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은사와 사랑의 실천 [고전 14:1-19]
 – 2026년 06월 22일
– 2026년 06월 22일 –
은사는 사랑으로 행하여 공동체를 세워야 함을 살폈다(13장). 이제 좀 더 실제적인 가르침이다. 사랑으로 은사를 행하라고 한 이후 고린도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세워가는 은사를 추구할 것을 권면한다. 이것을 가장 개인적인 은사와 비교하여 서술한다. 초점은 어떤 은사가 상대적으로 큰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세워 가는데 어떤 은사가 더 적합할까? 혹은 필요할까?에 대한 관점이다. 이것은 저것에 비해 더 낫다와 같은 접근은 아니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교회 답게 다져지고 세워지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묵상하면서 자연스레 지금 우리 공동체에 더 필요한 은혜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1. 추구하며 사모함(1절)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에서는 주된 것은 아니지만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강력하게 권면한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라.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desire_kjv) 특히, 예언하려 하라고 전한다.

앞서 12장에서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 했는데, 어라? 이건 도대체? 왜? 은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하지만 12장부터 이어지는 문맥을 따라 읽으면 이는 어떤 특정 은사를 꼭 찝어서 달라고 졸라대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신 은사를 “사랑으로” 감당하여 덕을 세워 나가라는 의미다. 이를 열심을 내어,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즉, 추구하며 사모한다는 표현은 삶에서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느껴지고 영향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을 “실제”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할 수만 있으면 예언을 사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체들과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 복음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부터 더 말씀으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이렇게 실제의 사랑하기를 몸부림 치고, 더욱 말씀으로 다져지기를 말씀 때문에 도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가 된다.



2. 덕을 끼침(세움_4, 5, 12절)
사랑을 추구하고 예언(더 신령한 은혜)을 사모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로 세워 질까? 바로 “덕”을 끼치는 공동체로 세워진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할 때 나타나는 열매가 공동체 안에서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세워지는 “덕”이 뭘까?

1)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확신함(6-9절). 방언처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어떻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예언이나 가르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겠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하여 “분명한 나팔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전장에서 울려퍼지는 확실한 나팔 소리로 병력들을 지휘하는 것 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함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바로 “덕”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세워져야 올바로 건강한 노릇을 할 수 있다.

2)소통(10-12절). 소통이 얼만나 중요한지 모른다.. 참 씁쓸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소통되는 것, 그러니 “은사(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공동체에서 “예언”의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서로를 “하나님의 뜻”으로 소통 시키신다.

하나님의 소통 방법은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예언”의 은혜를 주셔서 설교 하고 가르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안에서 세워져 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소통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덕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새번역_19절).” 소통의 중요한 기초는 은사중심의 넘치는 소음과 같은 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령께서 주신 말을 담담하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만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가르침)”의 은혜가 나에게 더욱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3. 그럼 방언은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없을까?(13~19절)
방언은 그 자체는 축복이다. 축복 받은 사람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방언도 매우 중요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덕을 세워 가는데에 “알아들음”은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 “알지(알아 듣지) 못하면” 아무리 신비한 하늘의 것을 이야기해도 공동체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신비한 언어로 지체를 축복해도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나? 믿음으로 ‘아멘’할 수 있을까?(16절).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신비한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소통)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도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다. “통역”할 수 만 있다면…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어떻게 그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훌륭하게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새번역_12-17절).”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언으로 말하여 덕을 세우기를 바란다면 “통역”하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방언을 구하는 것 보다 예언을 구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만큼 소통과 가르침의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렇고 타인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소리)에서 덕(유익)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방언 경함이 문외한이거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할 수 없다. 신아에 도움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모임으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의미가 퇴색되어지기에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면 반드시 통역을 구해서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듣고 아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나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사랑이다(1절). 신령한 체험이든 지식이든 은사든, ‘가장 좋은 길(사랑)’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풍성하던 은사들은 다 불완전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13:8). 하지만 사랑만은 완전한 것이요. 그 사랑이 교회를 세운다. 사랑을 구현하는 은사가 ‘더 크고 값진 은사(12:31)’다. 다양함을 인정하되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도모하며, 사랑으로 감당해야 한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2, 5~6절). 방언이 설혹 천사의 언어라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면 꽹꽈리 소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13:1). 하지만 신령해 보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고(4절)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은사가 도리어 교회를 ‘허무는’ 일에 쓰인 것이다. ‘자기부정’이 없는 은사로는 공동체를 바로 세울 수 없다.

-방언보다 예언을 다 사모하라는 것은 자기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3~6절, 12절). 방언은 자기 신앙에 도움이 되고 자랑하는 데 그치지만,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동체를 세우고 격려하며 더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직접 소통하며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되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 비밀을 가르칠 때 공동체는 더욱 그 뜻안에 든든히 세워진다.

-특히나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13장의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행하라고 한 흐름을 이어받아 깨닫는 것이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이다.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유익을 얻는 다는 것이다. 건조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사랑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방언만 말하고 예언(말씀, 가르침)이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 예언이야말로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은사다. 자기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오늘날 나의 목회에서 성경의 지식만을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을 깊이 담고, 사랑을 통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씀을 전할 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어 전하는 사랑꾼 되리라.

-세상의 모든 소리에는 뜻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악기나 전쟁 나팔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7~11절).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령한 언어, 최고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소통하여 공감되지 못하면, 허공에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통이 부재하면 고통받는 세상 속에서 소통을 통해 참회복을 추구하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무의미한 ‘소음’이 아닌, 의미 있는 ‘소리(말씀)와 소통’을 통해 신앙이 자라도록 돕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신령한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여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 공동체를 가득 채우는 소음덩어리에 불과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어도 공동체를 세워가기에 충분하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에 자신도 타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13~17절). 특히 공적인 예배에서 통역해주지 않으면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을 다른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고 화답할 수도 없다. 사랑이 없는 은사처럼, 소통할 수 없는 은사도 공동체에 무익할 뿐이다. 또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일지라도 내 욕심과 허영이 담겨 있다면 ‘아멘’의 화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은사를 통해 교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18~19절). 누구보다 방언에 능한 바울도 자신을 위한 방언보다 남을 위한 예언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못 알아듣는 ‘알만 마디의 방언’보다, 성령의 깨달음으로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은사 사용의 중요한 원리는 ‘절제와 배려’다. 내게 있는 은사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려는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나를 드러내는 절제되지 못한 은사가 있는 곳에는 ‘아멘’의 화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싯적에 은사를 참 많이도 갈망 했던 적이 있었다. 방언도 그때 받았다. 태국의 밀림을 걸을 때는 예기치 않는 신유가 일어나 내 자신이 더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꼭 필요할 때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선물들이 오늘 나의 마음에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게 하였고, 여러 은사보다 “가르치는 은사”에 더욱 목마르게 하여 집중하고 또 집중하게 하였다.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니까….

*은사(은혜)는 유익을 받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어떤 은사(은혜)든 성령님께서 주신 유익이 먼저 나에게 넘쳐나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듬뿍 담겨 내 공동체의 덕(유익)을 끼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매우 사모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결국 그 은사들로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은사를 가진 지체들과 동역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사역들을 감당했을지 막막해진다.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셨고,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모두에게 사랑을 더욱 부어주셔서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감당하였기에 공동체가 건강해 질 수 있었다.

*더온누리공동체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에 이렇게 인도하실 줄 믿는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어떤 것보다 이 은사(은혜)가 필요하다. “사랑을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되…” “교회의 덕”을 함께 세워 가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일만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 성령의 은혜로 깨달아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내게 더욱 필요하다.

+ 기도제목

*주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은사들을 우리 공동체에 부어주시면, 사랑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잔치보다, 몇 마디의 말씀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주님, 제 안에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고 드는하게 세우기 위한 사랑과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이 떠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은사는 사랑으로 행하여 공동체를 세워야 함을 살폈다(13장). 이제 좀 더 실제적인 가르침이다. 사랑으로 은사를 행하라고 한 이후 고린도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세워가는 은사를 추구할 것을 권면한다. 이것을 가장 개인적인 은사와 비교하여 서술한다. 초점은 어떤 은사가 상대적으로 큰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세워 가는데 어떤 은사가 더 적합할까? 혹은 필요할까?에 대한 관점이다. 이것은 저것에 비해 더 낫다와 같은 접근은 아니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교회 답게 다져지고 세워지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묵상하면서 자연스레 지금 우리 공동체에 더 필요한 은혜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1. 추구하며 사모함(1절)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에서는 주된 것은 아니지만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강력하게 권면한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라.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desire_kjv) 특히, 예언하려 하라고 전한다.

앞서 12장에서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 했는데, 어라? 이건 도대체? 왜? 은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하지만 12장부터 이어지는 문맥을 따라 읽으면 이는 어떤 특정 은사를 꼭 찝어서 달라고 졸라대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신 은사를 “사랑으로” 감당하여 덕을 세워 나가라는 의미다. 이를 열심을 내어,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즉, 추구하며 사모한다는 표현은 삶에서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느껴지고 영향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을 “실제”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할 수만 있으면 예언을 사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체들과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 복음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부터 더 말씀으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이렇게 실제의 사랑하기를 몸부림 치고, 더욱 말씀으로 다져지기를 말씀 때문에 도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가 된다.



2. 덕을 끼침(세움_4, 5, 12절)
사랑을 추구하고 예언(더 신령한 은혜)을 사모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로 세워 질까? 바로 “덕”을 끼치는 공동체로 세워진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할 때 나타나는 열매가 공동체 안에서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세워지는 “덕”이 뭘까?

1)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확신함(6-9절). 방언처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어떻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예언이나 가르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겠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하여 “분명한 나팔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전장에서 울려퍼지는 확실한 나팔 소리로 병력들을 지휘하는 것 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함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바로 “덕”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세워져야 올바로 건강한 노릇을 할 수 있다.

2)소통(10-12절). 소통이 얼만나 중요한지 모른다.. 참 씁쓸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소통되는 것, 그러니 “은사(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공동체에서 “예언”의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서로를 “하나님의 뜻”으로 소통 시키신다.

하나님의 소통 방법은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예언”의 은혜를 주셔서 설교 하고 가르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안에서 세워져 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소통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덕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새번역_19절).” 소통의 중요한 기초는 은사중심의 넘치는 소음과 같은 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령께서 주신 말을 담담하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만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가르침)”의 은혜가 나에게 더욱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3. 그럼 방언은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없을까?(13~19절)
방언은 그 자체는 축복이다. 축복 받은 사람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방언도 매우 중요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덕을 세워 가는데에 “알아들음”은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 “알지(알아 듣지) 못하면” 아무리 신비한 하늘의 것을 이야기해도 공동체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신비한 언어로 지체를 축복해도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나? 믿음으로 ‘아멘’할 수 있을까?(16절).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신비한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소통)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도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다. “통역”할 수 만 있다면…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어떻게 그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훌륭하게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새번역_12-17절).”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언으로 말하여 덕을 세우기를 바란다면 “통역”하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방언을 구하는 것 보다 예언을 구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만큼 소통과 가르침의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렇고 타인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소리)에서 덕(유익)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방언 경함이 문외한이거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할 수 없다. 신아에 도움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모임으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의미가 퇴색되어지기에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면 반드시 통역을 구해서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듣고 아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나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사랑이다(1절). 신령한 체험이든 지식이든 은사든, ‘가장 좋은 길(사랑)’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풍성하던 은사들은 다 불완전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13:8). 하지만 사랑만은 완전한 것이요. 그 사랑이 교회를 세운다. 사랑을 구현하는 은사가 ‘더 크고 값진 은사(12:31)’다. 다양함을 인정하되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도모하며, 사랑으로 감당해야 한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2, 5~6절). 방언이 설혹 천사의 언어라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면 꽹꽈리 소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13:1). 하지만 신령해 보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고(4절)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은사가 도리어 교회를 ‘허무는’ 일에 쓰인 것이다. ‘자기부정’이 없는 은사로는 공동체를 바로 세울 수 없다.

-방언보다 예언을 다 사모하라는 것은 자기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3~6절, 12절). 방언은 자기 신앙에 도움이 되고 자랑하는 데 그치지만,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동체를 세우고 격려하며 더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직접 소통하며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되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 비밀을 가르칠 때 공동체는 더욱 그 뜻안에 든든히 세워진다.

-특히나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13장의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행하라고 한 흐름을 이어받아 깨닫는 것이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이다.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유익을 얻는 다는 것이다. 건조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사랑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방언만 말하고 예언(말씀, 가르침)이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 예언이야말로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은사다. 자기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오늘날 나의 목회에서 성경의 지식만을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을 깊이 담고, 사랑을 통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씀을 전할 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어 전하는 사랑꾼 되리라.

-세상의 모든 소리에는 뜻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악기나 전쟁 나팔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7~11절).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령한 언어, 최고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소통하여 공감되지 못하면, 허공에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통이 부재하면 고통받는 세상 속에서 소통을 통해 참회복을 추구하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무의미한 ‘소음’이 아닌, 의미 있는 ‘소리(말씀)와 소통’을 통해 신앙이 자라도록 돕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신령한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여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 공동체를 가득 채우는 소음덩어리에 불과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어도 공동체를 세워가기에 충분하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에 자신도 타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13~17절). 특히 공적인 예배에서 통역해주지 않으면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을 다른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고 화답할 수도 없다. 사랑이 없는 은사처럼, 소통할 수 없는 은사도 공동체에 무익할 뿐이다. 또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일지라도 내 욕심과 허영이 담겨 있다면 ‘아멘’의 화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은사를 통해 교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18~19절). 누구보다 방언에 능한 바울도 자신을 위한 방언보다 남을 위한 예언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못 알아듣는 ‘알만 마디의 방언’보다, 성령의 깨달음으로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은사 사용의 중요한 원리는 ‘절제와 배려’다. 내게 있는 은사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려는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나를 드러내는 절제되지 못한 은사가 있는 곳에는 ‘아멘’의 화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싯적에 은사를 참 많이도 갈망 했던 적이 있었다. 방언도 그때 받았다. 태국의 밀림을 걸을 때는 예기치 않는 신유가 일어나 내 자신이 더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꼭 필요할 때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선물들이 오늘 나의 마음에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게 하였고, 여러 은사보다 “가르치는 은사”에 더욱 목마르게 하여 집중하고 또 집중하게 하였다.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니까….

*은사(은혜)는 유익을 받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어떤 은사(은혜)든 성령님께서 주신 유익이 먼저 나에게 넘쳐나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듬뿍 담겨 내 공동체의 덕(유익)을 끼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매우 사모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결국 그 은사들로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은사를 가진 지체들과 동역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사역들을 감당했을지 막막해진다.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셨고,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모두에게 사랑을 더욱 부어주셔서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감당하였기에 공동체가 건강해 질 수 있었다.

*더온누리공동체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에 이렇게 인도하실 줄 믿는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어떤 것보다 이 은사(은혜)가 필요하다. “사랑을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되…” “교회의 덕”을 함께 세워 가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일만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 성령의 은혜로 깨달아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내게 더욱 필요하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