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세상 속,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게 하는 부활의 믿음 [고전 15:20-34]
 – 2026년 06월 26일
– 2026년 06월 26일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 복음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용법을 통해 분명하게 논증한다(12~19절).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인 부활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부활은 역사다. 이 역사의 열매가 분명히 있고 이에 따른 분명한 의미도 밝힌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1. 사망이 끊어졌다(20-23절)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에게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의 죄로 시작된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께 속한 모든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은 필연적인 일이다.

아담 이후 지어진 죽음의 행렬이 예수님에게서 끊어졌다! 예외 없이 죽어간 인생들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끊어졌다. 이제 죽음이 생명에게서 떨어졌다.죽음이 떨어진 내가 생명되신 예수께 붙어 있으면 나도 생명이 된다.

나에게서 사망이 끊어지고, 생명이 붙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끊어내고 생명 되셨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삶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새번역_22-23절).”

내가 구원 받아 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제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막연한 기대나 환상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이자 소망이다.



2. 주권 회복(24-28절)
예수님은 사망을 멸하시기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께 전리품으로 바치는 그날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산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주를 영접할 것이다.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내가 사는 이유와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생명을 다스린 사탄을 쫓아냈다. 주권 회복, 왕권 회복을 이루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 왕이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여전히 가짜 왕권을 휘두르며 몸부림치는 잔재세력(사탄,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들에게서 회복된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릴 것이다. 사탄은 죄로 물든 이 땅의 환경을 볼모삼아 마지막 힘을 부리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의 부활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만유의 주 되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굴복 당할 그 때에는, 아들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분에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새번역_28절).”

이 모든 과정은 정하신대로 진행된 것이다. “성경대로”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주님의 부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 세상 권세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이 모든 일들을 틀림없이 이루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의 부활처럼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구원의 확신 안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 수 있다.



3. 삶의 의미를 찾아(29-34절)
29~32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산 소망을 주셨기에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극심한 박해애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부활을 확신한 성도는 모든 고난을 견뎌내고 죽음의 두려움조차 극복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 주님은 내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리라 믿으며 죽음 앞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신다.

바울은 부활로 인해 무엇이 생명다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을 무릅쓰며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이 전부인양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시 세계관에 함몰되어 그저 몸과 마음의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왕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는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누리며 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 살 때 충분히 가능하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의 존재는 내가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소망하며 굳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33~34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서 깨어나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부활의 진리는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삶의 바른 이정표를 제시하고, 불의하고 느슨해진 삶과 현실에 질식되어버린 신앙을 일깨운다. 부활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불의한 요구에 나의 생명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부활을 기대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곳에서 살아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삶인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30절), 날마다 주님 때문에 나의 자아를 죽이며(31절), 이 땅의 삶의 방법을 거부하고(32절), 깨어 의를 행하므로 죄를 짓지 않는(33-34절) 삶을 추구하며 살아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나의 사망이 주님의 부활로 끊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 후손에게 지워준 죽음의 운명을 뒤집는 사건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은 삶을 가져왔다. 첫 열매가 있으면 나머지 수확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영원히 무덤에 있지 않고 분명히 부활의 옷을 입을 것이다.

-나에게 사망으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영향력이 이제는 끊어졌다. 주님이 나의 왕 되셔서 나와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나는 그 통치 안에 이미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망이 멸망당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하나님 나라 왕 노릇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사탄과 함께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양 받은 왕권을 돌려드린 후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하실 것이다. 여전히 사탄이 활개를 치고 사망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의 첫 열매를 반드시 우리도 맛 볼 수 있다.

-내 안에 부활이 이미 들어와 있다. 여전히 세상방식에 유혹받고 세상 가치에 흔들릴 수 있으나 기필코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부활은 생명이기에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분명히 다스리셔서 주님 안에 살게 한다.

-주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부활로 그 왕권의 완전한 회복을 드러내고 다시오실 그때 이를 완성하실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일상에서 그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꿋꿋히 견뎌내려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핍박을 충분히 견디게 하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힘과 의지를 공급해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바울과 그 일행이 죽음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오늘이 전부인 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묵묵히 시련을 인내하는 이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세상의 미련한 자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자로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이기고 깨어나야 한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나도 부활의 대기순번을 받았다는 확고함에 굳게 믿음을 지키게 한다. 오늘도 부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꿋꿋히 살아가련다. 이 세상 나라에서….

+ 기도제목

*주님,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인내로 세상 속에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오늘을 부활 신앙으로 살아낼 때,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기대가 더욱 견고해질 줄 믿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 복음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용법을 통해 분명하게 논증한다(12~19절).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인 부활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부활은 역사다. 이 역사의 열매가 분명히 있고 이에 따른 분명한 의미도 밝힌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1. 사망이 끊어졌다(20-23절)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에게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의 죄로 시작된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께 속한 모든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은 필연적인 일이다.

아담 이후 지어진 죽음의 행렬이 예수님에게서 끊어졌다! 예외 없이 죽어간 인생들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끊어졌다. 이제 죽음이 생명에게서 떨어졌다.죽음이 떨어진 내가 생명되신 예수께 붙어 있으면 나도 생명이 된다.

나에게서 사망이 끊어지고, 생명이 붙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끊어내고 생명 되셨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삶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새번역_22-23절).”

내가 구원 받아 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제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막연한 기대나 환상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이자 소망이다.



2. 주권 회복(24-28절)
예수님은 사망을 멸하시기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께 전리품으로 바치는 그날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산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주를 영접할 것이다.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내가 사는 이유와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생명을 다스린 사탄을 쫓아냈다. 주권 회복, 왕권 회복을 이루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 왕이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여전히 가짜 왕권을 휘두르며 몸부림치는 잔재세력(사탄,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들에게서 회복된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릴 것이다. 사탄은 죄로 물든 이 땅의 환경을 볼모삼아 마지막 힘을 부리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의 부활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만유의 주 되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굴복 당할 그 때에는, 아들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분에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새번역_28절).”

이 모든 과정은 정하신대로 진행된 것이다. “성경대로”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주님의 부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 세상 권세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이 모든 일들을 틀림없이 이루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의 부활처럼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구원의 확신 안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 수 있다.



3. 삶의 의미를 찾아(29-34절)
29~32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산 소망을 주셨기에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극심한 박해애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부활을 확신한 성도는 모든 고난을 견뎌내고 죽음의 두려움조차 극복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 주님은 내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리라 믿으며 죽음 앞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신다.

바울은 부활로 인해 무엇이 생명다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을 무릅쓰며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이 전부인양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시 세계관에 함몰되어 그저 몸과 마음의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왕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는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누리며 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 살 때 충분히 가능하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의 존재는 내가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소망하며 굳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33~34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서 깨어나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부활의 진리는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삶의 바른 이정표를 제시하고, 불의하고 느슨해진 삶과 현실에 질식되어버린 신앙을 일깨운다. 부활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불의한 요구에 나의 생명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부활을 기대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곳에서 살아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삶인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30절), 날마다 주님 때문에 나의 자아를 죽이며(31절), 이 땅의 삶의 방법을 거부하고(32절), 깨어 의를 행하므로 죄를 짓지 않는(33-34절) 삶을 추구하며 살아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나의 사망이 주님의 부활로 끊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 후손에게 지워준 죽음의 운명을 뒤집는 사건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은 삶을 가져왔다. 첫 열매가 있으면 나머지 수확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영원히 무덤에 있지 않고 분명히 부활의 옷을 입을 것이다.

-나에게 사망으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영향력이 이제는 끊어졌다. 주님이 나의 왕 되셔서 나와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나는 그 통치 안에 이미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망이 멸망당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하나님 나라 왕 노릇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사탄과 함께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양 받은 왕권을 돌려드린 후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하실 것이다. 여전히 사탄이 활개를 치고 사망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의 첫 열매를 반드시 우리도 맛 볼 수 있다.

-내 안에 부활이 이미 들어와 있다. 여전히 세상방식에 유혹받고 세상 가치에 흔들릴 수 있으나 기필코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부활은 생명이기에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분명히 다스리셔서 주님 안에 살게 한다.

-주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부활로 그 왕권의 완전한 회복을 드러내고 다시오실 그때 이를 완성하실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일상에서 그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꿋꿋히 견뎌내려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핍박을 충분히 견디게 하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힘과 의지를 공급해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바울과 그 일행이 죽음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오늘이 전부인 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묵묵히 시련을 인내하는 이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세상의 미련한 자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자로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이기고 깨어나야 한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나도 부활의 대기순번을 받았다는 확고함에 굳게 믿음을 지키게 한다. 오늘도 부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꿋꿋히 살아가련다. 이 세상 나라에서….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