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3:1-20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
마하나임의 환상과 얍복 강변의 씨름에서 연거푸 하나님의 사자들과 하나님(의 사자)을 만난 야곱은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하나님은 그의 곁에 계셨다. 야곱은 “눈을 들어” 멀리서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맞이하기 위해 가족들을 분리했다. 야곱은 모든 돌발 상황을 대비해 모든 대열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였다.
한편 이렇게 두려워 하는 야곱과 달리 에서는 야곱을 매우 반가워하였고, 야곱이 주려는 예물도 거절하였지만, 야곱이 강권하여 예물을 주며 은혜를 구한다. 하지만 세일로 같이 가자는 에서의 제안을 거절하고 숙곳에 정착한다.
1. 야곱과 에서의 만남, 화해(1~11절)
야곱이 드디어 에서를 만났다. 하늘 군대를 보고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만남의 자리로 나간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나… 얼마나 감격스러운 만남인가!
20년의 시간은 에서의 마음을 충분히 누그러뜨렸을까? 아니다 시간이 누그려뜨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살다보면 시간이 지나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예상치 못한 화해가 자연스레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화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야곱이 밧단하람으로 떠나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 나름대로 험한 인생을 살았다. 이 사이 에서의 살기 넘치는 마음을 어루만지셨을 것이다. 물론 먼저 받은 그 많은 선물들에 마음이 녹았을 수 있겠지만, 잠시 신부감을 구하러 간 줄 알았던 동생 야곱이 오랜 시간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도 감감했으니 처음 살의에 찬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고 나중에는 연민도 느꼈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허벅지 뼈(고관절, 엉덩이 뼈)가 다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지팡에 의지하여 힘겸게 나아와 일곱 번 절하는 동생이 안쓰러웠을 수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하지만 에서가 야곱의 가족들이 귀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400명을 이끌고 마중 나오고 야곱을 만날때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한참을 울고서야 식구들을 물어보고 가장 나중에야 야곱의 선물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에서는 이미 야곱을 용서했고 그리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만남 이후 군사 몇을 남겨두고 가겠다고 한 것을 보면 평생 들판에서 자라 세일산 근방을 훤히 꿰뚫고 있는 그가 야곱과 그의 귀향단을 보호하려 달려 왔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니 야곱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질 없는 생각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렇게 연약한 나의 부질없는 근심 걱정 속에서도 약속하신대로 일하셨음이 증명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다. 야곱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다. 야곱은 마하나임과 얍복강가를 거치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동행하여 주신 다는 것을 실제한 것 같다.
2. 야곱과 에서의 이별(12~17절)
에서와 야곱은 평화롭게 이별한다. 에서는 함께 더나자고 야곱에게 권하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친절하게 말한다(12절). 하지만 야곱은 일단, 하란으로부터 라반의 추격을 피해 강행군했었고 이후 쉼 없이 이동했으므로 먼저 떠나라고 간청하고, 자신은 가축 떼와 가족들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세일까지 인도한 후 에서에게 가겠다고 한다(13~14절). 물론 거짓말이다. 이에 에서는 자기 수하 일부를 남겨 돕겠다고 하지만, 야곱은 이 또한 사양한다.
야곱의 에서의 호의에 대한 거절은 아직 그가 에서를 위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에서와의 깨어졌던 관계는 회복하되, 장래의 교류나 영향권에는 머물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세일 산이 아닌 가나안 땅에 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에서는 이날 ‘그의 길을 따라’ 세일로 돌아간다. ‘그 길을 따라’라는 표현은 화해 이전이나 이후나 두 형제의 삶이 서로 다른 방향임을 암시한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롯처럼(13:5~13) 이후에도 떨어져 살게 된다(36:6~7).
야곱의 서사에서 두 형제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23년 후(120세), 이삭의 장례를 치를 때다(35:29). 에서가 남부로 떠난 뒤, 야곱은 얍복강을 다시 건너 북서쪽 인근 숙곳으로 이동한다(17절). 요단 계곡의 비옥한 저지대인 이곳은 가축 방목과 이동과 생존에 유리했다. 야곱은 긴 여정 후의 재정비를 위해 그곳에 집과 가축 우릿간(‘초막들’, 쑥코트)을 지었다. 이에 그 땅을 숙곳(쑥고트)이라 불렀다.
3.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한 야곱(18~20절)
이후 야곱은 요단을 건너지만,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기보다는 숙곳에서 서쪽 약 32km에 위치한 세겜에 정착한다. 18절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안전히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렀다’는 말로 귀환 여정이 끝났음을 밝힌다. 공식적인 귀환의 종착지는 벧엘이다(35:9). 세겜 도착 자체는 두 의의가 있다.
첫째,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 계승자임을 확증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세겜에 와서 첫 제단을 쌓고 땅의 약속을 받았듯이(12:6~7), 약 180년 후 그의 손자 야곱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와서, 첫 제단을 쌓고 밭을 산다. 특히 아몰 가문에게서 100크시타에 매입한 땅은 정착 의지와 함께 가나안의 첫 소유지임을 알린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처럼 훗날 요셉의 유골 매장지가 되며(수 24:32)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둘째, 벧엘에서의 간구가 응답되었음을 뜻한다. 야곱은 여호와가 자신을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다(28:21). 따라서 그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른 것은(20절) 이 약속을 기억하고 드린 감격적인 신앙고백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벧엘로 올라가서 서원(28:22)을 이행할 일이 남았다.
나는?
-야곱의 주도면밀한 에서를 맞을 준비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끄심 앞에 여지없이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야곱이 했던 근심과 이에 따른 대책이 무색할만치 에서와의 재회는 감격적이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야곱은 이전과 달리 맨 뒤가 아닌 맨 앞으로 나가 형 에서를 맞이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마음이 누그러진 에서도 동생 야곱을 껴안고 화해한다.
-지팡이를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야곱을 본 에서는 어떤 존재였던가? 살기등등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야곱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맞이하고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품이 넓은 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마음뿐 아니라 이미 야곱을 향한 에서의 마음도 준비시키신 것이다.
-야곱은 20년전의 에서만 생각하고 만남을 대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20년동안 에서를 어루만져 주셨다. 야곱이 간과한 것은 지난 20년 동안 자신과 늘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었다. 이 능력은 단지 밧단아람에서 살다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는데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에서의 마음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풀어 놓으셨다.
-때때로 나만 근심하고 걱정했던 일 때문에 얼마나 무안했던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이렇게 나만 홀로 무안한 경우를 꽤 만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상황, 시간, 공간에서 언약하신 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지…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 그토록 두려웠던 형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성품 중 으뜸은 용서다. 불신실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용서하신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을 용서하는 에서의 모습에서 용서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오늘 만나는 불편한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최고의 영성이고 제자도다. 나의 얼굴을 통해 누가 드러나는가?
-동행하자는 에서의 제안을 거짓말을 지어가며 거절한다. 세일로 가겠다고 해놓고는 반대 방향인 숙곳으로 향한다. 아직도 에서가 못 미덥고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에서보다 더 변해야 하는 사람은 야곱이다. 그가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벧엘의 서원을 이행하기에는 아직도 그가 버려야 할 미련이 남아 있다.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준다. 서로 화해하고 용서했지만, 각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야곱의 연약함이 밉지 않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찜찜하게 걸리는 것은 가족들을 나눌 때 첫 번째 그룹을 여종들과 그의 자녀들, 두 번째 그룹을 레아와 그녀의 아들들, 마지막으로 라헬과 그녀의 아들로 구분한 것은 분명 사려깊지 못한 결정이다.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단지 꿈 이야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야곱의 집안에서 이런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에서와의 20년만의 재회를 잘 마무리하고 숙곳(초막들, 움막들)에 집과 움막들을 짓고 세겜 성문 앞에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아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지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서원한 벧엘까지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그곳에 귀향하기 전 야곱은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서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 아니 이미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야곱은 실감하지 못했으나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다.
-야곱과 에서의 변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각자의 삶에서 은밀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더라도 그 너머에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주님, 야곱이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사람들이 제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겠습니다. *주님, 치밀한 인간적인 몸부림이 무색할만큼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비하심이 저에게도 늘 있음을 알기에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