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어미는 룻을 보아스와 결혼 시키려고 한다.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의 헤세드(선대)를 바라 본 나오미는 그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가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보아스에게 이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도전을 시작했다.
*텅 빈 마음에 희망이 밀려 들어오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보아스의 선대가 가져 온 변화였다. 나오미는 추수 기간의 끝자락, 그동안 룻에게 보인 선의와 선대를 통해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계대 결혼을 통해 감당할 것을 촉구하는 행동을 준비한 것이다.
*”기업 무를 자(고엘)”은 친족의 재산을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책임이 있고, 가난 때문에 몸이 팔린 친족을 속량하는 책임도 있으며, 피의 복수자 역할을 한다. 또한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가까운 형제 순으로 그 과부 형수나 재수와 계대 결혼을 통해 죽은 이의 이름을 이어주게 하는 책임이 있었다.
1.룻의 청혼(1-9절)
나오미는 룻에게 구체적으로 청혼할 준비를 시켰다(3-4절).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전적으로 순종 한다(5절).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룻은 보아스에게 그가 기업 무를 자이기에 그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9절). 원래 기업 무르는 것은 결혼과 관련은 없다. 이것은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사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이 상속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그 땅은 일차적으로 아들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는 딸에게 상속 되었다. 나오미는 자녀가 살아있지 못했기에 보아스가 땅을 되사주어도 받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가 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룻과 보아스가 계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대를 이어 상속을 받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아이의 양육자로서 땅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오미의 텅 빈 마음에 희망이 차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오미의 가르침대로 룻은 타작마당에 숨어든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룻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는(3절)’ 행동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정성껏 준비하여 타작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다 먹고 마실 때까지 눈에 띄지 말라 한다. 밤중의 타작 마당은 매우 위험한 공간일 수도 있다. 밤 시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시간대였다. 위험을 감수 하고서 라도 룻은 나오미가 가르친 대로 보아스에게 나아간다.
*이렇게 까지 비정상적으로 결혼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나이가 많은 보아스와 모압 여인 이방인 과부 룻은 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룻과 결혼할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이 위험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미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가 룻과 자신에게 베푼 선대(인애_헤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선하게 반응할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룻은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오미의 말대로 크나 큰 도전을 순종 한다. 보아스는 이미 룻이 엘레멜렉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도전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이 쓰러지고 텅 빈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채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선대를 기초로 그가 고엘의 의무를 저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 한 에바를 주워 올 때부터 마음에 그런 희망이 올라왔다. 하지만 희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저 기대와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곤란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담한 순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나오미와 룻, 이 가련한 과부들을 통해 이를 도전한다.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 하) 개역 개정은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라고 번역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번역을 직역하면 “당신의 날개를 당신의 여종 위에 펼치소서”이다. “날개(키나프)”는 보아스가 2:12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얻기를’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 된다. 룻은 그 보아스의 말을 기억하고 보아스에게 “그 하나님의 날개 아래”를 “보아스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룻은 참 지혜롭기도 하다.
*특히 “날개를 덮다”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결혼을 의미하기도 한다(겔 16:8; 신 22:30, 27:20). 룻은 그가 기업을 무를 자이기에 결혼을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아스와 결혼하면 그가 나오미의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 재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2.보아스의 응답(10-13절)
보아스는 그런 룻의 행동에 감동한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새번역_10절)” 개역 개정은 “….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뒷 부분을 번역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보고 그녀의 인애(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라며 감동한 것이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이 이렇게 청혼한 것이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인애(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이제까지 보여준 것”과 “더욱 더 값진(인애)”는 무엇을 가리킬까?
*”이제까지 보여준 인애(헤세드_처음 베푼 인애)”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워 나오미를 돌본 것을 가리킨다. 이비 보아스는 이런 룻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축복했다(2:11-12). 그리고 “더욱 더 값진(인애)”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젊은이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보아스와 결혼하기로 기꺼이 결심한 것을 가리킨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새번역_10절 상)”
*보아스는 본성을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위해 희생하는 룻의 심성을 매우 인상 깊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새번역_11절)”
*보아스는 룻의 이런 과감한 행동이 나오미를 위한 것임을 너무도 잘 이해 했기에 “정숙한 여인(현숙한 여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할 수 있는 룻을 안심 시켰다. 그리고 대범하게 룻의 청혼을 수용한다. 하지만 먼저 말씀의 이치를 따라 기업을 무를 의무를 먼저 가지는 이가 있기에 그가 거부하면 기꺼이 맡겠다고 수락한다(13절)
*”현숙한 여인(정숙한 여인)”은 성경에서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여인을 가리킨다(잠 31:10-31절). 룻은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 인성과 성품이 이처럼 “현숙”했다.
*보아스… 사사시대에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있었구나! 자신에게 분명한 손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원칙과 절차를 지키려는 모습 하며, 여인을 존중하며 보호하여 주는 모습 하며, 굳이 담당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려 온 여인을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모습이라니….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이런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나는?
-나오미의 마음이 희망과 기대로 가득하다! 룻을 위하여 보아스와 결혼 시키려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희망은 삶에 생기를 가져온다. 보아스의 선한 행동을 보았을 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기에 고엘의 의무를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하여 담대 하게 감당하며 나아가기 위해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룻은 나오미의 마음과 뜻을 따라 기꺼이 이 도전을 감당한다. 자신의 생명과 인식을 걸고 도전한다. 믿음의 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단과 도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룻은 현숙한 여인(11절)이었다. 보아스는 그녀의 나오미를 위한 인애(헤세드)를 잘 알고 있었다(2:11). 그런데 아직은 젊었음에도 자신의 욕망대로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지키고 죽은 남편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인애(헤세드)에 다시 감동 받은 것이었다(10절). 이런 여인이라니…
-보아스는 룻의 이런 성품을 본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젊음과 외모가 아니라 수치와 위험을 무릎쓰고이삭줍기를 통해 나오미를 책임지는 모습과 자칫 ‘음란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타작 마당에서의 청혼을 나오미를 위해,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기 위해 무릎 쓴 그 마음과 자세, 태도를 바라 본 것이다. 이미 이삭을 줍고있는 모습에서 이런 룻의 인애(헤세드)를 보았던 보아스는 깊은 밤중 타작마당 한켠에서 다시 이 모습을 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을까!
-그럼에도 자신보다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한밤의 로맨스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룻을 보호해 주며 약속한다.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여(13절)” 룻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고엘 제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는 당시로서는 좋은 사회보장 제도의 형태였지만, 자기 희생, 자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헌신을 전제로 한 제도였다. 그래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이들이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5:9-10).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자기 헌신, 자기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역이 있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 가치로 얻고 누리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삶이다. 이 땅에서의 손해가 아까우면 결코 살아낼 수 없는 삶일 것이다.
*오늘날 고엘의 의무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만드신 의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공동체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슬픔을 나눠 지라는 의미다. 기쁨도 함께 하라는 의미다.
*한편 나오미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어떤 마음 때문일까? 1절은 젊은 룻에게 이방 땅에서 “안식할 곳”을 구해 주려는 마음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베들레헴에 돌아 올때 나오미의 마음에 “고엘”의 의무를 요청할 이들이 누구인지 몰랐을까?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염치가 없었다. 희락의 여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마라(쓴디 쓴) 라고 스스로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비루해 졌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에다가 자기 가족들이 모압으로 떠나기 전까지도 도움을 베풀던 인자한 어른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손을 벌리면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미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룻이 한 가득 보리를 가지고 들어온 날, 룻에게서 보아스에게 선대 받은 일을 들은 그 날, 나오미는 알아차렸다. 과부 둘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바로 “기업을 무를 자”였다. 룻에게 보아스에 대하여 그제서야 털어 놓는다. “그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다(2:20).”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4월부터 6월까지 보아스에게서 계속 선대를 받자 나오미는 확신하게 된다.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긍휼의 제도를 기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은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녀를 “복 되게”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임을 담대하게 이행하기로 결심했다.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고 “텅 빈” 마음 때문에 무력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민감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어떻게 거해야 할 지를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런 삶의 연륜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들자 주저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고엘의 의무를 보아스에게 확인하는 대담한 행동을 룻에게 명했다.
*말씀으로 약속한 하나님의 희망을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순종이다.
**주님, 말씀에서 약속한 희망이 믿음의 순종을 통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순종 하겠습니다.
**주님, 나오미나, 룻이나, 보아스나.. 사사시대에 어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을까요? 오늘날 내가, 우리 교회가 이런 믿음의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희망이 현실이 되어 간다!… 과감한 도전과 순종 [룻기 3:1-13]
– 2022년 05월 05일
– 2022년 05월 05일 –
나어미는 룻을 보아스와 결혼 시키려고 한다.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의 헤세드(선대)를 바라 본 나오미는 그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가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보아스에게 이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도전을 시작했다. *텅 빈 마음에 희망이 밀려 들어오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보아스의 선대가 가져 온 변화였다. 나오미는 추수 기간의 끝자락, 그동안 룻에게 보인 선의와 선대를 통해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계대 결혼을 통해 감당할 것을 촉구하는 행동을 준비한 것이다. *”기업 무를 자(고엘)”은 친족의 재산을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책임이 있고, 가난 때문에 몸이 팔린 친족을 속량하는 책임도 있으며, 피의 복수자 역할을 한다. 또한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가까운 형제 순으로 그 과부 형수나 재수와 계대 결혼을 통해 죽은 이의 이름을 이어주게 하는 책임이 있었다.
1.룻의 청혼(1-9절)나오미는 룻에게 구체적으로 청혼할 준비를 시켰다(3-4절).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전적으로 순종 한다(5절).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룻은 보아스에게 그가 기업 무를 자이기에 그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9절). 원래 기업 무르는 것은 결혼과 관련은 없다. 이것은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사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이 상속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그 땅은 일차적으로 아들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는 딸에게 상속 되었다. 나오미는 자녀가 살아있지 못했기에 보아스가 땅을 되사주어도 받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가 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룻과 보아스가 계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대를 이어 상속을 받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아이의 양육자로서 땅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오미의 텅 빈 마음에 희망이 차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오미의 가르침대로 룻은 타작마당에 숨어든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룻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는(3절)’ 행동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정성껏 준비하여 타작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다 먹고 마실 때까지 눈에 띄지 말라 한다. 밤중의 타작 마당은 매우 위험한 공간일 수도 있다. 밤 시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시간대였다. 위험을 감수 하고서 라도 룻은 나오미가 가르친 대로 보아스에게 나아간다. *이렇게 까지 비정상적으로 결혼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나이가 많은 보아스와 모압 여인 이방인 과부 룻은 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룻과 결혼할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이 위험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미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가 룻과 자신에게 베푼 선대(인애_헤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선하게 반응할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룻은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오미의 말대로 크나 큰 도전을 순종 한다. 보아스는 이미 룻이 엘레멜렉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도전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이 쓰러지고 텅 빈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채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선대를 기초로 그가 고엘의 의무를 저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 한 에바를 주워 올 때부터 마음에 그런 희망이 올라왔다. 하지만 희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저 기대와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곤란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담한 순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나오미와 룻, 이 가련한 과부들을 통해 이를 도전한다.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 하) 개역 개정은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라고 번역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번역을 직역하면 “당신의 날개를 당신의 여종 위에 펼치소서”이다. “날개(키나프)”는 보아스가 2:12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얻기를’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 된다. 룻은 그 보아스의 말을 기억하고 보아스에게 “그 하나님의 날개 아래”를 “보아스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룻은 참 지혜롭기도 하다. *특히 “날개를 덮다”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결혼을 의미하기도 한다(겔 16:8; 신 22:30, 27:20). 룻은 그가 기업을 무를 자이기에 결혼을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아스와 결혼하면 그가 나오미의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 재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2.보아스의 응답(10-13절)보아스는 그런 룻의 행동에 감동한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새번역_10절)” 개역 개정은 “….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뒷 부분을 번역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보고 그녀의 인애(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라며 감동한 것이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이 이렇게 청혼한 것이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인애(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이제까지 보여준 것”과 “더욱 더 값진(인애)”는 무엇을 가리킬까? *”이제까지 보여준 인애(헤세드_처음 베푼 인애)”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워 나오미를 돌본 것을 가리킨다. 이비 보아스는 이런 룻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축복했다(2:11-12). 그리고 “더욱 더 값진(인애)”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젊은이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보아스와 결혼하기로 기꺼이 결심한 것을 가리킨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새번역_10절 상)”*보아스는 본성을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위해 희생하는 룻의 심성을 매우 인상 깊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새번역_11절)” *보아스는 룻의 이런 과감한 행동이 나오미를 위한 것임을 너무도 잘 이해 했기에 “정숙한 여인(현숙한 여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할 수 있는 룻을 안심 시켰다. 그리고 대범하게 룻의 청혼을 수용한다. 하지만 먼저 말씀의 이치를 따라 기업을 무를 의무를 먼저 가지는 이가 있기에 그가 거부하면 기꺼이 맡겠다고 수락한다(13절) *”현숙한 여인(정숙한 여인)”은 성경에서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여인을 가리킨다(잠 31:10-31절). 룻은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 인성과 성품이 이처럼 “현숙”했다. *보아스… 사사시대에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있었구나! 자신에게 분명한 손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원칙과 절차를 지키려는 모습 하며, 여인을 존중하며 보호하여 주는 모습 하며, 굳이 담당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려 온 여인을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모습이라니….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이런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나는?-나오미의 마음이 희망과 기대로 가득하다! 룻을 위하여 보아스와 결혼 시키려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희망은 삶에 생기를 가져온다. 보아스의 선한 행동을 보았을 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기에 고엘의 의무를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하여 담대 하게 감당하며 나아가기 위해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룻은 나오미의 마음과 뜻을 따라 기꺼이 이 도전을 감당한다. 자신의 생명과 인식을 걸고 도전한다. 믿음의 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단과 도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룻은 현숙한 여인(11절)이었다. 보아스는 그녀의 나오미를 위한 인애(헤세드)를 잘 알고 있었다(2:11). 그런데 아직은 젊었음에도 자신의 욕망대로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지키고 죽은 남편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인애(헤세드)에 다시 감동 받은 것이었다(10절). 이런 여인이라니…-보아스는 룻의 이런 성품을 본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젊음과 외모가 아니라 수치와 위험을 무릎쓰고이삭줍기를 통해 나오미를 책임지는 모습과 자칫 ‘음란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타작 마당에서의 청혼을 나오미를 위해,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기 위해 무릎 쓴 그 마음과 자세, 태도를 바라 본 것이다. 이미 이삭을 줍고있는 모습에서 이런 룻의 인애(헤세드)를 보았던 보아스는 깊은 밤중 타작마당 한켠에서 다시 이 모습을 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을까!-그럼에도 자신보다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한밤의 로맨스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룻을 보호해 주며 약속한다.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여(13절)” 룻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고엘 제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는 당시로서는 좋은 사회보장 제도의 형태였지만, 자기 희생, 자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헌신을 전제로 한 제도였다. 그래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이들이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5:9-10).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자기 헌신, 자기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역이 있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 가치로 얻고 누리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삶이다. 이 땅에서의 손해가 아까우면 결코 살아낼 수 없는 삶일 것이다. *오늘날 고엘의 의무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만드신 의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공동체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슬픔을 나눠 지라는 의미다. 기쁨도 함께 하라는 의미다. *한편 나오미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어떤 마음 때문일까? 1절은 젊은 룻에게 이방 땅에서 “안식할 곳”을 구해 주려는 마음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베들레헴에 돌아 올때 나오미의 마음에 “고엘”의 의무를 요청할 이들이 누구인지 몰랐을까?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염치가 없었다. 희락의 여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마라(쓴디 쓴) 라고 스스로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비루해 졌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에다가 자기 가족들이 모압으로 떠나기 전까지도 도움을 베풀던 인자한 어른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손을 벌리면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미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룻이 한 가득 보리를 가지고 들어온 날, 룻에게서 보아스에게 선대 받은 일을 들은 그 날, 나오미는 알아차렸다. 과부 둘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바로 “기업을 무를 자”였다. 룻에게 보아스에 대하여 그제서야 털어 놓는다. “그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다(2:20).”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4월부터 6월까지 보아스에게서 계속 선대를 받자 나오미는 확신하게 된다.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긍휼의 제도를 기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은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녀를 “복 되게”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임을 담대하게 이행하기로 결심했다.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고 “텅 빈” 마음 때문에 무력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민감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어떻게 거해야 할 지를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런 삶의 연륜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들자 주저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고엘의 의무를 보아스에게 확인하는 대담한 행동을 룻에게 명했다. *말씀으로 약속한 하나님의 희망을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순종이다.
1.룻의 청혼(1-9절)나오미는 룻에게 구체적으로 청혼할 준비를 시켰다(3-4절).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전적으로 순종 한다(5절).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룻은 보아스에게 그가 기업 무를 자이기에 그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9절). 원래 기업 무르는 것은 결혼과 관련은 없다. 이것은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사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이 상속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그 땅은 일차적으로 아들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는 딸에게 상속 되었다. 나오미는 자녀가 살아있지 못했기에 보아스가 땅을 되사주어도 받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가 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룻과 보아스가 계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대를 이어 상속을 받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아이의 양육자로서 땅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오미의 텅 빈 마음에 희망이 차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오미의 가르침대로 룻은 타작마당에 숨어든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룻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는(3절)’ 행동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정성껏 준비하여 타작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다 먹고 마실 때까지 눈에 띄지 말라 한다. 밤중의 타작 마당은 매우 위험한 공간일 수도 있다. 밤 시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시간대였다. 위험을 감수 하고서 라도 룻은 나오미가 가르친 대로 보아스에게 나아간다. *이렇게 까지 비정상적으로 결혼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나이가 많은 보아스와 모압 여인 이방인 과부 룻은 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룻과 결혼할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이 위험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미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가 룻과 자신에게 베푼 선대(인애_헤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선하게 반응할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룻은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오미의 말대로 크나 큰 도전을 순종 한다. 보아스는 이미 룻이 엘레멜렉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도전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이 쓰러지고 텅 빈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채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선대를 기초로 그가 고엘의 의무를 저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 한 에바를 주워 올 때부터 마음에 그런 희망이 올라왔다. 하지만 희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저 기대와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곤란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담한 순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나오미와 룻, 이 가련한 과부들을 통해 이를 도전한다.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 하) 개역 개정은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라고 번역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번역을 직역하면 “당신의 날개를 당신의 여종 위에 펼치소서”이다. “날개(키나프)”는 보아스가 2:12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얻기를’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 된다. 룻은 그 보아스의 말을 기억하고 보아스에게 “그 하나님의 날개 아래”를 “보아스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룻은 참 지혜롭기도 하다. *특히 “날개를 덮다”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결혼을 의미하기도 한다(겔 16:8; 신 22:30, 27:20). 룻은 그가 기업을 무를 자이기에 결혼을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아스와 결혼하면 그가 나오미의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 재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2.보아스의 응답(10-13절)보아스는 그런 룻의 행동에 감동한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새번역_10절)” 개역 개정은 “….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뒷 부분을 번역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보고 그녀의 인애(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라며 감동한 것이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이 이렇게 청혼한 것이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인애(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이제까지 보여준 것”과 “더욱 더 값진(인애)”는 무엇을 가리킬까? *”이제까지 보여준 인애(헤세드_처음 베푼 인애)”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워 나오미를 돌본 것을 가리킨다. 이비 보아스는 이런 룻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축복했다(2:11-12). 그리고 “더욱 더 값진(인애)”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젊은이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보아스와 결혼하기로 기꺼이 결심한 것을 가리킨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새번역_10절 상)”*보아스는 본성을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위해 희생하는 룻의 심성을 매우 인상 깊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새번역_11절)” *보아스는 룻의 이런 과감한 행동이 나오미를 위한 것임을 너무도 잘 이해 했기에 “정숙한 여인(현숙한 여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할 수 있는 룻을 안심 시켰다. 그리고 대범하게 룻의 청혼을 수용한다. 하지만 먼저 말씀의 이치를 따라 기업을 무를 의무를 먼저 가지는 이가 있기에 그가 거부하면 기꺼이 맡겠다고 수락한다(13절) *”현숙한 여인(정숙한 여인)”은 성경에서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여인을 가리킨다(잠 31:10-31절). 룻은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 인성과 성품이 이처럼 “현숙”했다. *보아스… 사사시대에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있었구나! 자신에게 분명한 손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원칙과 절차를 지키려는 모습 하며, 여인을 존중하며 보호하여 주는 모습 하며, 굳이 담당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려 온 여인을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모습이라니….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이런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나는?-나오미의 마음이 희망과 기대로 가득하다! 룻을 위하여 보아스와 결혼 시키려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희망은 삶에 생기를 가져온다. 보아스의 선한 행동을 보았을 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기에 고엘의 의무를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하여 담대 하게 감당하며 나아가기 위해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룻은 나오미의 마음과 뜻을 따라 기꺼이 이 도전을 감당한다. 자신의 생명과 인식을 걸고 도전한다. 믿음의 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단과 도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룻은 현숙한 여인(11절)이었다. 보아스는 그녀의 나오미를 위한 인애(헤세드)를 잘 알고 있었다(2:11). 그런데 아직은 젊었음에도 자신의 욕망대로 따르지 않고 나오미를 지키고 죽은 남편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인애(헤세드)에 다시 감동 받은 것이었다(10절). 이런 여인이라니…-보아스는 룻의 이런 성품을 본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젊음과 외모가 아니라 수치와 위험을 무릎쓰고이삭줍기를 통해 나오미를 책임지는 모습과 자칫 ‘음란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타작 마당에서의 청혼을 나오미를 위해,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기 위해 무릎 쓴 그 마음과 자세, 태도를 바라 본 것이다. 이미 이삭을 줍고있는 모습에서 이런 룻의 인애(헤세드)를 보았던 보아스는 깊은 밤중 타작마당 한켠에서 다시 이 모습을 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을까!-그럼에도 자신보다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한밤의 로맨스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룻을 보호해 주며 약속한다.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여(13절)” 룻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고엘 제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는 당시로서는 좋은 사회보장 제도의 형태였지만, 자기 희생, 자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헌신을 전제로 한 제도였다. 그래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 의무를 저버리는 이들이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5:9-10).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자기 헌신, 자기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역이 있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 가치로 얻고 누리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삶이다. 이 땅에서의 손해가 아까우면 결코 살아낼 수 없는 삶일 것이다. *오늘날 고엘의 의무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만드신 의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공동체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슬픔을 나눠 지라는 의미다. 기쁨도 함께 하라는 의미다. *한편 나오미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어떤 마음 때문일까? 1절은 젊은 룻에게 이방 땅에서 “안식할 곳”을 구해 주려는 마음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베들레헴에 돌아 올때 나오미의 마음에 “고엘”의 의무를 요청할 이들이 누구인지 몰랐을까?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염치가 없었다. 희락의 여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마라(쓴디 쓴) 라고 스스로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비루해 졌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에다가 자기 가족들이 모압으로 떠나기 전까지도 도움을 베풀던 인자한 어른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손을 벌리면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미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룻이 한 가득 보리를 가지고 들어온 날, 룻에게서 보아스에게 선대 받은 일을 들은 그 날, 나오미는 알아차렸다. 과부 둘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바로 “기업을 무를 자”였다. 룻에게 보아스에 대하여 그제서야 털어 놓는다. “그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다(2:20).”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4월부터 6월까지 보아스에게서 계속 선대를 받자 나오미는 확신하게 된다.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긍휼의 제도를 기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은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녀를 “복 되게”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임을 담대하게 이행하기로 결심했다.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고 “텅 빈” 마음 때문에 무력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민감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어떻게 거해야 할 지를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런 삶의 연륜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들자 주저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고엘의 의무를 보아스에게 확인하는 대담한 행동을 룻에게 명했다. *말씀으로 약속한 하나님의 희망을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순종이다.
+ 기도제목
* * 주님, 말씀에서 약속한 희망이 믿음의 순종을 통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순종 하겠습니다.
* * 주님, 나오미나, 룻이나, 보아스나.. 사사시대에 어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을까요? 오늘날 내가, 우리 교회가 이런 믿음의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 * 주님, 나오미나, 룻이나, 보아스나.. 사사시대에 어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을까요? 오늘날 내가, 우리 교회가 이런 믿음의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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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6일
광야에 꽃이 피고 거룩한 길이 열리리라
[이사야 35:1-10]
이사야 35장 1~10절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삶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회복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다. 이사야 34장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준다면, 35장은 그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준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에 꽃이 피며, 약한 손이 강해지고 떨리는 무릎이 굳세어지며,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게 된다. 또한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길이 없는 광야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마침내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으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메마른 땅에도 꽃이 피고 길이 열리며 마침내 구원과 기쁨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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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5일
하나님의 심판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사야 34:1-17]
오늘의 본문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과 특히 에돔의 철저한 멸망을 선포한 묵시적 심판의 말씀입니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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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4일
시온성을 보는 눈
[이사야 33:1-24]
28-35장의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6부분의 마지막 부분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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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3일
곤비한 땅 큰 바위 그늘
[이사야 32:1-20]
본문의 배경은 히스기야 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드는 영’(27:10)을 보내셔서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곧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의미하며, 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섬기는 것을 공식화하였고 정의와 공의는 이미 무너져 있는 상황이었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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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2일
물러섬 없는 은혜
[이사야 31:1-9]
31장은 아직도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며 앗수르의 패망을 예언함으로 애굽을 더이상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한다. 앗수르의 계속되는 위협 앞에서 유다 지도자들이 애굽과 군사동맹을 맺어 의지하려 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행위임을 경고하신다.
31장 전체 내용의 흐름은 이렇다.
1-3절 :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책망하심
4-5절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심
6-7절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8-9절 : 앗수르 패망 예언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을 의지하려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선지서에 많이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형식의 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자들과 그를 돕는 자들을 치실 것이다(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애굽도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말들도 육체일 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3절). 결국 그들은 엎드러져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눈 앞에 다가온 위기의 순간, 그럴 때일수록 사람의 힘과 방법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람의 도움인가 하나님인가.
– 눈에 보이는 능력이 커보여도 그것이 꼭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눈 앞에 애굽이 보일 수 있다. 많은 말과 병거가 보이고 손만 내밀면 나를 도와줄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도 다 헛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신 후 그 책망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위협이 크고, 눈에 보이는 도움도 커보이지만 무엇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나를 그렇게 보호하실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6-7절은 이제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촉구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우상도 섬겼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역이고 음행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사야서에서, 선지서들 안에서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듯 내가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돈과 명예도 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그 삶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을 하는 이유가 8-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엉뚱한 것을 의지하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대해 보이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었다.
9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앗수르는 물러갈 것이나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다. 앗수르의 반석은 겨우 ‘두려움’ 때문에 물러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보호하심이다. 결국 승리는 인간적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앗수르는 강하고 위대해 보였지만 영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앗수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러저리 치이는 약소국의 신으로 존재하셨지만 세상 그 어떤 신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결코 물러섬이 없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내 건강, 내 재산이나 명예, 혹은 친구나 아는 사람, 내가 의지할만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 물러섬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으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번도 언약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고 약속을 뒤집지도 않으셨다.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며 내 마음을 점검하라고 하신다. 진짜 알고 있는가. 진짜 믿고 있는가.
마음을 돌아보며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는지 돌아보라 하신다. 세상은 변하고 내 마음도, 내가 의지하는 다른 것들도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물러섬이 없고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신다.
31장 전체 내용의 흐름은 이렇다.
1-3절 :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책망하심
4-5절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심
6-7절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8-9절 : 앗수르 패망 예언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을 의지하려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선지서에 많이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형식의 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자들과 그를 돕는 자들을 치실 것이다(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애굽도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말들도 육체일 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3절). 결국 그들은 엎드러져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눈 앞에 다가온 위기의 순간, 그럴 때일수록 사람의 힘과 방법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람의 도움인가 하나님인가.
– 눈에 보이는 능력이 커보여도 그것이 꼭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눈 앞에 애굽이 보일 수 있다. 많은 말과 병거가 보이고 손만 내밀면 나를 도와줄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도 다 헛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 유다를 책망하신 후 그 책망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위협이 크고, 눈에 보이는 도움도 커보이지만 무엇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강하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 나를 그렇게 보호하실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6-7절은 이제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촉구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우상도 섬겼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역이고 음행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사야서에서, 선지서들 안에서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듯 내가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돈과 명예도 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그 삶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을 하는 이유가 8-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엉뚱한 것을 의지하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대해 보이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었다.
9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앗수르는 물러갈 것이나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다. 앗수르의 반석은 겨우 ‘두려움’ 때문에 물러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보호하심이다. 결국 승리는 인간적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앗수르는 강하고 위대해 보였지만 영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앗수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러저리 치이는 약소국의 신으로 존재하셨지만 세상 그 어떤 신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결코 물러섬이 없다.
– 내게 주시는 말씀
–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내 건강, 내 재산이나 명예, 혹은 친구나 아는 사람, 내가 의지할만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 물러섬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으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번도 언약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고 약속을 뒤집지도 않으셨다.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며 내 마음을 점검하라고 하신다. 진짜 알고 있는가. 진짜 믿고 있는가.
마음을 돌아보며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는지 돌아보라 하신다. 세상은 변하고 내 마음도, 내가 의지하는 다른 것들도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물러섬이 없고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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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1일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사야 30:18-33]
이사야 30장 18~33절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힘을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회복과 구원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려 했다. 눈앞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다. 18절은 이 본문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시며, 마침내 친히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8~20절)
18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빨리 도와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기다리십니까?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 금은보화가 많아지는 것일까? 건강을 얻는 것일까? 권력을 얻는 것일까?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수 있다. 건강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공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며 가장 큰 복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을 의지했다. 자기들의 방법을 붙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오늘 우리도 돌아보아야 한다. 돈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경험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대상이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2.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신다. (21~26절)
21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장면을 말씀한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애굽이 도움이 될까? 다른 나라가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바른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사사기 21장 25절에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하고, 서로 싸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결국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버린다. “나가라 하리라.” 그동안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우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23~25절에서는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며, 가축들이 풍성한 목장에서 먹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메마른 삶에 다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린다. 죽어가는 땅에서 싹이 난다.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메마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메마른 영혼에 다시 생명의 비가 내린다. 주님안에서 기도가 살아난다. 말씀이 살아난다. 예배가 살아난다. 가정이 회복된다. 관계가 회복된다. 2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다.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가족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다. 일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실패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죄 때문에 생긴 상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상처를 싸매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상처 입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싸매시고 고치신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리로 가라.” 중요한 것은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길은 당장에는 달콤해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길은 결국 우리를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3.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27~33절)
27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향하여 심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30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대적을 막아주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33절에는 도벳이 등장한다. 도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늦게 오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나는?
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과 사람을 먼저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것을 내려놓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나는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알고 계시며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임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조급함 대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과 물질과 경험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신다. 사람은 우리의 상처를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우리의 눈에는 지연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8~20절)
18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빨리 도와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기다리십니까?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 금은보화가 많아지는 것일까? 건강을 얻는 것일까? 권력을 얻는 것일까?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수 있다. 건강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공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며 가장 큰 복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을 의지했다. 자기들의 방법을 붙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오늘 우리도 돌아보아야 한다. 돈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경험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대상이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2.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신다. (21~26절)
21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장면을 말씀한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애굽이 도움이 될까? 다른 나라가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바른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사사기 21장 25절에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하고, 서로 싸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결국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버린다. “나가라 하리라.” 그동안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우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23~25절에서는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며, 가축들이 풍성한 목장에서 먹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메마른 삶에 다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린다. 죽어가는 땅에서 싹이 난다.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메마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메마른 영혼에 다시 생명의 비가 내린다. 주님안에서 기도가 살아난다. 말씀이 살아난다. 예배가 살아난다. 가정이 회복된다. 관계가 회복된다. 2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다.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가족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다. 일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실패 때문에 생긴 상처가 있다. 죄 때문에 생긴 상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상처를 싸매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상처 입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싸매시고 고치신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리로 가라.” 중요한 것은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길은 당장에는 달콤해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길은 결국 우리를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3.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27~33절)
27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향하여 심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30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대적을 막아주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33절에는 도벳이 등장한다. 도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늦게 오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나는?
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과 사람을 먼저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것을 내려놓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나는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를 알고 계시며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임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조급함 대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과 물질과 경험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신다. 사람은 우리의 상처를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늦음이 없다. 우리의 눈에는 지연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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