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 _ 히스기야의 과오와 바벨론 사절단 방문의 교훈 [이사야 39:1-8]
 – 2026년 08월 31일
– 2026년 08월 31일 –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기적적으로 구출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죽을 병에서 극적으로 치유를 받는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히스기야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로단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가 다시금 여호와를 떠나 동맹정치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경험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버린다.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경험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잊는다. 그는 여호와의 인정보다 바벨론 왕의 인정을 선택한다.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는 바벨론과의 동맹 정치를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의 과오가 유다의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그래도 그는 이사야의 고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올무에 걸렸다. 깊은 병에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히스기야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 되었다는 소문은 금새 주변국들에게 퍼졌다. 그 소식이 바벨론에게까지 전달 되었나보다. ‘므로닥발라단’이 친서와 예물을 준비하여 사절단을 보내 축하해 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호의가 정말 호의일까 싶다. 가까운 주변국도 아니고 앗수르와 대치중인 머나먼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본문에서는 그들을 맞이한 히스기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 배경이해(1절)
이 구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통치 연대와 사건을 정리하면, 그의 치유 이야기(38장)와 바벨론 사절 이야기(39장)은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주전 701년, 36~37장)보다 적어도 삼 년에서 십이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된다. 이 부분의 서사(38장+39장+36~37장)는 연대순 배열이 아닌 것이다. 즉, 의도적 배열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읽는다면 히스기야의 치유(38장)는 예루살렘의 구원에서(36~37장) 정점에 이르고, 바벨론을 통한 징계의 이야기는(39장) 사건적으로 관련 없는 앗수르를 통한 예루살렘의 침략 서사(36~37장)에 의해 단절된 에피소드가 된다. 이는 38:6의 약속은 주전 701년의 구원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약속이 되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약속과 성취’ 사이에 시대적 연관성을 제외하고 아무 관련 없는 ‘바벨론에 의한 징벌’이 놓이게 된다. 반면 현재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이 된다. 38~39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구원(36~37장)으로 종결되지 않고 열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궁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의 후손들이 37~38장에 기술된 히스기야를 본받는다면 다시 주어질 수도 있는 구원사인 것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보여준 히스기야를 책망하여 그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8장에서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유배의 심판이 선고된다. 39장의 심판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38:6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8장의 구원이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이 충돌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다.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떠나 바벨론에 의지할 때 과거의 구원 경험은 과거의 추억에 마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매달릴 때 약속은 성취된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보면 39장의 심판은 주전 701년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36~37장)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약속(38장) 저 너머에 있는, 그러나 40장 이하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2.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힘을 과시한 히스기야(2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새번역_2절).’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 무기고, 창고’를 둘러보게 한다.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 음… 보물창고는 그렇다 쳐도 무기고를 보여주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선친 아하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취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앗수르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신흥 세력이었다. 몰론 남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국력을 이때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와 경쟁할 정도로 힘이 올라오는 바벨론과 반앗수르 연대를 자신의 회복과 동시에 바벨론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구축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하나님의 치유해주심의 기적과 함께 약속해 주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것 보다 바벨론과의 동맹에 더 정성을 쏟은 것이다.

유다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을 보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보물창고(은, 금, 향료와 향유)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은 이 정도라는 거다. 또 무기고와 창고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기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거다. 앗수르에게 함께 대항하는 유다는 이 정도 라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히스기야가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그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죽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이런 것이 히스기야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정작 자랑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못한다.



3.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을 깨우친 이사야(3-4절)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 시켰다. 선친 아하스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산헤립의 항복을 통보하는 모멸스러운 글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모습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펼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소외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절단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온다. 찾아온 자체 만으로도 히스기야는 뜨끔 했을 것이다. 이사야가 묻는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가? 또 재차 묻는다.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이들은 바벨론에서 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궁궐안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사야에게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 히스기야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히스기야는 어땠을까? 극적인 병에서의 회복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테다. 이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은 회복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문제중 한 가지인 앗수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앗수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이에 반앗수르 동맹들이 가시화 되고 있던 찰나, 바벨론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이잘 진행 되고 있다고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다. 반앗수르 동맹 조차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했어야 했다. 더구나 선친 아하스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펼쳤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주변 나라들과 이 문제를 펼쳐 놓고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3.하나님의 심판 선언(5-8절)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동맹삼아 더 의지하려 했던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그들이 자랑했던 재물(보물창고), 능력무기도, 창고)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매우 구체적인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에 대한 심판 선언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과오”로 기록된다. 그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바벨론 유수 심판이 결정된다. 이전부터 경고로 선언되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의지 하기로 결정한 히스기야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경험이 있음에도 바벨론 왕의 글과 선물에 취하여 사절단에게 동맹의 예를 갖추어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한 선친 아하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제 히스기야도 아버지 아하스가 갔던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이사야의 심판 선언 앞에 히스기야는 궁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새번역_8절).” 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게 될 것이 확정되는 장면이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극히 부패하여 기회를 주어도 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 나라와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철저한 심판”이 확정 되었다. 이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시작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자신이 통치하는 시간만 이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은 확정 되었다. 이제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야 회복이 옴을 바라봄으로 인내하며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견디는 자는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마 24:13)”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죽을 병에서 회복되고(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난 후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시험은 ‘자만’이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방문하자 히스기야는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의 모든 국고를 열어 젖혔다(1~2절). 오늘날 자기 자랑을 위해 소유(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심지어 부풀려 포장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자만하게 하는 상황이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주님꼐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마치 나의 능력과 역량으로 되어진 것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간혹 일어날 때, 히스기야와 같은 자기 자랑의 부심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 민망하다.

-본문을 묵상하며 계속 이어지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상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던 그가 이번에는(형통할 때는)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가 찾아와서 묻는다(3~4절). 삶의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다. 가장 평탄한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나 취소되지 않는다(5~7절).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15년의 시한부 생명을 뜻하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벨론과의 동맹을 의식한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믿었던 바벨론에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생전에 누리는 평안함과 견고함에 감사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그 후손들에게 곧 임할 것이며, 불신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런 근시안적인 태도와 마음을 보며 혹시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히스기야 이야기는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소유가 썩는 만큼 우리 영혼도 썩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 유다의 국력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가득 쌓인 보물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소유를 탐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결국 그 탐욕스러운 바벨론에게 유다는 먹힘을 당하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얼마나 의욕적으로 정사에 매달렸겠는가? 그리고 그 정사 중에서 당시 가장 큰 문제인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다. 하나님 없는 열심이 결국 심판 확정을 선고 받았다. 아하스 왕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시행하였던 성전청결도, 절기 회복의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없는 자기 결정”이라는 카운터펀치로 속절없이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다시 얻은 생명이기에 더욱 열심과 성의를 다하여 매달렸을 삶이었는데, 정작 자기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님 없는 열심”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정”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삶의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며 결정 했던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무너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스기야의 삶에서 가장 은혜가 충만했을 때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을 확정 받는다.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정작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펼치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펼쳐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삶이었지만 그 삶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재물, 자기 능력만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름은 온 간데 없구나….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왜 이리 낯설지 않은지….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의 인생을 펼쳐 놓고 더욱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 겸손하게 이 길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산다!

*비록 엄청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지만, 히스기야는 곧장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의 정당성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수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인정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히스기야의 잘못으로 이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기다림의 방법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윗 왕조가 모아놓은 재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후손들 중에는 환관이 되는 자도 나올 것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왕들을 그들이 바란 대로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중한 징벌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게 될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가장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묻고 또 물으며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평온한 일상이 가장 영적으로 느슨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을 인정하며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