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악순환 [사사기 21:1-12]
 – 2026년 10월 13일
– 2026년 10월 13일 –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결정한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이미 크게 맹세해 두었다(5절). 그들은 기브아 사람들의 악을 처벌하는 데 무관심했고 총회의 소집을 무시한 자들이라는 이유였다. 또 하나, 그들은 같은 미스바 총회에서 ‘누구도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엄숙히 맹세했었다(1절). 전쟁을 앞두고 분노 속에 쏟아 놓은 이 두 맹세가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분노가 잦아들고 난 뒤에야 이스라엘 총회에 뉘우침이 일어났다(6절). 어쩌면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와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3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원망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들은 림몬 바위에 피해 있는 베냐민 사람 6백 명을 통해 지파를 다시 세워야 했다(6-7절). 훗날 그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다시 형제로 받아들이지만(13절), 문제는 이들 6백 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2절). 기가 막히게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딸은 줄 수 없으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성읍을 전멸시키고 처녀만 남겨 두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의 악순환”만 남을 뿐이다.

*성급하게,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멸절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전쟁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다. 두 번째 패배 후 그들은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자리에서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는 물음을 하나님께 다시 올려 드려 승리의 약속을 받았다(20:26-28). 이번에도 같은 벧엘에서 울고 같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2-4절).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는 원망만 있을 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없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인” 행위는 잘했지만, 정작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패배의 자리에서 잠시 회복되었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승리 후에는 다시 형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만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고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은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의 만행을 응징하는 데 성공하지만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다. 과도한 징벌로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한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것 때문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다(1, 7절). 그들의 과도한 징벌과 경솔한 맹세가 한 지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부주의하고 사려 깊지 못한 약속이나 맹세는 때로 후회의 단초가 되고, 나와 공동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20:26) 벧엘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한다. 원망 섞인 그들의 비통한 항의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화목제에도 여전히 침묵하신다(2~4절). 20장 28절에서 분명히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침묵하신다. 이는 ‘침묵’으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진실한 참회와 순종 없이 종교적 의식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곤경을 모면할 때만 필요한 편의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시고, 이용당하지도 않으신다.

-명령하지도 않은 진멸을 묻지도 않은 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면서도,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비열함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고 다음 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정작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울지 않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했다. 그저 번제라는 형식에 기댄 채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몰락을 막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다가 또 하나의 맹세를 기억해 낸다. 그것은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리라는 맹세였다(5~9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맹세는 글자 그대로 지키는 척하며 피해 갈 길을 찾고, ‘유리한’ 맹세는 서둘러 실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이 찾은 방책은 또 한 번의 잔인한 살상을 예고한다. 전쟁을 앞두고 결의한 두 번의 성급한 맹세는, 소중한 딸을 잃은 입다의 뼈아픈 서원(11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기들의 과오를 더 큰 과오로 해결하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한다. 12,000명의 용사를 보내 젊은 처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살육한다(10~12절). 명분을 위해 동족을 살상하는 이 잔혹한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방식이 아니었다. 철저히 가나안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신념에 함몰된 데서 오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오만이었다.

-이 잔혹한 행동에 앞서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되었다.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서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 살아남은 처녀의 수를 세어 보니 400명뿐이었다. 200명이 여전히 부족했다(14절).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했지만, 죄만 쌓고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열심은 전무하고, 오직 자기 뜻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의 열매였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이 악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길르앗 야베스 성읍에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정의로운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들이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교만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십자가를 담담히 감당하는 것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반복되는 죄악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 기도제목

*주님, 폭력이 폭력을 낳았음에도 당연하게 이를 결정합니다. 나의 소견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나의 소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구하겠습니다.
*주님, 무지와 무식과 무도함이 판치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주님 뜻에 더욱 순종하겠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겠습니다. 늘 지혜롭게 행하기를 생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