를 찾은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일이었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악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과 레위인, 불량배들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악했다. 레위인의 첩이 비극적으로 죽은 책임은 불량배들에게만 있지 않다. 노인과 레위인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할 때 그 책임을 불량배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노인은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마저 서슴없이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다.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몸을 열두 덩이로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도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가련한 여인의 몸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 철저히 짓밟히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과 명분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악인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참담한 마음에 입술을 깨뭅니다. 제가 이런 삶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시오.
*주님, 노인과 레위인,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다 한통속입니다. 혹시 제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척하지만 세상의 악인들과 다를 바 없지는 않습니까? 깨닫게 하셔서 그 길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