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8:1-22 “여기 계시도다”_벧엘, 하나님의 집
인간의 선택과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주도적으로 이뤄 가신다. 이삭은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며 그의 딸과 결혼하라고 당부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축복한다.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을 세 번째 아내로 맞는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손과 땅의 약속을 재확증하시고, 임재와 동행, 보호와 귀향을 약속하신다.
라반이 거주하는 밧단아람은 ‘아람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앞서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를 구하러 간 사건에서는 아람 나하라임(두 강 사이의 아람)에 속한 “나홀의 성”으로 소개되었다(24:10). 밧단아람은 창세기에서만 등장하는 지명으로 “하란(27:43)”이라는 지명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삭은 26장에서 그랄을 떠난 뒤에 브엘세바로 이주했고(26:23) 야곱이 집을 떠날 당시에도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도피 여정은 약 850km에 이르러, 도보로는 보통 30~40일, 길게는 두 달까지 걸리는 거리였다. 그 여정 중 야곱이 하룻밤을 보낸 벧엘(루스라고도 함) 까지는 브엘세바에서 약 95km로 3~5일 정도 필요한 거리였다.
1. 이삭의 축복과 언약 계승(1~5절)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야곱을 언약 계승자로 선택하셨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하란으로 보낸다. 리브가가 이방인 며느리들 문제를 꺼내며 야곱의 결혼을 재촉하자(27:46), 이삭은 야곱을 불러 결혼 지침(1~2절)과 하나님의 축복(3~4절)을 함께 전한다. 그는 야곱에게 가나안 여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대신 밧단아람(하란, 27:43)에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과 결혼하라고 당부한다. 이때 ‘라반의 집’이 아닌 ‘외조부 브두엘의 집’이라고 칭한 것은 그 가문이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형통임을 강조하여 동족결혼의 정당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어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준다. 그 내용은 이미 27:27~29에서 축복한 것 중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았던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이 비로소,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능하신 하나님(3절)”이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99세의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확증하며 사용하신 이름으로(17:1), 이제 그 언약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절은 이삭이 야곱을 보냈고,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렀음을 요약하며, 이 일의 사실성을 부각한다.
한편, 리브가가 야곱의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는 에서로부터 그를 떼어 놓기 위함이었다. 이삭이 에서의 살해 계획(27:41)을 알았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야곱만 따로 불러 축복하고, 마지막인 양 언약의 복을 전수하며, 아무런 예물이나 종도 붙이지 않은 채 떠나보낸 정황은 이삭 또한 에서의 위협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2. 에서의 결혼(6~9절)
에서의 결혼 기록이 반복된다. 이 결혼 소식은 ‘축복’을 둘러싼 서사(26:34~28:9)의 처음과 끝에 기록되어, 그가 언약의 상속자가 아님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단락에서 ‘에서가 보았다, 깨달았다(6, 8절)’라는 반복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여전히 세속적인 시각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목격한 모든 내용은 ‘결혼’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었다.
먼저 첫째,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며 밧단아람에 보내 아내를 구하게 하고, 축복할 때 비동족 결혼을 금했고, 이에 야곱이 아내를 구하러 이미 떠났음을 보았다. 둘째, 그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한 일이 이삭의 눈에 언짢았음(‘악)을 보았다(8절). 리브가도 며느리들을 싫어하는 상황에서(27:46) 이삭만 언급한 것은 에서의 관심이 그를 편애하는 아버지에게 편향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친족과 결혼하려 한다. 그러면 이삭의 환심도 사고, 이후 축복도 기대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는 이미 언약 계보에서 제외된 이스마엘 가문을 선택하며 또다시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반복한다. 9절에서 그가 이스마엘에게로 갔다는 말은 그 가문을 접촉했다는 의미다. 당시 이스마엘이 사망한 지 약 14년이 지난 뒤였다.
에서는 그렇게 사촌누이인 마할랏, 즉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이스마엘의 장자, 25:13)의 누이”를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에서의 모습은 축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그 선택이 야곱에게 확정됐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3.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 계승(10~15절)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28:10~30:24 단락은 야곱의 결혼과 아들들을 얻는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준다. 먼저 28:10~15단락은 하나님이 직접 야곱을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로 확증하신 사건을 다룬다. 야곱의 축복 이후 이번에 하나님을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이삭이 겪은 경험과 유사하다(26장). 이삭이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인해 블레셋인들과 갈등을 겪고 위협 속에 그랄을 떠나야 했듯이, 야곱도 축복받은 후 에서의 위협을 피해 집을 떠난다. 두 사건이 가지는 공통점은 하나님의 축복이 곧바로 안정과 평안을 보장하기보다, 때로 갈등과 어려움을 동반함을 보여준다. 이삭의 추방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언약 재확증으로 이어졌듯이, 야곱의 도망 또한 벧엘에서 하나님의 언약 확증으로 이어진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루스)에서 유숙한다. 브엘세바에서 약 95km 지점에 있다. 이곳에서 야곱은 돌 하나를 베개 삼고 잠이 든다. 그때 꿈을 꾸는데,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사다리 위쪽에 서 계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밝히며,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야곱에게 확증하신다(13~14절).
여기에는 땅과 자손의 약속, 야곱과 자손을 통해 땅의 온 족속이 복을 얻는다는 구속사적 언약이 포함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처음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다(12:2~3, 7; 26:3).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삭에게 주신 임재의 약속(26:3, 24)을 확장하여 동행과 보호, 이 땅으로의 귀환, 성취의 보증을 선언하셨다(15절). 이 약속은 장래의 성공을 보장하는 선언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두려운 여정에 하나님이 끝까지 동행하신다는 보증이다. 속임수와 갈등 이후에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찾아와 이 약속하신 것은 언약의 성취가 오로지 그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이 만남은 야곱 개인의 보호와 회복을 넘어, 그를 통해 형성될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장차 이루어질 구속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한 장면이다.
4. 야곱의 서원(16~22절)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예배와 서원으로 그에게 화답한다. 잠에서 깬 야곱은 여호와가 그곳에 계셨음을 깨닫고 이를 미처 알지 못했음을 두려움 속에서 고백한다. 잠들기 전 누추했던 그 장소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거룩한 공간이 되었다. 이에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집”과 “하늘의 문”이라 부른다(17절).
이른 아침,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워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이 행위는 그곳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예배의 표현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표지로 남기려는 행동이다. 그곳의 본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로 부른다(19절). 이곳이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했던 자리라는 점(12:8; 13:3~4)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야곱에게 계승되었음을 알린다. 이어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면 그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겠다고 서원한다(20~21절). 또한 지신이 기념으로 세운 돌을 하나님의 예배 장소로 삼고, 그가 주실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야곱이 언급한 하나님이 이뤄 주실 목록에는 떡과 옷의 공급, 귀향 때의 평안이 추가되었고, 돌아올 목적지는 ‘이 땅’에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바뀌었다. 변경된 내용과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은, 야곱의 서원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우선에 둔 조건적이고 계산된 결단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20년 후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가 단을 쌓으라 명령하셨을 때, 야곱은 그를 ‘나와 계속 함께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고백하게 된다(35:3).
하늘 사닥다리로 놀라운 임재를 경험하고, 이어 놀라운 언약 갱신까지 이어졌지만,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여전히 계산적이고 얄팍하다. 어쩌겠는가?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신비한 경험으로 돌변하지 못하는것 아닌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실 터이니, 그 은혜가 놀랍고 놀랍다.
나는?
-리브가의 계략과 야곱의 동조로 목표로 삼았던 축복은 받아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장밋빛 나날이 아니라 미처 생각도 못 한 혼돈이었다. 뒤틀린 자식 사랑과 목표에 대한 집착, 성찰 없는 원망은, 형제 관계, 부부관계, 부자 관계를 파괴하였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하고, 리브가는 다시 남편을 속이며 계략을 꾸미고, 야곱은 약속의 땅을 벗어나고,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등 모든 것이 꼬이고 엉킨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기 작정을 이루셨다는 것 말고는 선한 것이 전혀 없는 무질서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선물로 그 뜻이 이뤄질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렸다면, 그들이 인위적으로 이루려 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유익을 누렸을 것이다.
-장자의 축복을 잃은 에서는 동생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 부모의 편애와 계략이 형제 사이를 갈아놓았다. 리브가는 두 아들을 모두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야곱을 피신시키기로 해야 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략 때문인데도, 또다시 태연하게 남편을 속이고 야곱을 보내려 한다. 하지만 리브가가 작정한 “몇 날”은 20년 만에 얻어서 고작 20년을 산 아들과 20년간의 이별이 되고 만다. 또 아들에게는 상상도 못 한 험한 고생이 기다리는 삶을 열어준 결정이 된다. 때로 모든 것이 자기 뜻과 계획대로 된 듯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위기가 닥쳐왔거든, 순간을 모면하는 잔재주를 부리기보다는 자신을 진단하고 잠잠히 주께 맡겨야 한다.
-이삭 자신은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배우자를 얻었으면서도, 아들 야곱에겐 자손과 땅의 축복을 주면서도 약속의 땅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도록 한다. 이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에게 이뤄지겠지만, 약속의 땅을 떠나게 한 그의 결정이 아들에게 험악한 세월을 주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또, 부모가 신붓감을 구하러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낸다는 말을 그대로 믿은 에서는 자신이 헷 족속의 딸과 결혼한 것이 부모를 근심하게 했다고 판단하고 이스마엘의 딸과 다시 결혼한다. 리브가의 인간적인 계략이 자식의 불필요한 결혼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두렵고 외로운 마음으로 하란으로 향하던 야곱은 해가 지자,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한다. 축복을 받을 때는 중천에 뜬 태양같이 의기양양했을 야곱이 이젠 황량한 저녁 같은 초췌한 도망자가 된 것이다. 이미 받은 축복마저 물거품이 된 듯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야곱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그 순간, 하나님은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계단)와 그곳을 오르내리는 천사와 그 위에 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땅과 후손) 을 다시 들려주심으로써 이삭에게서 받은 복을 승인해 주신다. 세상에서 희망 없는 우리에게도 하늘과 땅을 잇는 완전한 계시요, 새 벧엘 이요, 새 성전인 예수님이 계심(요 1:51)을 기억해야 한다. 야곱의 밧단아람으로의 도피 여정은 역설적으로 그가 안전한 장막을 벗어났을 때야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 걸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동행하고 지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여태 같이하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인간적인 지혜와 모략의 눈에 뵈는 자원만으로 스스로 자기 인생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야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끈질긴 임마누엘의 사랑뿐 아니겠나! 축복은 내가 내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때까지 야곱의 여정은 스스로가 고통스럽게 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고백하고, 성전 기둥을 세우듯 베개로 쓰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발라 구별하고 그곳 ‘루스’를 ‘벧엘’로 부른다.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가고 오는 이 여정을 안전하고 넉넉하게 지키시면 자신도 하나님을 위해 전을 세우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결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신앙이었다. 더 깨지고 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남은 야곱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위기의 상황에 부닥친 야곱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친히 찾아오시고 만나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특히 야곱은 그동안 조상들에 의해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이다.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어야 한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땅에 있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어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우리의 사닥다리, 우리의 하늘로 가는 계단 되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이 진정한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사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시는 복은 간교하고 이기적인 야곱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은혜다. 야곱은 이제까지 속임수를 써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은 그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잠든 곳까지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며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다. 나의 삶에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원은 협상이나 계약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이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을 지키신다면 자신도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야곱의 서원은 그 자체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사랑해 주셨다. 그런 야곱과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늘 사닥다리로 놀라운 임재를 경험하고, 이어 놀라운 언약 갱신까지 이어졌지만,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여전히 계산적이고 얄팍하다. 어쩌겠는가?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신비한 경험으로 돌변하지 못하는것 아닌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실 터이니, 그 은혜가 놀랍고 놀랍다. *내가 야곱이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몰랐다. 기막힌 환상과 음성을 듣고서도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여긴 그의 천박함은 이제 20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대로 빚어질 것이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며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했고 그 놀랍고 섬세한 손길로 빚으시며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것을 안다. 그래서 야곱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야곱의 이런 철없는 약속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장차 벧엘에 정말 성소(하나님의 집)이 세워 질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를 듣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꼭 그 곳에 성막을 설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집”인 그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지… 야곱의 서원이 실제가 된다.
*철없는 거래로 드린 약속이라도 사용하시는 넓고 깊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내가 본 받아야 할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애초에 계획하신대로 이루신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야곱에게 밧단아람으로 가는 여정은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도 첫 만남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난 줄이야. 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필 이런 곳, 이런 시간에… 라는 심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맞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움직이심을 늘 망각하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나의 원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축복은 내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야곱이 이제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래를 시도한다. 그저 믿음으로 받으면 될 것을 또 거래한다. 몸에 밴 거래본능, 쉽게 떨쳐 지는 것이 아니구나. 죄의 찌끼가 여전한 영향력을 끼치는 구나.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야이로의 고백이 그렇게 신박하셨나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도 말이다…
*묵상하면서 “거래본능, 조건신앙’이 뇌리에 맴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이런 천박한 모습에 목을 매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것도 거래하려 하고 조건으로 삼는다. 불신도 이런 불신이 없다. 그래서 부끄럽고 부끄럽다. 이런 교회를 이런 목사가 가르쳤으니 그런거다. 그래서 부끄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확신이 든다.이토록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야곱의 하란에서의 20년 여정이었다. 야곱 그는 결코 홀로 내려간 하란이 아니었다.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한 여정이었다.
-첫 만남때 이것에 감격하고 확신하는 야곱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20년이 지나서야 이때의 약속을 확신했으니. 에고 야곱아~ 허어. 야곱같은 인생아!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구하는 조건의 하나님보다 더 신뢰할 것이다. 내가 구하는 거래와 조건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말씀해주시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오늘 나의 벧엘이다!. 주님 말씀하소서! 그 말씀에 집중하겠나이다!
*주님, 어떤 형편에서든지 저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절망과 두려움의 땅에 먼저 하늘 사닥다리를 내려주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하늘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여전히 얄팍하고 계산적인 야곱이 저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그래도 하늘 은혜 여전히 부어주시니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