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마음이 어른 [고전 14:20-40]
 – 2026년 06월 23일
– 2026년 06월 23일 –
교회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부 했다. 그럼에도 그 은사가 교회를 신령하게(?) 변화 시키지는 못했다. 끊이지 않는 분쟁,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세상방식이 통하는 예배나 모임들 여기에 성도들을 더욱 분열시킨 은사자들의 행동들이었는데 짐작하기는 은사자들의 말과 행동이 문제들을 더 양산하고 가속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선물을 받았는데 서로 나누어 더 배가 되는 기쁨은 누리지 못하고 서로 자기 선물이 좋다고 아웅거리다가 생채기가 난 꼴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은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바울이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권면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1.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새번역_20절).”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마음”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개역 개정은 ‘지혜’로 혹은 새변역은 ‘생각하다’로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마음’이다. 당시 사람들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력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마음’을 인식했다. 다른 의미는 지식, 지력, 이해력을 의미하도 했다.

“마음(생각)에는 어른이 되라!”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어른 다운 이해력으로 은사에 대하여 넉넉하게 품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참 힘들다. 그러려니 하며 포기하는 것이 아닌, 참고 기다려주며 관계를 이어가야 할 측면에서 “어른”의 역할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늘 “마음이 어른”이 되는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겠다.



2. 질서는 배려다(26-35절)
바울은 예배 모임 가운데 구성되는 각각의 순서들을 질서있게 배치하면서(덕을 세우기 위해_26절) 이에 대해 질서있게 따르라고(차례를 따라_27절, 하나씩, 하나씩_31절) 권면한다.

특히 방언과 통역을 어떻게 예배때 세울 것인지, 예언은 어떻게 모임 가운데 선포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공통적으로 홀로, 마음대로가 아닌 ‘함께’ 말하라고 권면한다. 방언은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의 통역으로’, ‘통역자가 없으면 하지 말 것’을, 예언도 역시 ‘둘이나 셋이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화평’이시기 때문이다(33절). 화평은 다른 의미로 본다면 성령께서 두 세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 하도록 선물로 주실 때 예언을 하는 당사자는 그 다음 예언하는 자가 말을 시작하면 자신이 하는 말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내용의 보완이라는 측면보다 “중구난방”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각각 다른 예언하는 자들이 먼저 보임으로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당사자들 뿐 아니라 성도들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자기흥분’에서 오는 ‘자기 목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며 선포하다가, 다른 예언하는 자들에게도 임하시는 성령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자연스레 하던 말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들의 소리”를 내는 것의 유혹을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민감하고 이를 전달하는 위치를 겸손하게 받아 들일 때 가능한 모습이다.

또,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기에 우열을 논할 수 없는 대상임을 인식하고 오직 한 가지 원리인 “사랑으로”모든 것을 세워주기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꺼이 다른 이가 예언을 시작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위를 인정하고 멈추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의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여자(원문직역은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에 대하여, 혹은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무분별한 질문을 하는 경우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행동들을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예언’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예언을 은사로 받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잠잠하라”는 의미는 방언과 예언과 관련되어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것을 막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일각에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말도 안되는 억측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3. 품위있게(적절하게)(39절)
적합하게, 예의 바르게 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은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흥해야 한다. 아예 금지해서도 안되고, 아예 방임해서도 안된다. “적절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덕을 세우는 성도들 각자가 받은 은사를 “자기 기준”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생각하며 질서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하기를 열심으로 구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자유함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공동체.어떤 지체들도 방언을 하지 못함으로 상처가 되는 일 없고, 누구든 예언하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순종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바울이 바라는 고린도 교회였다. 나도 꿈꾸는 ‘더온누리교회’다!

그런데 어떻게 감당하는 것이 “품위있게(적절하게)” 각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일까? 그 힌트가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것에 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은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적절하다. 각 지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은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런 역할을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셨으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신 대로 “성령의 능력과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곧 품위있게 행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굳이 여기에 세상방식을 덧입히지도,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을 덧칠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 자체가 곧 “품위”로운 것이니까.

한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곧 품위있는 것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시각만으로도 “분별”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인지, 사탄에게 휘둘리는 것인지 그가 행하는 은사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물의를 일으키거나, 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가 생긴다면 그것은 “품위”있는(적절한)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한가!



나는?
-은사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26~28절). 은사에 차이는 있지만, 차등은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 풍성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연약한 형제를 위해 자기 권리를 제한해야 하듯(10장), 신령한 은사가 있더라도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고 그 은사가 잘 발휘되도록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이 어우러져 풍성한 예배를 드렸다.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여러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웠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이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탄의 미혹을 받아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로 교만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는 두세 명만, 차례대로, 통역을 하면서 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 통역이 없으면 집에 가서 혼자 하나님께 하라고 강권한다. 풍성한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다양한 은사라도 질서 있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방언보다 더 사모해야 할 은사지만(1절), 예언도 적당한 순서를 따라 ‘질서 있게'(40절) 해야 한다. 서로 방해하며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29~33절). 은사를 사심 없이 ‘질서 있게’ 사용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또한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잘 분별해야 한다. 먼저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예언이든 은사든 속임에 능한 사탄의 도구로 공동체를 깨트리는 데 이용당할 수 있으니, 늘 은사의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완전함’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이다.

-공적 예배에서 여자의 침묵에 대해 강조한다(33~36절).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지만(11:2~16), 공적인 예배를 방해할 정도로 방언을 하거나 예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경계한다. 여인들이 당시 문화나 관습(33절), 성경(율법)에 따라 지켜야 할 질서를 지키지 않아 교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침묵’에 대한 강요는 아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질서’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이 모든 경고가 개인 견해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37~40절). 이는 스스로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자처하며 주님이 세우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그의 권면을 무시하던 교만한 자들(36, 37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누구든 이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단언한다. 그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와 성도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에 서로 아우성치며 드러내는 난장판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사도 운동의 비성경적인 은사의 실체를 간단히 깨우칠 수 있다. 비인격적(동물울음소리을 내는 방언이나 자세등을 흉내내는 기이한 행동) 것으로 공동체의 덕을 흠집내지 않는다.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알리기 위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은사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어서도 안되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경쟁 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이것이 분열의 빌미가 되어서도 더욱 안된다. 이런 조화와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이 어른”이다.

-무엇이든 넉넉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성도가 필요하다. 극과 극이 부딪히는 분열의 대척점에서 양 편을 아우를 수 있는 스펀지가 곧 “마음이 어른”이다. 교회의 장로, 권사, 안수집사는 곧 “마음이 어른”이어야 한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볼 수 없는 것 까지 성령께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마음 어른”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간혹 “마음이 애기들”이 겉으로는 “마음이 어른”인척 하고 있어서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고, 상처와 아픔이 양산되어 왔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결코 “마음이 애기”를 양산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사랑하고 더 배려하며 더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른”을 세우시고 세우신다.

-오늘 내가 마음 어른으로 더 곧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어른으로 반응해햐 할 것이다. 어떤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생각할 때도 “마음 애기”가 아니라 “마음 어른”의 넓은 시각을 추구해야 하리라.


*마음 어른이 배려를 보여 주어야 덕이 세워진다. 마음 어른이 먼저 무위있게 행하여야 공동체의 수준이 높아진다. 더온누리공동체에 “마음이 어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나부터서 “마음이 어른”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지.

*’마음이 어른’은 성령님의 마음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시작되고 진행된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깨우치고 가르쳐 주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행동하면 마음 어른이 되어간다. 나의 방식, 세사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담아내고 순종하며 나가느냐가 곧 마음어른의 척도다! 오늘도 “마음이 어른”으로 채워보겠다. 성령께서 기꺼이 도와주시고 필요한 은혜 주시리라.

+ 기도제목

*주님, 겉으로 보기에만이 아닌 마음이 어른의 신앙을 다지겠습니다.
*주님, 온 교회 공동체가 화평의 하나님을 섬기고 전하며 살아내겠습니다.
교회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부 했다. 그럼에도 그 은사가 교회를 신령하게(?) 변화 시키지는 못했다. 끊이지 않는 분쟁,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세상방식이 통하는 예배나 모임들 여기에 성도들을 더욱 분열시킨 은사자들의 행동들이었는데 짐작하기는 은사자들의 말과 행동이 문제들을 더 양산하고 가속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선물을 받았는데 서로 나누어 더 배가 되는 기쁨은 누리지 못하고 서로 자기 선물이 좋다고 아웅거리다가 생채기가 난 꼴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은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바울이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권면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1.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새번역_20절).”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마음”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개역 개정은 ‘지혜’로 혹은 새변역은 ‘생각하다’로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마음’이다. 당시 사람들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력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마음’을 인식했다. 다른 의미는 지식, 지력, 이해력을 의미하도 했다.

“마음(생각)에는 어른이 되라!”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어른 다운 이해력으로 은사에 대하여 넉넉하게 품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참 힘들다. 그러려니 하며 포기하는 것이 아닌, 참고 기다려주며 관계를 이어가야 할 측면에서 “어른”의 역할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늘 “마음이 어른”이 되는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겠다.



2. 질서는 배려다(26-35절)
바울은 예배 모임 가운데 구성되는 각각의 순서들을 질서있게 배치하면서(덕을 세우기 위해_26절) 이에 대해 질서있게 따르라고(차례를 따라_27절, 하나씩, 하나씩_31절) 권면한다.

특히 방언과 통역을 어떻게 예배때 세울 것인지, 예언은 어떻게 모임 가운데 선포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공통적으로 홀로, 마음대로가 아닌 ‘함께’ 말하라고 권면한다. 방언은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의 통역으로’, ‘통역자가 없으면 하지 말 것’을, 예언도 역시 ‘둘이나 셋이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화평’이시기 때문이다(33절). 화평은 다른 의미로 본다면 성령께서 두 세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 하도록 선물로 주실 때 예언을 하는 당사자는 그 다음 예언하는 자가 말을 시작하면 자신이 하는 말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내용의 보완이라는 측면보다 “중구난방”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각각 다른 예언하는 자들이 먼저 보임으로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당사자들 뿐 아니라 성도들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자기흥분’에서 오는 ‘자기 목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며 선포하다가, 다른 예언하는 자들에게도 임하시는 성령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자연스레 하던 말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들의 소리”를 내는 것의 유혹을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민감하고 이를 전달하는 위치를 겸손하게 받아 들일 때 가능한 모습이다.

또,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기에 우열을 논할 수 없는 대상임을 인식하고 오직 한 가지 원리인 “사랑으로”모든 것을 세워주기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꺼이 다른 이가 예언을 시작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위를 인정하고 멈추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의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여자(원문직역은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에 대하여, 혹은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무분별한 질문을 하는 경우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행동들을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예언’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예언을 은사로 받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잠잠하라”는 의미는 방언과 예언과 관련되어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것을 막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일각에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말도 안되는 억측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3. 품위있게(적절하게)(39절)
적합하게, 예의 바르게 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은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흥해야 한다. 아예 금지해서도 안되고, 아예 방임해서도 안된다. “적절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덕을 세우는 성도들 각자가 받은 은사를 “자기 기준”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생각하며 질서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하기를 열심으로 구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자유함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공동체.어떤 지체들도 방언을 하지 못함으로 상처가 되는 일 없고, 누구든 예언하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순종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바울이 바라는 고린도 교회였다. 나도 꿈꾸는 ‘더온누리교회’다!

그런데 어떻게 감당하는 것이 “품위있게(적절하게)” 각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일까? 그 힌트가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것에 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은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적절하다. 각 지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은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런 역할을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셨으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신 대로 “성령의 능력과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곧 품위있게 행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굳이 여기에 세상방식을 덧입히지도,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을 덧칠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 자체가 곧 “품위”로운 것이니까.

한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곧 품위있는 것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시각만으로도 “분별”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인지, 사탄에게 휘둘리는 것인지 그가 행하는 은사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물의를 일으키거나, 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가 생긴다면 그것은 “품위”있는(적절한)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한가!



나는?
-은사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26~28절). 은사에 차이는 있지만, 차등은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 풍성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연약한 형제를 위해 자기 권리를 제한해야 하듯(10장), 신령한 은사가 있더라도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고 그 은사가 잘 발휘되도록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이 어우러져 풍성한 예배를 드렸다.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여러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웠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이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탄의 미혹을 받아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로 교만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는 두세 명만, 차례대로, 통역을 하면서 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 통역이 없으면 집에 가서 혼자 하나님께 하라고 강권한다. 풍성한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다양한 은사라도 질서 있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방언보다 더 사모해야 할 은사지만(1절), 예언도 적당한 순서를 따라 ‘질서 있게'(40절) 해야 한다. 서로 방해하며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29~33절). 은사를 사심 없이 ‘질서 있게’ 사용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또한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잘 분별해야 한다. 먼저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예언이든 은사든 속임에 능한 사탄의 도구로 공동체를 깨트리는 데 이용당할 수 있으니, 늘 은사의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완전함’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이다.

-공적 예배에서 여자의 침묵에 대해 강조한다(33~36절).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지만(11:2~16), 공적인 예배를 방해할 정도로 방언을 하거나 예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경계한다. 여인들이 당시 문화나 관습(33절), 성경(율법)에 따라 지켜야 할 질서를 지키지 않아 교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침묵’에 대한 강요는 아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질서’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이 모든 경고가 개인 견해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37~40절). 이는 스스로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자처하며 주님이 세우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그의 권면을 무시하던 교만한 자들(36, 37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누구든 이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단언한다. 그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와 성도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에 서로 아우성치며 드러내는 난장판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사도 운동의 비성경적인 은사의 실체를 간단히 깨우칠 수 있다. 비인격적(동물울음소리을 내는 방언이나 자세등을 흉내내는 기이한 행동) 것으로 공동체의 덕을 흠집내지 않는다.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알리기 위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은사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어서도 안되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경쟁 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이것이 분열의 빌미가 되어서도 더욱 안된다. 이런 조화와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이 어른”이다.

-무엇이든 넉넉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성도가 필요하다. 극과 극이 부딪히는 분열의 대척점에서 양 편을 아우를 수 있는 스펀지가 곧 “마음이 어른”이다. 교회의 장로, 권사, 안수집사는 곧 “마음이 어른”이어야 한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볼 수 없는 것 까지 성령께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마음 어른”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간혹 “마음이 애기들”이 겉으로는 “마음이 어른”인척 하고 있어서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고, 상처와 아픔이 양산되어 왔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결코 “마음이 애기”를 양산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사랑하고 더 배려하며 더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른”을 세우시고 세우신다.

-오늘 내가 마음 어른으로 더 곧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어른으로 반응해햐 할 것이다. 어떤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생각할 때도 “마음 애기”가 아니라 “마음 어른”의 넓은 시각을 추구해야 하리라.


*마음 어른이 배려를 보여 주어야 덕이 세워진다. 마음 어른이 먼저 무위있게 행하여야 공동체의 수준이 높아진다. 더온누리공동체에 “마음이 어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나부터서 “마음이 어른”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지.

*’마음이 어른’은 성령님의 마음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시작되고 진행된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깨우치고 가르쳐 주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행동하면 마음 어른이 되어간다. 나의 방식, 세사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담아내고 순종하며 나가느냐가 곧 마음어른의 척도다! 오늘도 “마음이 어른”으로 채워보겠다. 성령께서 기꺼이 도와주시고 필요한 은혜 주시리라.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