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 _ 히스기야의 과오와 바벨론 사절단 방문의 교훈 [이사야 39:1-8]
– 2026년 08월 31일
– 2026년 08월 31일 –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기적적으로 구출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죽을 병에서 극적으로 치유를 받는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히스기야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로단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가 다시금 여호와를 떠나 동맹정치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경험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버린다.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경험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잊는다. 그는 여호와의 인정보다 바벨론 왕의 인정을 선택한다.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는 바벨론과의 동맹 정치를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의 과오가 유다의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그래도 그는 이사야의 고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올무에 걸렸다. 깊은 병에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히스기야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 되었다는 소문은 금새 주변국들에게 퍼졌다. 그 소식이 바벨론에게까지 전달 되었나보다. ‘므로닥발라단’이 친서와 예물을 준비하여 사절단을 보내 축하해 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호의가 정말 호의일까 싶다. 가까운 주변국도 아니고 앗수르와 대치중인 머나먼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본문에서는 그들을 맞이한 히스기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 배경이해(1절)
이 구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통치 연대와 사건을 정리하면, 그의 치유 이야기(38장)와 바벨론 사절 이야기(39장)은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주전 701년, 36~37장)보다 적어도 삼 년에서 십이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된다. 이 부분의 서사(38장+39장+36~37장)는 연대순 배열이 아닌 것이다. 즉, 의도적 배열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읽는다면 히스기야의 치유(38장)는 예루살렘의 구원에서(36~37장) 정점에 이르고, 바벨론을 통한 징계의 이야기는(39장) 사건적으로 관련 없는 앗수르를 통한 예루살렘의 침략 서사(36~37장)에 의해 단절된 에피소드가 된다. 이는 38:6의 약속은 주전 701년의 구원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약속이 되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약속과 성취’ 사이에 시대적 연관성을 제외하고 아무 관련 없는 ‘바벨론에 의한 징벌’이 놓이게 된다. 반면 현재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이 된다. 38~39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구원(36~37장)으로 종결되지 않고 열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궁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의 후손들이 37~38장에 기술된 히스기야를 본받는다면 다시 주어질 수도 있는 구원사인 것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보여준 히스기야를 책망하여 그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8장에서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유배의 심판이 선고된다. 39장의 심판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38:6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8장의 구원이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이 충돌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다.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떠나 바벨론에 의지할 때 과거의 구원 경험은 과거의 추억에 마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매달릴 때 약속은 성취된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보면 39장의 심판은 주전 701년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36~37장)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약속(38장) 저 너머에 있는, 그러나 40장 이하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2.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힘을 과시한 히스기야(2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새번역_2절).’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 무기고, 창고’를 둘러보게 한다.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 음… 보물창고는 그렇다 쳐도 무기고를 보여주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선친 아하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취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앗수르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신흥 세력이었다. 몰론 남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국력을 이때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와 경쟁할 정도로 힘이 올라오는 바벨론과 반앗수르 연대를 자신의 회복과 동시에 바벨론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구축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하나님의 치유해주심의 기적과 함께 약속해 주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것 보다 바벨론과의 동맹에 더 정성을 쏟은 것이다.
유다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을 보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보물창고(은, 금, 향료와 향유)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은 이 정도라는 거다. 또 무기고와 창고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기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거다. 앗수르에게 함께 대항하는 유다는 이 정도 라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히스기야가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그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죽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이런 것이 히스기야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정작 자랑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못한다.
3.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을 깨우친 이사야(3-4절)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 시켰다. 선친 아하스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산헤립의 항복을 통보하는 모멸스러운 글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모습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펼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소외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절단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온다. 찾아온 자체 만으로도 히스기야는 뜨끔 했을 것이다. 이사야가 묻는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가? 또 재차 묻는다.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이들은 바벨론에서 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궁궐안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사야에게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 히스기야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히스기야는 어땠을까? 극적인 병에서의 회복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테다. 이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은 회복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문제중 한 가지인 앗수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앗수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이에 반앗수르 동맹들이 가시화 되고 있던 찰나, 바벨론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이잘 진행 되고 있다고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다. 반앗수르 동맹 조차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했어야 했다. 더구나 선친 아하스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펼쳤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주변 나라들과 이 문제를 펼쳐 놓고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3.하나님의 심판 선언(5-8절)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동맹삼아 더 의지하려 했던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그들이 자랑했던 재물(보물창고), 능력무기도, 창고)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매우 구체적인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에 대한 심판 선언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과오”로 기록된다. 그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바벨론 유수 심판이 결정된다. 이전부터 경고로 선언되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의지 하기로 결정한 히스기야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경험이 있음에도 바벨론 왕의 글과 선물에 취하여 사절단에게 동맹의 예를 갖추어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한 선친 아하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제 히스기야도 아버지 아하스가 갔던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이사야의 심판 선언 앞에 히스기야는 궁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새번역_8절).” 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게 될 것이 확정되는 장면이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극히 부패하여 기회를 주어도 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 나라와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철저한 심판”이 확정 되었다. 이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시작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자신이 통치하는 시간만 이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은 확정 되었다. 이제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야 회복이 옴을 바라봄으로 인내하며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견디는 자는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마 24:13)”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죽을 병에서 회복되고(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난 후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시험은 ‘자만’이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방문하자 히스기야는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의 모든 국고를 열어 젖혔다(1~2절). 오늘날 자기 자랑을 위해 소유(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심지어 부풀려 포장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자만하게 하는 상황이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주님꼐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마치 나의 능력과 역량으로 되어진 것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간혹 일어날 때, 히스기야와 같은 자기 자랑의 부심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 민망하다.
-본문을 묵상하며 계속 이어지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상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던 그가 이번에는(형통할 때는)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가 찾아와서 묻는다(3~4절). 삶의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다. 가장 평탄한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나 취소되지 않는다(5~7절).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15년의 시한부 생명을 뜻하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벨론과의 동맹을 의식한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믿었던 바벨론에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생전에 누리는 평안함과 견고함에 감사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그 후손들에게 곧 임할 것이며, 불신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런 근시안적인 태도와 마음을 보며 혹시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히스기야 이야기는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소유가 썩는 만큼 우리 영혼도 썩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 유다의 국력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가득 쌓인 보물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소유를 탐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결국 그 탐욕스러운 바벨론에게 유다는 먹힘을 당하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얼마나 의욕적으로 정사에 매달렸겠는가? 그리고 그 정사 중에서 당시 가장 큰 문제인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다. 하나님 없는 열심이 결국 심판 확정을 선고 받았다. 아하스 왕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시행하였던 성전청결도, 절기 회복의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없는 자기 결정”이라는 카운터펀치로 속절없이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다시 얻은 생명이기에 더욱 열심과 성의를 다하여 매달렸을 삶이었는데, 정작 자기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님 없는 열심”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정”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삶의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며 결정 했던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무너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스기야의 삶에서 가장 은혜가 충만했을 때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을 확정 받는다.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정작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펼치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펼쳐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삶이었지만 그 삶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재물, 자기 능력만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름은 온 간데 없구나….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왜 이리 낯설지 않은지….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의 인생을 펼쳐 놓고 더욱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 겸손하게 이 길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산다!
*비록 엄청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지만, 히스기야는 곧장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의 정당성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수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인정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히스기야의 잘못으로 이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기다림의 방법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윗 왕조가 모아놓은 재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후손들 중에는 환관이 되는 자도 나올 것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왕들을 그들이 바란 대로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중한 징벌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게 될 것이다.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경험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잊는다. 그는 여호와의 인정보다 바벨론 왕의 인정을 선택한다.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는 바벨론과의 동맹 정치를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의 과오가 유다의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그래도 그는 이사야의 고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올무에 걸렸다. 깊은 병에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히스기야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 되었다는 소문은 금새 주변국들에게 퍼졌다. 그 소식이 바벨론에게까지 전달 되었나보다. ‘므로닥발라단’이 친서와 예물을 준비하여 사절단을 보내 축하해 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호의가 정말 호의일까 싶다. 가까운 주변국도 아니고 앗수르와 대치중인 머나먼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본문에서는 그들을 맞이한 히스기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 배경이해(1절)
이 구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통치 연대와 사건을 정리하면, 그의 치유 이야기(38장)와 바벨론 사절 이야기(39장)은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주전 701년, 36~37장)보다 적어도 삼 년에서 십이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된다. 이 부분의 서사(38장+39장+36~37장)는 연대순 배열이 아닌 것이다. 즉, 의도적 배열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읽는다면 히스기야의 치유(38장)는 예루살렘의 구원에서(36~37장) 정점에 이르고, 바벨론을 통한 징계의 이야기는(39장) 사건적으로 관련 없는 앗수르를 통한 예루살렘의 침략 서사(36~37장)에 의해 단절된 에피소드가 된다. 이는 38:6의 약속은 주전 701년의 구원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약속이 되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약속과 성취’ 사이에 시대적 연관성을 제외하고 아무 관련 없는 ‘바벨론에 의한 징벌’이 놓이게 된다. 반면 현재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이 된다. 38~39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구원(36~37장)으로 종결되지 않고 열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궁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의 후손들이 37~38장에 기술된 히스기야를 본받는다면 다시 주어질 수도 있는 구원사인 것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보여준 히스기야를 책망하여 그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8장에서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유배의 심판이 선고된다. 39장의 심판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38:6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8장의 구원이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이 충돌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다.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떠나 바벨론에 의지할 때 과거의 구원 경험은 과거의 추억에 마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매달릴 때 약속은 성취된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보면 39장의 심판은 주전 701년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36~37장)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약속(38장) 저 너머에 있는, 그러나 40장 이하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2.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힘을 과시한 히스기야(2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새번역_2절).’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 무기고, 창고’를 둘러보게 한다.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 음… 보물창고는 그렇다 쳐도 무기고를 보여주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선친 아하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취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앗수르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신흥 세력이었다. 몰론 남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국력을 이때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와 경쟁할 정도로 힘이 올라오는 바벨론과 반앗수르 연대를 자신의 회복과 동시에 바벨론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구축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하나님의 치유해주심의 기적과 함께 약속해 주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것 보다 바벨론과의 동맹에 더 정성을 쏟은 것이다.
유다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을 보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보물창고(은, 금, 향료와 향유)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은 이 정도라는 거다. 또 무기고와 창고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기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거다. 앗수르에게 함께 대항하는 유다는 이 정도 라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히스기야가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그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죽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이런 것이 히스기야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정작 자랑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못한다.
3.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을 깨우친 이사야(3-4절)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 시켰다. 선친 아하스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산헤립의 항복을 통보하는 모멸스러운 글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모습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펼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소외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절단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온다. 찾아온 자체 만으로도 히스기야는 뜨끔 했을 것이다. 이사야가 묻는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가? 또 재차 묻는다.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이들은 바벨론에서 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궁궐안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사야에게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 히스기야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히스기야는 어땠을까? 극적인 병에서의 회복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테다. 이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은 회복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문제중 한 가지인 앗수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앗수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이에 반앗수르 동맹들이 가시화 되고 있던 찰나, 바벨론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이잘 진행 되고 있다고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다. 반앗수르 동맹 조차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했어야 했다. 더구나 선친 아하스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펼쳤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주변 나라들과 이 문제를 펼쳐 놓고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3.하나님의 심판 선언(5-8절)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동맹삼아 더 의지하려 했던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그들이 자랑했던 재물(보물창고), 능력무기도, 창고)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매우 구체적인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에 대한 심판 선언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과오”로 기록된다. 그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바벨론 유수 심판이 결정된다. 이전부터 경고로 선언되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의지 하기로 결정한 히스기야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경험이 있음에도 바벨론 왕의 글과 선물에 취하여 사절단에게 동맹의 예를 갖추어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한 선친 아하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제 히스기야도 아버지 아하스가 갔던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이사야의 심판 선언 앞에 히스기야는 궁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새번역_8절).” 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게 될 것이 확정되는 장면이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극히 부패하여 기회를 주어도 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 나라와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철저한 심판”이 확정 되었다. 이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시작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자신이 통치하는 시간만 이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은 확정 되었다. 이제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야 회복이 옴을 바라봄으로 인내하며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견디는 자는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마 24:13)”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죽을 병에서 회복되고(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난 후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시험은 ‘자만’이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방문하자 히스기야는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의 모든 국고를 열어 젖혔다(1~2절). 오늘날 자기 자랑을 위해 소유(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심지어 부풀려 포장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자만하게 하는 상황이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주님꼐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마치 나의 능력과 역량으로 되어진 것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간혹 일어날 때, 히스기야와 같은 자기 자랑의 부심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 민망하다.
-본문을 묵상하며 계속 이어지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상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던 그가 이번에는(형통할 때는)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가 찾아와서 묻는다(3~4절). 삶의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다. 가장 평탄한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나 취소되지 않는다(5~7절).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15년의 시한부 생명을 뜻하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벨론과의 동맹을 의식한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믿었던 바벨론에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생전에 누리는 평안함과 견고함에 감사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그 후손들에게 곧 임할 것이며, 불신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런 근시안적인 태도와 마음을 보며 혹시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히스기야 이야기는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소유가 썩는 만큼 우리 영혼도 썩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 유다의 국력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가득 쌓인 보물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소유를 탐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결국 그 탐욕스러운 바벨론에게 유다는 먹힘을 당하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얼마나 의욕적으로 정사에 매달렸겠는가? 그리고 그 정사 중에서 당시 가장 큰 문제인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다. 하나님 없는 열심이 결국 심판 확정을 선고 받았다. 아하스 왕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시행하였던 성전청결도, 절기 회복의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없는 자기 결정”이라는 카운터펀치로 속절없이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다시 얻은 생명이기에 더욱 열심과 성의를 다하여 매달렸을 삶이었는데, 정작 자기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님 없는 열심”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정”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삶의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며 결정 했던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무너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스기야의 삶에서 가장 은혜가 충만했을 때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을 확정 받는다.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정작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펼치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펼쳐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삶이었지만 그 삶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재물, 자기 능력만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름은 온 간데 없구나….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왜 이리 낯설지 않은지….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의 인생을 펼쳐 놓고 더욱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 겸손하게 이 길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산다!
*비록 엄청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지만, 히스기야는 곧장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의 정당성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수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인정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히스기야의 잘못으로 이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기다림의 방법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윗 왕조가 모아놓은 재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후손들 중에는 환관이 되는 자도 나올 것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왕들을 그들이 바란 대로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중한 징벌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게 될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가장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묻고 또 물으며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평온한 일상이 가장 영적으로 느슨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을 인정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평온한 일상이 가장 영적으로 느슨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을 인정하며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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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02일
갈렙과 옷니엘의 승리와 유다 지파의 한계
[사사기 1:11-21]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따라 산지로 올라간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여호수아 사후 남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함께 싸워 쫓아낸 가나안 지역의 거점들을 중심으로 더욱 맹렬하게 약속의 땅을 공고히 다져야 했다. 또한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여 기업의 땅을 넓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본문은 갈렙과 옷니엘의 탁월한 활약상을 조명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여든다섯 살의 갈렙에게,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의 아낙 자손(거인족,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_10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이후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워 드빌 땅(기럇 세벨)을 차지했다. 문제는 유다지파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데 있다. 골짜기(평원 지대)는 ‘철병거’가 있어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철병거가 올라오지 못하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의미다. 정복 전쟁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 약속을 믿고 싸운 이들”이 받는 복이었다. 이는 끝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계신”(19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불안한 공존을 시작해야 했다.
참고로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이었다(수 15:1). 이 지역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로 머물렀던 곳으로, 예루살렘 남쪽과 헤브론, 브엘세바 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짐작건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특징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최남단 브엘세바의 경우 연 강수량이 불과 120~250mm였다. 장차 다윗 왕이 나올 지파인데, 그들이 거하는 땅은 이토록 척박하기만 했다. 왜일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왕이 나올 지파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높은 산지와 광야의 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전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곳, 인간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지역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장차 이스라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신앙이 뜨겁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다! 힘든 싸움은 애초에 회피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도,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도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다는 점이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에서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직면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창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사 시대를 뒤덮을 불안한 요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승전의 연속, 그러나(11~15절)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전보 소식 와중에 하나님의 시선이 갈렙 집안으로 모아진다. 본문 11~15절은 여호수아 15:13~19절과 거의 일치한다. 지파별로 각개 전투 식으로 진행되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가장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된 아낙 자손들(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던 헤브론과 그 일대, 특히 “드빌”(신탁, 성소), 본래 이름은 “기럇 세벨”(키르야트 세페르_책의 성읍)을 점령하는 이야기이다.
갈렙은 아낙 자손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성읍이었던 ‘드빌’을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악사’를 내걸고 전투 사기를 끌어올린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갈렙의 마음은 절박하고 확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점이 있다. 2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무도 올라가려 하지 않던 “아낙 자손”이 거하던 헤브론 지역을 두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고백하였던 온전한 믿음에, 균열이 간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시작한 일이 때로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다. 헤브론 지역을 점령해 가며 승승장구하던 갈렙에게 “드빌”의 “강력하고 견고한 성읍”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아낙 자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헤브론을 어처구니없게 잃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용사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성읍이었다. 저항이 강력했을 것이고, 갈렙은 이들의 완강한 항전에 고전했을 것이다.
난관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 여쭈어”(1절)야 했지만, 갈렙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걸고 나아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행동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렇게라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을 등장시키신다.
옷니엘은 어느 날 갑자기 사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가장 강력한 거인 족속들의 최후 항전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여 그 땅을 쟁취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는 사촌 악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의지하려는 믿음의 용맹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지에 몰린 아낙 자손들의 최후 항전을 온몸으로 맞서는 기개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렇다면 갈렙의 드빌(기럇 세벨) 정복기는, 훗날 사사로 세움받는 옷니엘을 등장시키는 무대가 맞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받고 바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면서 믿음의 도전과 실패, 포기하지 않는 응전이 겹겹이 쌓여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옷니엘은 무수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용기와 도전을 배워 낸 사람이다.
나의 믿음의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져지고 다져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된 믿음의 기개는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짓눌리지 않는다!
2. 갈렙, 옷니엘(악사), 겐 족속…
이들은 모두 정통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아니다. 갈렙과 옷니엘, 악사는 에서의 후손인 그나스 출신이었고,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미디안 족속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이었다. 민수기 10:29~32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방문 이후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잔류하였다.
유다 지파의 순혈 후손들이 유대 평지(골짜기)에서 헤매는 동안,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갈렙의 가족들이 아낙 자손들을 물리쳐 줌으로써, 유다 자손들이 시므온의 후손들과 함께 호르마와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해 나갔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을 믿는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 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을 주저 없이 쟁취하였다. 하나님은 순혈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오직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면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3. 철병거, 예루살렘 성(19~21절)
유다 지파는 산지는 점령하고 평지(골짜기_산과 산 사이)는 점령하지 못한다. “철병거” 때문이었다(19절). 또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21절). 견고한 요새 지형 때문이었다.
갈렙은 아낙 자손(거인 족속)의 거센 도전에도 당당히 승리를 쟁취해 나간 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신통치 못하다. 특히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지는 정복했으나 골짜기(평원)는 정복하지 못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받은 땅 가운데 가장 천혜의 요새인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철병거가 있으므로”(19절)라고 정확하게 기록한다. 철병거가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산지 지역은 점령했지만, 철병거가 위력을 발휘하는 평원 지역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철병거”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순종의 기운이 약하게 돋아나고 있다. 유다 지파의 산지에서의 승리가 불안한 이유다.
또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지역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사기의 저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표현인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불안정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을 너의 손에 넘겨 주었다”(2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데도, 베냐민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보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이 더 크게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지리적 조건과 환경이 더 커 보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게만 국한되겠는가? 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철병거를 크게 보는 위축된 마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다.
나는?
-우상 숭배자 아도니 베섹에게는 수족이 잘린 채 예루살렘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전쟁에 나선 옷니엘에게는 가나안의 풍요(땅과 샘)를 선물로 주신다. 이처럼 가나안의 삶은 그 땅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린 것이다.
-유다 지파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어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여 악사를 아내로 받는다(11~13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신뢰하고 용기 있게 순종의 길에 나서는 자들의 몫이다. 갈렙은 단호했다.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했던 그는,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정복 전쟁을 완수한 이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할 만큼 확고했다. 그는 승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옷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장부를 사위로 얻게 된다.
-악사는 남편 옷니엘을 설득하여 아버지 갈렙에게 땅을 요구하게 한다. 그리고 악사 역시 아버지께 극진한 경의를 표한 후에(14절) ‘샘’을 요구하여 받아 낸다. 받은 땅은 강수량이 부족한 남방 지역이라 샘물이 꼭 필요했다. 이렇게 용감한 옷니엘과 지혜로운 악사가 받은 ‘땅과 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가나안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준다. 아버지 갈렙의 넉넉함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함을 반영한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겸손하게 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늘 우리 기대 이상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약속대로 모세의 장인 겐 족속의 가나안 정착을 보장하고, 갈렙에게는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다. 유다 지파는 형제 시므온과 함께 호르마를 정복했고,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까지 점령한다.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승리가 있었다.
-유다는 철병거를 당해 내지 못하여 서쪽 지역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베냐민도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여 함께 거주한다(19~21절).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해변 길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 정복이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전력’이 아니라 ‘약속'(수 17:18)에 대한 믿음이다.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이스라엘의 순종이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과 이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타협이 가져올 심대한 영적 오염에 대해 그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적 태만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머잖아 국가적 재난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주 미미한 틈이 붕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고 모세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 땅을 갈렙에게 준다(20절). ‘정복’만이 아니라 땅을 ‘분배’하는 일에서도 순종한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철병거와 견고한 장벽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새가슴 믿음이 문제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순혈주의가 아니었다. 이방인에 대하여 폐쇄된 민족이 아니었다. 갈렙의 활약과 옷니엘의 등장은 폐쇄된 순혈주의 집단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 언제든지 믿음의 용사가 우뚝 설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있었고, 갈렙의 뒤를 이을 옷니엘이 나타났다. 우리 공동체는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충분한가?
-언제든지 새롭게 공동체로 들어온 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기회가 주어지는 개방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이런 어울림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승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점령해야 할 땅이었지만,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쫓아내지 못한 이들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영역이어야 할 그 땅에, 석연찮은 불순종으로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사사 시대는 가나안 땅 정복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그때부터 이미 그 불안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렙과 옷니엘의 완전한 승리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온전히 쫓아내지 못한 승리가 비교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여든다섯 살의 갈렙에게,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의 아낙 자손(거인족,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_10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이후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워 드빌 땅(기럇 세벨)을 차지했다. 문제는 유다지파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데 있다. 골짜기(평원 지대)는 ‘철병거’가 있어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철병거가 올라오지 못하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의미다. 정복 전쟁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 약속을 믿고 싸운 이들”이 받는 복이었다. 이는 끝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계신”(19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불안한 공존을 시작해야 했다.
참고로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이었다(수 15:1). 이 지역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로 머물렀던 곳으로, 예루살렘 남쪽과 헤브론, 브엘세바 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짐작건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특징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최남단 브엘세바의 경우 연 강수량이 불과 120~250mm였다. 장차 다윗 왕이 나올 지파인데, 그들이 거하는 땅은 이토록 척박하기만 했다. 왜일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왕이 나올 지파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높은 산지와 광야의 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전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곳, 인간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지역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장차 이스라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신앙이 뜨겁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다! 힘든 싸움은 애초에 회피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도,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도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다는 점이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에서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직면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창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사 시대를 뒤덮을 불안한 요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승전의 연속, 그러나(11~15절)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전보 소식 와중에 하나님의 시선이 갈렙 집안으로 모아진다. 본문 11~15절은 여호수아 15:13~19절과 거의 일치한다. 지파별로 각개 전투 식으로 진행되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가장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된 아낙 자손들(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던 헤브론과 그 일대, 특히 “드빌”(신탁, 성소), 본래 이름은 “기럇 세벨”(키르야트 세페르_책의 성읍)을 점령하는 이야기이다.
갈렙은 아낙 자손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성읍이었던 ‘드빌’을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악사’를 내걸고 전투 사기를 끌어올린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갈렙의 마음은 절박하고 확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점이 있다. 2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무도 올라가려 하지 않던 “아낙 자손”이 거하던 헤브론 지역을 두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고백하였던 온전한 믿음에, 균열이 간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시작한 일이 때로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다. 헤브론 지역을 점령해 가며 승승장구하던 갈렙에게 “드빌”의 “강력하고 견고한 성읍”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아낙 자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헤브론을 어처구니없게 잃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용사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성읍이었다. 저항이 강력했을 것이고, 갈렙은 이들의 완강한 항전에 고전했을 것이다.
난관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 여쭈어”(1절)야 했지만, 갈렙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걸고 나아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행동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렇게라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을 등장시키신다.
옷니엘은 어느 날 갑자기 사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가장 강력한 거인 족속들의 최후 항전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여 그 땅을 쟁취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는 사촌 악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의지하려는 믿음의 용맹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지에 몰린 아낙 자손들의 최후 항전을 온몸으로 맞서는 기개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렇다면 갈렙의 드빌(기럇 세벨) 정복기는, 훗날 사사로 세움받는 옷니엘을 등장시키는 무대가 맞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받고 바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면서 믿음의 도전과 실패, 포기하지 않는 응전이 겹겹이 쌓여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옷니엘은 무수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용기와 도전을 배워 낸 사람이다.
나의 믿음의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져지고 다져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된 믿음의 기개는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짓눌리지 않는다!
2. 갈렙, 옷니엘(악사), 겐 족속…
이들은 모두 정통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아니다. 갈렙과 옷니엘, 악사는 에서의 후손인 그나스 출신이었고,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미디안 족속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이었다. 민수기 10:29~32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방문 이후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잔류하였다.
유다 지파의 순혈 후손들이 유대 평지(골짜기)에서 헤매는 동안,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갈렙의 가족들이 아낙 자손들을 물리쳐 줌으로써, 유다 자손들이 시므온의 후손들과 함께 호르마와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해 나갔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을 믿는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 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을 주저 없이 쟁취하였다. 하나님은 순혈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오직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면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3. 철병거, 예루살렘 성(19~21절)
유다 지파는 산지는 점령하고 평지(골짜기_산과 산 사이)는 점령하지 못한다. “철병거” 때문이었다(19절). 또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21절). 견고한 요새 지형 때문이었다.
갈렙은 아낙 자손(거인 족속)의 거센 도전에도 당당히 승리를 쟁취해 나간 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신통치 못하다. 특히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지는 정복했으나 골짜기(평원)는 정복하지 못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받은 땅 가운데 가장 천혜의 요새인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철병거가 있으므로”(19절)라고 정확하게 기록한다. 철병거가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산지 지역은 점령했지만, 철병거가 위력을 발휘하는 평원 지역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철병거”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순종의 기운이 약하게 돋아나고 있다. 유다 지파의 산지에서의 승리가 불안한 이유다.
또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지역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사기의 저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표현인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불안정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을 너의 손에 넘겨 주었다”(2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데도, 베냐민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보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이 더 크게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지리적 조건과 환경이 더 커 보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게만 국한되겠는가? 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철병거를 크게 보는 위축된 마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다.
나는?
-우상 숭배자 아도니 베섹에게는 수족이 잘린 채 예루살렘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전쟁에 나선 옷니엘에게는 가나안의 풍요(땅과 샘)를 선물로 주신다. 이처럼 가나안의 삶은 그 땅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린 것이다.
-유다 지파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어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여 악사를 아내로 받는다(11~13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신뢰하고 용기 있게 순종의 길에 나서는 자들의 몫이다. 갈렙은 단호했다.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했던 그는,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정복 전쟁을 완수한 이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할 만큼 확고했다. 그는 승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옷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장부를 사위로 얻게 된다.
-악사는 남편 옷니엘을 설득하여 아버지 갈렙에게 땅을 요구하게 한다. 그리고 악사 역시 아버지께 극진한 경의를 표한 후에(14절) ‘샘’을 요구하여 받아 낸다. 받은 땅은 강수량이 부족한 남방 지역이라 샘물이 꼭 필요했다. 이렇게 용감한 옷니엘과 지혜로운 악사가 받은 ‘땅과 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가나안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준다. 아버지 갈렙의 넉넉함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함을 반영한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겸손하게 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늘 우리 기대 이상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약속대로 모세의 장인 겐 족속의 가나안 정착을 보장하고, 갈렙에게는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다. 유다 지파는 형제 시므온과 함께 호르마를 정복했고,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까지 점령한다.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승리가 있었다.
-유다는 철병거를 당해 내지 못하여 서쪽 지역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베냐민도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여 함께 거주한다(19~21절).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해변 길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 정복이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전력’이 아니라 ‘약속'(수 17:18)에 대한 믿음이다.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이스라엘의 순종이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과 이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타협이 가져올 심대한 영적 오염에 대해 그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적 태만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머잖아 국가적 재난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주 미미한 틈이 붕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고 모세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 땅을 갈렙에게 준다(20절). ‘정복’만이 아니라 땅을 ‘분배’하는 일에서도 순종한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철병거와 견고한 장벽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새가슴 믿음이 문제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순혈주의가 아니었다. 이방인에 대하여 폐쇄된 민족이 아니었다. 갈렙의 활약과 옷니엘의 등장은 폐쇄된 순혈주의 집단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 언제든지 믿음의 용사가 우뚝 설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있었고, 갈렙의 뒤를 이을 옷니엘이 나타났다. 우리 공동체는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충분한가?
-언제든지 새롭게 공동체로 들어온 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기회가 주어지는 개방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이런 어울림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승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점령해야 할 땅이었지만,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쫓아내지 못한 이들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영역이어야 할 그 땅에, 석연찮은 불순종으로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사사 시대는 가나안 땅 정복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그때부터 이미 그 불안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렙과 옷니엘의 완전한 승리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온전히 쫓아내지 못한 승리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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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01일
누가 올라가리이까?
[사사기 1:1-10]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정복 전쟁(수 2~12장)에 임했고, 그 결과로 얻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수 13~19장). ‘가나안 정복 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삿 1:1) ‘사사 시대’로 전환되어 간다. 본문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복 전쟁을 이어 가던 그들이 어떻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로 기울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삶을 사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사기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사모해 본다.
1장은 사사기 전체 구조에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전쟁 이야기와 배교를 묘사하며, 이어서 등장할 중심 이야기의 문학적 틀을 제공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가나안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고, 유다가 가장 먼저 올라가서 자신의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다는 시므온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섹과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성공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는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지금까지는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가나안 정복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호수아 생전에 가나안을 완벽하게 정복하지는 못했다. 남은 지역에 대한 정복 임무는 이제 그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에게 일임되었다. 사사기는 그 임무를 맡은 지파들이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하는 기사로 시작한다.
사사기(쇼페팀, Judges/재판관들)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약 350여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의 기록이며, 주전 1050~10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유대의 전승은 사무엘을 저자로 전하지만, 사무엘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기간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에서 사무엘로 이어지는 시기, 지도력이 유다 지파로 옮겨지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라는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사사기 묵상의 여정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하는지 깨달아, 이런 악행에서 돌이켜 그 하나님을 더욱 내밀하게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펼쳐지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광야를 오롯이 견뎌 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후 갈렙과 함께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그가 죽었다. 리더십의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한 문제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분배받은 지파들이 끝까지 싸워 차지하라고 당부했다(수 23:5). 가나안 정복 전쟁 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단합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던 불세출의 인간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절)”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앞서 하나님께 여쭙는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따라(2절) 유다가 올라간다. 그런데 유다는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요청한다. 그러자 시므온도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한다(3절). 이게 뭔가 싶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지혜롭게 연합하여 싸운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전쟁의 판세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력한 지파였고, 시므온은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하였다. 유다 지파만 올라가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 지파가 제비 뽑아 차지한 땅은 유대 산지 남쪽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시므온 지파는 그 안의 일부 지역을 분배받았다. 형세로 본다면 유다 지파의 땅 안에 시므온 지파가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추측하기로 유다 지파는 가장 약한 시므온 지파를 배려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3절) 하지 않아도 될 연합과 연대를 해 준 것이다.
유다와 시므온이 먼저 올라가서 차지한 땅은 유다에게 배정된 땅이기에 유다 지파만의 힘으로 먼저 올라가 차지해야 옳다. 그럼에도 그의 형제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베냐민 지파와의 경계인 북쪽의 예루살렘 지역과 남쪽의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는 쾌거를 올린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가 지금 차지한 땅은 가나안 중남부 지역으로, 장차 다윗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속적인 국지전이 일어나게 될 장소이다. 지금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인 베섹을 차지하고 이어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 산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다윗이 완전하게 평정할 때까지 블레셋 족속과 뺏고 빼앗기는 진흙탕 같은 국지전이 지속되었다. 결국 다윗의 왕권이 서기까지 이 땅은 블레셋 족속의 끊임없는 도발을 감내해야 할 곳이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출한 지도자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한 명의 지도자를 하나님께 돌려보내며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붙든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다. 안정적으로 믿음의 여정을 이끈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40여 년 전 시내산에서 늘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을 도우신다.
그럼에도 지도자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 허전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차지해야 할 땅 앞에서 함께하시는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
2. 위기, 그러나 굳건하게(1~3절)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으니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을까? 당연히 제사장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성막이 임시로 머물던 실로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성막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을 따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없는 시대, 그의 부재가 겉으로 드러날 때에도 공백을 느낄 틈이 없었다. 영원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뜻을 구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는 물리치지 못한 족속들이 있었고 차지해야 할 땅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미 세워진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성막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니 딱히 여호수아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지하지 못한 땅을 치러 올라가려 할 때에는 누군가가 결정해야 했고, 그 누군가의 통솔을 따라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아마도, 모세와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리더십이 세습되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제비 뽑아 분배받은 땅의 주인 지파가 올라가라 하신다. 이렇게 중요한 시대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할 여호수아가 없다. 그의 지도력이 누구에게 이양되어야 하는지 정해지지도 않은 채 여호수아가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결정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출난 지도자보다, 각 지파가 힘을 합하여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즉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분배받은 유다 산지의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 위해 누가 올라갈지를 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분배받은 유다 지파가 올라가야 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을 통해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사사기의 시작은 이런 믿음의 자세가 이어지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감보다 산적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있었기에, 리더십의 부재를 느낄 새 없이 맞선다. 하지만 모세가 그렇게 했고 여호수아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믿음에 이상이 없다!
리더십이 부재할 때 직면하는 문제, 하나님께 여쭙고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해야지…… 사람을 바라볼 때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쭐 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도력이 상실될 때 찾아오지만,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이양되는 시기를 거쳐도 흔들리는 것이 사회이다. 하물며 인생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라고 다를까! 그럼에도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동체이기에 걱정 없다. 그래서 더온누리교회도 걱정 없다.
3.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4~10절)
유다와 시므온은 승승장구하였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새번역_2절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약속하신 대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4절)”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런데 우려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사사기의 전체 주제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이 여기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베섹의 주인)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린다(6절).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잘림을 당한 아도니 베섹의 한탄에서 발견되듯 가나안 족속들의 잔인한 전쟁 문화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땅의 잔인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 민족들의 행태를 따라가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우려스럽게도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민족의 지도자, 가나안 정복의 선봉자, 신실한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가 죽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분명하다. 충분히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남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어떤 지파가 나서야 할지 하나님께 여쭙는다(1절). 눈에 보이는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낙망의 자리가 아닌 사명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 낼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향해 가나안 족속과 싸우러 올라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레아에게서 난 동복형제이자 인접한 지파인 시므온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2~3절). 명분 있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릇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다. 지금은 사소한 것에 그치지만, 사사기 끝에 이르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주님은 더 나은 명분보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시지 않을까? 순종보다 더 명분 있는 일은 없다.
-유다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기고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 한때 일흔 명의 왕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게 하여 수치를 주던 아도니 베섹은 똑같은 수모를 당한 후 예루살렘에서 죽는다. 그는 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악행을 갚으셨다고 말한다(4~7절). 그는 생명의 땅, 약속의 땅에서라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에는 죽음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떠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내 모든 삶의 조건은 ‘혼돈’이 되고 말 것이다.
-유다 지파는 승승장구한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우고, 헤브론의 가나안 족속도 정복한다(8~10절). 그래서 그 땅이 유다의 기업(소유)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먼저 묻고,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곳에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다.
-본문을 묵상하며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을 보게 된다. 힘이 강한 지파가 가장 열악한 지파와 연합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유다 지파의 땅에 인접한 시므온 지파에게도 강력한 위협이 되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지역의 대적을 함께 제거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훗날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시므온 단독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할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들도 시므온의 전쟁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자의 배려인가?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러 올라가겠다(새번역_3절).”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공동체와 공동체가 연합할 때 먼저 힘 있는 공동체가 연약한 공동체를 배려하는 법을 유다 지파에게서 배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연합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지역의 교회들을 섬길 때 이런 정신을 기억하고 감당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부정적으로 보면 유다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의 모습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지파를 향해 올라가라고 명하셨으나.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간 것은 그들의 힘을 키우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동복 형제인 시므온에 대한 애착과 배려로 실행했을 것이지만,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라는 틈이 사사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아도니 베섹의 엄지 손가락을 자른 것과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 것도 하나님의 전쟁 방식이 아니었다. 아도니 베섹이 ’70명의 왕들에게 저지른 일을 그대로 당한다’고 절규한 것은 유다 지파의 전쟁 방식이 가나안화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틈이 가나안화를 촉발시켰다.
-지금 한국 교회는 리더십의 교체가 활발하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몇 해 전 이 과정을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나의 목회 여정에 함께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의 목회 여정도 걱정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서 나의 영원한 기업, 나의 영원한 목자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주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더욱 잘 물으면 된다. 묻고 순종하면 된다.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는 것으로 사사기의 서사가 시작된다. 신뢰하고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땅,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쭙는다. 인간 지도자의 자리는 비었으나, 진정한 참 지도자 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낙망의 자리가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적인 지도자의 부재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더 깊고 더 넓은 신앙의 지경이 펼쳐진다.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기업 안에 있던 시므온 지파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그리고 싸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긴다. 하지만 진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적장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거기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은 작은 타협과 불순종이 전면적인 타락과 국가적 재난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주신다. 일흔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게 한 잔혹한 아도니 베섹을 이기게 하신다. 북으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남으로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 헤브론까지 장악하게 하신다. 걸출한 여호수아라는 인간 지도자의 죽음에도 역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사사기가 시작된 것이다.
1장은 사사기 전체 구조에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전쟁 이야기와 배교를 묘사하며, 이어서 등장할 중심 이야기의 문학적 틀을 제공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가나안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고, 유다가 가장 먼저 올라가서 자신의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다는 시므온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섹과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성공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는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지금까지는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가나안 정복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호수아 생전에 가나안을 완벽하게 정복하지는 못했다. 남은 지역에 대한 정복 임무는 이제 그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에게 일임되었다. 사사기는 그 임무를 맡은 지파들이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하는 기사로 시작한다.
사사기(쇼페팀, Judges/재판관들)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약 350여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의 기록이며, 주전 1050~10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유대의 전승은 사무엘을 저자로 전하지만, 사무엘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기간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에서 사무엘로 이어지는 시기, 지도력이 유다 지파로 옮겨지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라는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사사기 묵상의 여정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하는지 깨달아, 이런 악행에서 돌이켜 그 하나님을 더욱 내밀하게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펼쳐지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광야를 오롯이 견뎌 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후 갈렙과 함께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그가 죽었다. 리더십의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한 문제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분배받은 지파들이 끝까지 싸워 차지하라고 당부했다(수 23:5). 가나안 정복 전쟁 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단합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던 불세출의 인간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절)”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앞서 하나님께 여쭙는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따라(2절) 유다가 올라간다. 그런데 유다는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요청한다. 그러자 시므온도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한다(3절). 이게 뭔가 싶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지혜롭게 연합하여 싸운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전쟁의 판세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력한 지파였고, 시므온은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하였다. 유다 지파만 올라가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 지파가 제비 뽑아 차지한 땅은 유대 산지 남쪽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시므온 지파는 그 안의 일부 지역을 분배받았다. 형세로 본다면 유다 지파의 땅 안에 시므온 지파가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추측하기로 유다 지파는 가장 약한 시므온 지파를 배려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3절) 하지 않아도 될 연합과 연대를 해 준 것이다.
유다와 시므온이 먼저 올라가서 차지한 땅은 유다에게 배정된 땅이기에 유다 지파만의 힘으로 먼저 올라가 차지해야 옳다. 그럼에도 그의 형제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베냐민 지파와의 경계인 북쪽의 예루살렘 지역과 남쪽의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는 쾌거를 올린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가 지금 차지한 땅은 가나안 중남부 지역으로, 장차 다윗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속적인 국지전이 일어나게 될 장소이다. 지금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인 베섹을 차지하고 이어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 산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다윗이 완전하게 평정할 때까지 블레셋 족속과 뺏고 빼앗기는 진흙탕 같은 국지전이 지속되었다. 결국 다윗의 왕권이 서기까지 이 땅은 블레셋 족속의 끊임없는 도발을 감내해야 할 곳이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출한 지도자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한 명의 지도자를 하나님께 돌려보내며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붙든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다. 안정적으로 믿음의 여정을 이끈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40여 년 전 시내산에서 늘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을 도우신다.
그럼에도 지도자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 허전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차지해야 할 땅 앞에서 함께하시는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
2. 위기, 그러나 굳건하게(1~3절)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으니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을까? 당연히 제사장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성막이 임시로 머물던 실로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성막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을 따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없는 시대, 그의 부재가 겉으로 드러날 때에도 공백을 느낄 틈이 없었다. 영원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뜻을 구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는 물리치지 못한 족속들이 있었고 차지해야 할 땅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미 세워진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성막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니 딱히 여호수아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지하지 못한 땅을 치러 올라가려 할 때에는 누군가가 결정해야 했고, 그 누군가의 통솔을 따라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아마도, 모세와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리더십이 세습되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제비 뽑아 분배받은 땅의 주인 지파가 올라가라 하신다. 이렇게 중요한 시대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할 여호수아가 없다. 그의 지도력이 누구에게 이양되어야 하는지 정해지지도 않은 채 여호수아가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결정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출난 지도자보다, 각 지파가 힘을 합하여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즉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분배받은 유다 산지의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 위해 누가 올라갈지를 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분배받은 유다 지파가 올라가야 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을 통해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사사기의 시작은 이런 믿음의 자세가 이어지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감보다 산적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있었기에, 리더십의 부재를 느낄 새 없이 맞선다. 하지만 모세가 그렇게 했고 여호수아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믿음에 이상이 없다!
리더십이 부재할 때 직면하는 문제, 하나님께 여쭙고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해야지…… 사람을 바라볼 때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쭐 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도력이 상실될 때 찾아오지만,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이양되는 시기를 거쳐도 흔들리는 것이 사회이다. 하물며 인생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라고 다를까! 그럼에도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동체이기에 걱정 없다. 그래서 더온누리교회도 걱정 없다.
3.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4~10절)
유다와 시므온은 승승장구하였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새번역_2절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약속하신 대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4절)”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런데 우려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사사기의 전체 주제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이 여기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베섹의 주인)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린다(6절).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잘림을 당한 아도니 베섹의 한탄에서 발견되듯 가나안 족속들의 잔인한 전쟁 문화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땅의 잔인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 민족들의 행태를 따라가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우려스럽게도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민족의 지도자, 가나안 정복의 선봉자, 신실한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가 죽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분명하다. 충분히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남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어떤 지파가 나서야 할지 하나님께 여쭙는다(1절). 눈에 보이는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낙망의 자리가 아닌 사명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 낼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향해 가나안 족속과 싸우러 올라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레아에게서 난 동복형제이자 인접한 지파인 시므온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2~3절). 명분 있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릇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다. 지금은 사소한 것에 그치지만, 사사기 끝에 이르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주님은 더 나은 명분보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시지 않을까? 순종보다 더 명분 있는 일은 없다.
-유다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기고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 한때 일흔 명의 왕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게 하여 수치를 주던 아도니 베섹은 똑같은 수모를 당한 후 예루살렘에서 죽는다. 그는 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악행을 갚으셨다고 말한다(4~7절). 그는 생명의 땅, 약속의 땅에서라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에는 죽음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떠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내 모든 삶의 조건은 ‘혼돈’이 되고 말 것이다.
-유다 지파는 승승장구한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우고, 헤브론의 가나안 족속도 정복한다(8~10절). 그래서 그 땅이 유다의 기업(소유)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먼저 묻고,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곳에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다.
-본문을 묵상하며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을 보게 된다. 힘이 강한 지파가 가장 열악한 지파와 연합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유다 지파의 땅에 인접한 시므온 지파에게도 강력한 위협이 되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지역의 대적을 함께 제거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훗날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시므온 단독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할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들도 시므온의 전쟁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자의 배려인가?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러 올라가겠다(새번역_3절).”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공동체와 공동체가 연합할 때 먼저 힘 있는 공동체가 연약한 공동체를 배려하는 법을 유다 지파에게서 배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연합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지역의 교회들을 섬길 때 이런 정신을 기억하고 감당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부정적으로 보면 유다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의 모습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지파를 향해 올라가라고 명하셨으나.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간 것은 그들의 힘을 키우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동복 형제인 시므온에 대한 애착과 배려로 실행했을 것이지만,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라는 틈이 사사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아도니 베섹의 엄지 손가락을 자른 것과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 것도 하나님의 전쟁 방식이 아니었다. 아도니 베섹이 ’70명의 왕들에게 저지른 일을 그대로 당한다’고 절규한 것은 유다 지파의 전쟁 방식이 가나안화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틈이 가나안화를 촉발시켰다.
-지금 한국 교회는 리더십의 교체가 활발하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몇 해 전 이 과정을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나의 목회 여정에 함께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의 목회 여정도 걱정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서 나의 영원한 기업, 나의 영원한 목자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주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더욱 잘 물으면 된다. 묻고 순종하면 된다.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는 것으로 사사기의 서사가 시작된다. 신뢰하고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땅,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쭙는다. 인간 지도자의 자리는 비었으나, 진정한 참 지도자 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낙망의 자리가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적인 지도자의 부재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더 깊고 더 넓은 신앙의 지경이 펼쳐진다.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기업 안에 있던 시므온 지파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그리고 싸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긴다. 하지만 진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적장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거기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은 작은 타협과 불순종이 전면적인 타락과 국가적 재난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주신다. 일흔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게 한 잔혹한 아도니 베섹을 이기게 하신다. 북으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남으로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 헤브론까지 장악하게 하신다. 걸출한 여호수아라는 인간 지도자의 죽음에도 역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사사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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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31일
아…. _ 히스기야의 과오와 바벨론 사절단 방문의 교훈
[이사야 39:1-8]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기적적으로 구출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죽을 병에서 극적으로 치유를 받는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히스기야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로단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가 다시금 여호와를 떠나 동맹정치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경험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버린다.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경험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잊는다. 그는 여호와의 인정보다 바벨론 왕의 인정을 선택한다.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는 바벨론과의 동맹 정치를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의 과오가 유다의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그래도 그는 이사야의 고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올무에 걸렸다. 깊은 병에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히스기야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 되었다는 소문은 금새 주변국들에게 퍼졌다. 그 소식이 바벨론에게까지 전달 되었나보다. ‘므로닥발라단’이 친서와 예물을 준비하여 사절단을 보내 축하해 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호의가 정말 호의일까 싶다. 가까운 주변국도 아니고 앗수르와 대치중인 머나먼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본문에서는 그들을 맞이한 히스기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 배경이해(1절)
이 구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통치 연대와 사건을 정리하면, 그의 치유 이야기(38장)와 바벨론 사절 이야기(39장)은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주전 701년, 36~37장)보다 적어도 삼 년에서 십이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된다. 이 부분의 서사(38장+39장+36~37장)는 연대순 배열이 아닌 것이다. 즉, 의도적 배열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읽는다면 히스기야의 치유(38장)는 예루살렘의 구원에서(36~37장) 정점에 이르고, 바벨론을 통한 징계의 이야기는(39장) 사건적으로 관련 없는 앗수르를 통한 예루살렘의 침략 서사(36~37장)에 의해 단절된 에피소드가 된다. 이는 38:6의 약속은 주전 701년의 구원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약속이 되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약속과 성취’ 사이에 시대적 연관성을 제외하고 아무 관련 없는 ‘바벨론에 의한 징벌’이 놓이게 된다. 반면 현재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이 된다. 38~39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구원(36~37장)으로 종결되지 않고 열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궁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의 후손들이 37~38장에 기술된 히스기야를 본받는다면 다시 주어질 수도 있는 구원사인 것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보여준 히스기야를 책망하여 그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8장에서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유배의 심판이 선고된다. 39장의 심판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38:6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8장의 구원이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이 충돌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다.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떠나 바벨론에 의지할 때 과거의 구원 경험은 과거의 추억에 마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매달릴 때 약속은 성취된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보면 39장의 심판은 주전 701년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36~37장)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약속(38장) 저 너머에 있는, 그러나 40장 이하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2.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힘을 과시한 히스기야(2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새번역_2절).’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 무기고, 창고’를 둘러보게 한다.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 음… 보물창고는 그렇다 쳐도 무기고를 보여주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선친 아하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취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앗수르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신흥 세력이었다. 몰론 남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국력을 이때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와 경쟁할 정도로 힘이 올라오는 바벨론과 반앗수르 연대를 자신의 회복과 동시에 바벨론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구축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하나님의 치유해주심의 기적과 함께 약속해 주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것 보다 바벨론과의 동맹에 더 정성을 쏟은 것이다.
유다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을 보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보물창고(은, 금, 향료와 향유)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은 이 정도라는 거다. 또 무기고와 창고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기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거다. 앗수르에게 함께 대항하는 유다는 이 정도 라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히스기야가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그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죽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이런 것이 히스기야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정작 자랑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못한다.
3.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을 깨우친 이사야(3-4절)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 시켰다. 선친 아하스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산헤립의 항복을 통보하는 모멸스러운 글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모습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펼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소외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절단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온다. 찾아온 자체 만으로도 히스기야는 뜨끔 했을 것이다. 이사야가 묻는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가? 또 재차 묻는다.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이들은 바벨론에서 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궁궐안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사야에게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 히스기야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히스기야는 어땠을까? 극적인 병에서의 회복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테다. 이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은 회복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문제중 한 가지인 앗수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앗수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이에 반앗수르 동맹들이 가시화 되고 있던 찰나, 바벨론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이잘 진행 되고 있다고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다. 반앗수르 동맹 조차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했어야 했다. 더구나 선친 아하스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펼쳤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주변 나라들과 이 문제를 펼쳐 놓고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3.하나님의 심판 선언(5-8절)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동맹삼아 더 의지하려 했던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그들이 자랑했던 재물(보물창고), 능력무기도, 창고)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매우 구체적인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에 대한 심판 선언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과오”로 기록된다. 그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바벨론 유수 심판이 결정된다. 이전부터 경고로 선언되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의지 하기로 결정한 히스기야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경험이 있음에도 바벨론 왕의 글과 선물에 취하여 사절단에게 동맹의 예를 갖추어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한 선친 아하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제 히스기야도 아버지 아하스가 갔던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이사야의 심판 선언 앞에 히스기야는 궁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새번역_8절).” 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게 될 것이 확정되는 장면이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극히 부패하여 기회를 주어도 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 나라와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철저한 심판”이 확정 되었다. 이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시작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자신이 통치하는 시간만 이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은 확정 되었다. 이제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야 회복이 옴을 바라봄으로 인내하며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견디는 자는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마 24:13)”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죽을 병에서 회복되고(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난 후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시험은 ‘자만’이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방문하자 히스기야는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의 모든 국고를 열어 젖혔다(1~2절). 오늘날 자기 자랑을 위해 소유(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심지어 부풀려 포장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자만하게 하는 상황이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주님꼐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마치 나의 능력과 역량으로 되어진 것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간혹 일어날 때, 히스기야와 같은 자기 자랑의 부심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 민망하다.
-본문을 묵상하며 계속 이어지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상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던 그가 이번에는(형통할 때는)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가 찾아와서 묻는다(3~4절). 삶의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다. 가장 평탄한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나 취소되지 않는다(5~7절).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15년의 시한부 생명을 뜻하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벨론과의 동맹을 의식한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믿었던 바벨론에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생전에 누리는 평안함과 견고함에 감사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그 후손들에게 곧 임할 것이며, 불신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런 근시안적인 태도와 마음을 보며 혹시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히스기야 이야기는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소유가 썩는 만큼 우리 영혼도 썩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 유다의 국력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가득 쌓인 보물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소유를 탐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결국 그 탐욕스러운 바벨론에게 유다는 먹힘을 당하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얼마나 의욕적으로 정사에 매달렸겠는가? 그리고 그 정사 중에서 당시 가장 큰 문제인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다. 하나님 없는 열심이 결국 심판 확정을 선고 받았다. 아하스 왕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시행하였던 성전청결도, 절기 회복의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없는 자기 결정”이라는 카운터펀치로 속절없이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다시 얻은 생명이기에 더욱 열심과 성의를 다하여 매달렸을 삶이었는데, 정작 자기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님 없는 열심”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정”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삶의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며 결정 했던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무너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스기야의 삶에서 가장 은혜가 충만했을 때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을 확정 받는다.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정작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펼치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펼쳐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삶이었지만 그 삶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재물, 자기 능력만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름은 온 간데 없구나….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왜 이리 낯설지 않은지….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의 인생을 펼쳐 놓고 더욱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 겸손하게 이 길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산다!
*비록 엄청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지만, 히스기야는 곧장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의 정당성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수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인정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히스기야의 잘못으로 이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기다림의 방법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윗 왕조가 모아놓은 재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후손들 중에는 환관이 되는 자도 나올 것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왕들을 그들이 바란 대로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중한 징벌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게 될 것이다.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경험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잊는다. 그는 여호와의 인정보다 바벨론 왕의 인정을 선택한다.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는 바벨론과의 동맹 정치를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의 과오가 유다의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그래도 그는 이사야의 고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올무에 걸렸다. 깊은 병에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히스기야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 되었다는 소문은 금새 주변국들에게 퍼졌다. 그 소식이 바벨론에게까지 전달 되었나보다. ‘므로닥발라단’이 친서와 예물을 준비하여 사절단을 보내 축하해 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호의가 정말 호의일까 싶다. 가까운 주변국도 아니고 앗수르와 대치중인 머나먼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본문에서는 그들을 맞이한 히스기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 배경이해(1절)
이 구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의 통치 연대와 사건을 정리하면, 그의 치유 이야기(38장)와 바벨론 사절 이야기(39장)은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주전 701년, 36~37장)보다 적어도 삼 년에서 십이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된다. 이 부분의 서사(38장+39장+36~37장)는 연대순 배열이 아닌 것이다. 즉, 의도적 배열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읽는다면 히스기야의 치유(38장)는 예루살렘의 구원에서(36~37장) 정점에 이르고, 바벨론을 통한 징계의 이야기는(39장) 사건적으로 관련 없는 앗수르를 통한 예루살렘의 침략 서사(36~37장)에 의해 단절된 에피소드가 된다. 이는 38:6의 약속은 주전 701년의 구원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약속이 되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약속과 성취’ 사이에 시대적 연관성을 제외하고 아무 관련 없는 ‘바벨론에 의한 징벌’이 놓이게 된다. 반면 현재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이 된다. 38~39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구원(36~37장)으로 종결되지 않고 열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경험한 궁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의 후손들이 37~38장에 기술된 히스기야를 본받는다면 다시 주어질 수도 있는 구원사인 것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보여준 히스기야를 책망하여 그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8장에서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유배의 심판이 선고된다. 39장의 심판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38:6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8장의 구원이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이 충돌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다.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떠나 바벨론에 의지할 때 과거의 구원 경험은 과거의 추억에 마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매달릴 때 약속은 성취된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교리가 될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보면 39장의 심판은 주전 701년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36~37장)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약속(38장) 저 너머에 있는, 그러나 40장 이하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2.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힘을 과시한 히스기야(2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새번역_2절).’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 무기고, 창고’를 둘러보게 한다.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 음… 보물창고는 그렇다 쳐도 무기고를 보여주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선친 아하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취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앗수르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신흥 세력이었다. 몰론 남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국력을 이때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와 경쟁할 정도로 힘이 올라오는 바벨론과 반앗수르 연대를 자신의 회복과 동시에 바벨론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구축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하나님의 치유해주심의 기적과 함께 약속해 주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것 보다 바벨론과의 동맹에 더 정성을 쏟은 것이다.
유다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을 보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보물창고(은, 금, 향료와 향유)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은 이 정도라는 거다. 또 무기고와 창고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기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거다. 앗수르에게 함께 대항하는 유다는 이 정도 라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히스기야가 나는 애처롭게 보인다. 그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죽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이런 것이 히스기야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정작 자랑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못한다.
3.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을 깨우친 이사야(3-4절)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 시켰다. 선친 아하스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산헤립의 항복을 통보하는 모멸스러운 글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모습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하나님 앞에 펼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소외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절단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온다. 찾아온 자체 만으로도 히스기야는 뜨끔 했을 것이다. 이사야가 묻는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가? 또 재차 묻는다.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이들은 바벨론에서 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궁궐안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사야에게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 히스기야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히스기야는 어땠을까? 극적인 병에서의 회복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테다. 이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은 회복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문제중 한 가지인 앗수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앗수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이에 반앗수르 동맹들이 가시화 되고 있던 찰나, 바벨론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이잘 진행 되고 있다고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다. 반앗수르 동맹 조차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했어야 했다. 더구나 선친 아하스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펼쳤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주변 나라들과 이 문제를 펼쳐 놓고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3.하나님의 심판 선언(5-8절)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동맹삼아 더 의지하려 했던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그들이 자랑했던 재물(보물창고), 능력무기도, 창고)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 하신다. 매우 구체적인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에 대한 심판 선언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과오”로 기록된다. 그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바벨론 유수 심판이 결정된다. 이전부터 경고로 선언되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의지 하기로 결정한 히스기야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경험이 있음에도 바벨론 왕의 글과 선물에 취하여 사절단에게 동맹의 예를 갖추어 하나님보다 바벨론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한 선친 아하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제 히스기야도 아버지 아하스가 갔던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이사야의 심판 선언 앞에 히스기야는 궁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새번역_8절).” 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게 될 것이 확정되는 장면이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극히 부패하여 기회를 주어도 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 나라와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철저한 심판”이 확정 되었다. 이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시작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자신이 통치하는 시간만 이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은 확정 되었다. 이제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야 회복이 옴을 바라봄으로 인내하며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견디는 자는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마 24:13)”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죽을 병에서 회복되고(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난 후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시험은 ‘자만’이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방문하자 히스기야는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의 모든 국고를 열어 젖혔다(1~2절). 오늘날 자기 자랑을 위해 소유(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심지어 부풀려 포장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자만하게 하는 상황이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주님꼐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마치 나의 능력과 역량으로 되어진 것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간혹 일어날 때, 히스기야와 같은 자기 자랑의 부심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 민망하다.
-본문을 묵상하며 계속 이어지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상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던 그가 이번에는(형통할 때는) 기도하지도 않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가 찾아와서 묻는다(3~4절). 삶의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다. 가장 평탄한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나 취소되지 않는다(5~7절).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15년의 시한부 생명을 뜻하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벨론과의 동맹을 의식한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믿었던 바벨론에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생전에 누리는 평안함과 견고함에 감사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그 후손들에게 곧 임할 것이며, 불신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런 근시안적인 태도와 마음을 보며 혹시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히스기야 이야기는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소유가 썩는 만큼 우리 영혼도 썩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 유다의 국력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가득 쌓인 보물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소유를 탐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결국 그 탐욕스러운 바벨론에게 유다는 먹힘을 당하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얼마나 의욕적으로 정사에 매달렸겠는가? 그리고 그 정사 중에서 당시 가장 큰 문제인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다. 하나님 없는 열심이 결국 심판 확정을 선고 받았다. 아하스 왕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시행하였던 성전청결도, 절기 회복의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없는 자기 결정”이라는 카운터펀치로 속절없이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다시 얻은 생명이기에 더욱 열심과 성의를 다하여 매달렸을 삶이었는데, 정작 자기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님 없는 열심”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정”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삶의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며 결정 했던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무너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스기야의 삶에서 가장 은혜가 충만했을 때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심판을 확정 받는다.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정작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펼치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펼쳐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삶이었지만 그 삶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재물, 자기 능력만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름은 온 간데 없구나….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왜 이리 낯설지 않은지….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의 인생을 펼쳐 놓고 더욱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 겸손하게 이 길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산다!
*비록 엄청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지만, 히스기야는 곧장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의 정당성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수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인정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히스기야의 잘못으로 이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기다림의 방법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윗 왕조가 모아놓은 재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후손들 중에는 환관이 되는 자도 나올 것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왕들을 그들이 바란 대로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중한 징벌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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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30일
히스기야의 통곡과 하나님의 응답_한참 동안 흐느껴 울며 벽을 맞댔다.
[이사야 38:1-22]
히스기야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삶과 죽음의 최종 결정권자이신 여호와께 나아간다. 그는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분께 문제의 해결을 맡긴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셔서 죽음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는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기록해 여호와의 구원 능력을 백성들과 함께 나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살 수 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국난 앞에 모두가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구원은 실제가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시는 주권이 실제가 되어 이루어진다. 오만과 교만의 앗수르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증거 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 호기를 부릴 수 없다.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21절은 악성 종기로 인한 병 임을 짐작 케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게 되었으니, 너의 집안 모든 일을 정리하여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1절)
히스기야는 자신이 걸린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멨다. 스스로도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병은 위중했다(10-13절). 스스로 ‘주님께서 조만간에 내 목숨을 끊으실 것이다(새번역_12, 13절)’ 라고 반복하여 고백할 정도로 고통은 극심했다.
1. 통곡하는 히스기야(2-3절, 9-16절)
대게 이 정도쯤 되면 죽음을 기다리며 체념한다. 차라리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다. ‘제비처럼, 학처럼 애타게 소리 지르고,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었다. 나는 눈이 멀도록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주님, 저는 괴롭습니다. 이 고통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새번역_14절).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를 낫게 하여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픔이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새번역_16절)
병들어 부정하게 된 몸으로 성전을 올라가지 못하니 누워있던 그 침상에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2절) 통곡하며 부르짖었다(3절).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 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새번역_3절)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서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온 것 뿐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했음을 기억해 다라는 것이다. 이 일이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이 되었고 29년 동안 통치하였다. 역대기는 히스기야를 즉위 첫째 해 첫째 달부터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앴다고 증언한다(대하 29:3,5). 선친 아하스왕이 설치했던 앗수르의 제단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유월절 준수를 단행했는데 이때 남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솔로몬 때로부터(분단 이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을 누렸다고 증언한다(대하 30:26). 이후 즉위 4년만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삶을 고수할 것을 선포하며 앗수르와 대척점에 선다.
그렇게 달려온 통치자로서의 길이 병듦으로 인해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위협이 점점 노골화 되고 있는 시점에 그의 마음은 육신의 병세가 위중한 만큼 타들어갔다. 그는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유다의 운명을 생각하며 절규하는 통곡이었다. 그가 제비처럼 학처럼 비둘기처럼 울며 하늘을 쳐다 본 것은 개인적으로 좀 더 살아보겠다는 일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왕으로서의 사명이 위중한 병 중에서 하나님께 통곡하게 했다.
2. 이에 응답하시는 하나님(4-8, 17-20절)
“이에(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4절)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 그 증거를 나 주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 아하스의 해시계에 비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갈 것이니, 해도 내려갔던 데서 십 도 올라갈 것이다.”(새번역_5-8절)
달리 설명할 것이 무엇이겠나!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15년의 삶을 연장해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앗수르의 손에서 도성을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일이 36-37장의 사건이다. 이 일은 모두 즉위 14년에 일어난 일이다.
히스기야에게 질병의 치유는 현재적인 사건이지만 앗수르에게서 구원받는 것은 미래의 사건이다. 주전 701년 예루살렘의 구원은 히스기야 왕의 개인적인 치유 사건이 모형이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방법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히스기야처럼 죽음의 위기에 닥친 예루살렘이 어떻게 소생할 수 있겠는가를 먼저 경험한 것이다. 이 경험은 36-37장의 사건에서 보여주듯 흔들림 없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당연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산헤립의 능욕의 말들을 펼쳐 놓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담대함과 견고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죽음의 위기에서 치유하여 주신 하나님은 은혜는 이 때를 위한 예방주사 였다. 놀라운 예방백신을 맞은 히스기야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17절)”
기도와 통곡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다. 예루살렘을 지켜 주셨다.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살 길은 기도와 통곡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새번역_5절)”
기도를 들으시는…흘리는 눈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주셨고, 예루살렘도 살려 주셨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새번역_5-6절).” 이것을 이루실 증거도 보여 주신다. 아하스의 해시계(아하스의 다락에 연결되어 위치한)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간다. 이 증거를 보여주시며 확언 하신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 그 증거를 나 주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새번역_7절).” 이것을 경험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대군의 위협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나을 가망성이 없으니 유언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그리고 선하게 해앟여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인생임을 상기시키면서 구원을 간청한다.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더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을 근거로 생명과 자유를 간구하겠는가?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벽을 맞대야 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찾아야지… 현장예배를 사수하겠다는 것은 하나님만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무언가, 나의 마음에 정해 놓은 기준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정말 절실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백성들을 찾고 계시는 듯 하다.
-형식을 따라 드리는 제의가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만 구하고 찾는 그런 백성들 말이다. 히스기야가 지금 그런 심정이다. 병 듦으로 인해 부정하여 져서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니, 체념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다.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하나님만 바라 보겠다고 몸으로 그 의지를 표현한다. 이런 간절함이 기도다!
-히스기야는 솔직하다! 미사여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절체절명의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다. 가장 간절한 단어를 쏟아낸다. “기억하여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한참을 흐느껴 운다. 통곡한다. 달리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 통곡에 다 담겨 있다. 그 눈물이 마음을 나타낸다. 눈물, 통곡이 기도다! 간절하면 눈물이 난다! 통곡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케 하심을 누린 그가 기록을 남긴다! “다음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가 그 병에서 회복된 다음에 읊은 시이다(새번역_9절).” 담담하게 그의 투병과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고백한다. 치유함을 받은 이후 결심도 기록한다.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새번역_16절)” 그는 이 결심처럼 앗수르의 위협, 능욕 앞에서 “주님 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기도다! 주님만 간절하고도 확고하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기도다!
-치유받은 기적을 과거의 흔적으로 흘려 보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력으로 삼는다. 그 중심에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고 확고히 경험한 것이 기초가 된다. 그렇다! 내가 무수한 세상의 도전들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의 뻔뻔한 종교적 의지가 아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이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새번역_7절)” 오늘도 말씀한 것을 바라보고 말씀하실 것을 기대해야 할 이유다!
*나의 기도가 울음과 통곡을 사모한다. 나의 기도가 직면하는 늘 직면하는 기도 이기를 바란다. 나의 기도는 어디에 있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방향성을 놓치지 않기를 원한다. 나의 기도가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이 드러나는 통로 이기를 사모한다. 그리고 내가 응답받은 기도가 불시에 닥쳐오는 위기들 앞에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은혜와 능력이 됨을 감사한다. 어느곳에 있든지 주님만 바라보자!
*내게 베풀어 주셨던 응답의 증거들을 소환해야 겠다. 지금은 그 확실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때다! 이런 저런 생각과 계산이 도무지 서질 않는 코로나 시국에 이전에 이미 경험케 하셨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증거들을 소환 해야 겠다.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을 더욱 붙잡아야 겠다. 증거를 주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살 수 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국난 앞에 모두가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구원은 실제가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시는 주권이 실제가 되어 이루어진다. 오만과 교만의 앗수르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증거 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 호기를 부릴 수 없다.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21절은 악성 종기로 인한 병 임을 짐작 케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게 되었으니, 너의 집안 모든 일을 정리하여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1절)
히스기야는 자신이 걸린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멨다. 스스로도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병은 위중했다(10-13절). 스스로 ‘주님께서 조만간에 내 목숨을 끊으실 것이다(새번역_12, 13절)’ 라고 반복하여 고백할 정도로 고통은 극심했다.
1. 통곡하는 히스기야(2-3절, 9-16절)
대게 이 정도쯤 되면 죽음을 기다리며 체념한다. 차라리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다. ‘제비처럼, 학처럼 애타게 소리 지르고,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었다. 나는 눈이 멀도록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주님, 저는 괴롭습니다. 이 고통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새번역_14절).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를 낫게 하여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픔이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새번역_16절)
병들어 부정하게 된 몸으로 성전을 올라가지 못하니 누워있던 그 침상에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2절) 통곡하며 부르짖었다(3절).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 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새번역_3절)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서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온 것 뿐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했음을 기억해 다라는 것이다. 이 일이 무엇일까?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이 되었고 29년 동안 통치하였다. 역대기는 히스기야를 즉위 첫째 해 첫째 달부터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앴다고 증언한다(대하 29:3,5). 선친 아하스왕이 설치했던 앗수르의 제단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유월절 준수를 단행했는데 이때 남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솔로몬 때로부터(분단 이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을 누렸다고 증언한다(대하 30:26). 이후 즉위 4년만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삶을 고수할 것을 선포하며 앗수르와 대척점에 선다.
그렇게 달려온 통치자로서의 길이 병듦으로 인해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위협이 점점 노골화 되고 있는 시점에 그의 마음은 육신의 병세가 위중한 만큼 타들어갔다. 그는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유다의 운명을 생각하며 절규하는 통곡이었다. 그가 제비처럼 학처럼 비둘기처럼 울며 하늘을 쳐다 본 것은 개인적으로 좀 더 살아보겠다는 일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왕으로서의 사명이 위중한 병 중에서 하나님께 통곡하게 했다.
2. 이에 응답하시는 하나님(4-8, 17-20절)
“이에(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4절)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 그 증거를 나 주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 아하스의 해시계에 비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갈 것이니, 해도 내려갔던 데서 십 도 올라갈 것이다.”(새번역_5-8절)
달리 설명할 것이 무엇이겠나!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15년의 삶을 연장해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앗수르의 손에서 도성을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일이 36-37장의 사건이다. 이 일은 모두 즉위 14년에 일어난 일이다.
히스기야에게 질병의 치유는 현재적인 사건이지만 앗수르에게서 구원받는 것은 미래의 사건이다. 주전 701년 예루살렘의 구원은 히스기야 왕의 개인적인 치유 사건이 모형이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방법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히스기야처럼 죽음의 위기에 닥친 예루살렘이 어떻게 소생할 수 있겠는가를 먼저 경험한 것이다. 이 경험은 36-37장의 사건에서 보여주듯 흔들림 없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당연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산헤립의 능욕의 말들을 펼쳐 놓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담대함과 견고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죽음의 위기에서 치유하여 주신 하나님은 은혜는 이 때를 위한 예방주사 였다. 놀라운 예방백신을 맞은 히스기야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17절)”
기도와 통곡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다. 예루살렘을 지켜 주셨다.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살 길은 기도와 통곡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새번역_5절)”
기도를 들으시는…흘리는 눈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주셨고, 예루살렘도 살려 주셨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새번역_5-6절).” 이것을 이루실 증거도 보여 주신다. 아하스의 해시계(아하스의 다락에 연결되어 위치한)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간다. 이 증거를 보여주시며 확언 하신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 그 증거를 나 주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새번역_7절).” 이것을 경험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대군의 위협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나을 가망성이 없으니 유언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그리고 선하게 해앟여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인생임을 상기시키면서 구원을 간청한다.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더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을 근거로 생명과 자유를 간구하겠는가?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벽을 맞대야 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찾아야지… 현장예배를 사수하겠다는 것은 하나님만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무언가, 나의 마음에 정해 놓은 기준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정말 절실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백성들을 찾고 계시는 듯 하다.
-형식을 따라 드리는 제의가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만 구하고 찾는 그런 백성들 말이다. 히스기야가 지금 그런 심정이다. 병 듦으로 인해 부정하여 져서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니, 체념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다.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하나님만 바라 보겠다고 몸으로 그 의지를 표현한다. 이런 간절함이 기도다!
-히스기야는 솔직하다! 미사여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절체절명의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다. 가장 간절한 단어를 쏟아낸다. “기억하여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한참을 흐느껴 운다. 통곡한다. 달리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 통곡에 다 담겨 있다. 그 눈물이 마음을 나타낸다. 눈물, 통곡이 기도다! 간절하면 눈물이 난다! 통곡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케 하심을 누린 그가 기록을 남긴다! “다음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가 그 병에서 회복된 다음에 읊은 시이다(새번역_9절).” 담담하게 그의 투병과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고백한다. 치유함을 받은 이후 결심도 기록한다.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새번역_16절)” 그는 이 결심처럼 앗수르의 위협, 능욕 앞에서 “주님 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기도다! 주님만 간절하고도 확고하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기도다!
-치유받은 기적을 과거의 흔적으로 흘려 보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력으로 삼는다. 그 중심에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고 확고히 경험한 것이 기초가 된다. 그렇다! 내가 무수한 세상의 도전들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의 뻔뻔한 종교적 의지가 아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이다. “나 주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새번역_7절)” 오늘도 말씀한 것을 바라보고 말씀하실 것을 기대해야 할 이유다!
*나의 기도가 울음과 통곡을 사모한다. 나의 기도가 직면하는 늘 직면하는 기도 이기를 바란다. 나의 기도는 어디에 있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방향성을 놓치지 않기를 원한다. 나의 기도가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이 드러나는 통로 이기를 사모한다. 그리고 내가 응답받은 기도가 불시에 닥쳐오는 위기들 앞에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은혜와 능력이 됨을 감사한다. 어느곳에 있든지 주님만 바라보자!
*내게 베풀어 주셨던 응답의 증거들을 소환해야 겠다. 지금은 그 확실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때다! 이런 저런 생각과 계산이 도무지 서질 않는 코로나 시국에 이전에 이미 경험케 하셨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증거들을 소환 해야 겠다.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을 더욱 붙잡아야 겠다. 증거를 주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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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9일
희년의 약속을 이루실 여호와의 열심
[이사야 37:21-38]
이사야 전체 66장에서 1-35장까지 심판 메시지 36-39장 히스기야 40-46장까지 마지막 회복의 메시지이다. 36-39장이 정 중앙에 위치하고, 히스기야 왕 하나의 이야기를 4장이나 할애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의 저자는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36장에서 앗수르의 사신이 오고, 37장 상반부(1-20절)에서 이사야의 첫 번째 신탁(6,7절)과 히스기야의 기도(14-20절) 이후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본문의 내용은 왕하19:20-37절 내용과 완전히 같다.
21절 내가 앗수르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로 시작하며 오늘 본문의 내용이 14-20절까지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의 응답으로 나오는 것을 말씀하신다.
22-29절 앗수르 왕의 오만함을 벌하심
22절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 이제는 이스라엘(처녀 딸 시온, 딸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을 조롱하고 멸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23-25절 앗수르 왕이 훼방하며 능욕한 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즉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신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징계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그가 교만하여 자기의 힘을 자랑하였다.
26절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 뒤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 것이 단시간에 된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상고부터 정한 것이었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앗수르 왕이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앗수르의 행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 보다 과도하였다.(2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9절에서 앗수르 왕의 하나님에 대한 거스름 때문에 코를 꿰며, 재갈을 물려 오던길로 되돌아 가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지금까지는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자신의 힘을 써서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을 황폐케하고, 정복하였으나 이번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은 앗수르 왕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30-32절 이사야 두 번째 신탁
사37:6,7절의 첫 번째 신탁(계시)에 이어 30-32절의 두 번째 신탁(계시)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이사야서에서 흐르는 핵심 사상들이 언급되고 있다.
사7:14절 임마누엘의 징조에 이어서 30절의 징조를 한번 더 말하고 있다.
30절의 첫째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둘째 해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것이요. 라는 표현은 2년동안 사람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원문의 의미도 이 뜻과 동일하게 네 수확에서 스스로 난 것. 셋째해에 농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레위기 25:21절에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희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7번씩 7번째 안식년인 49년에 안식하고 희년인 50년에 안식하고, 3년째에 파종하면 4년째에 소출이 나오기 때문에 3년간의 양식을 공급해줘야 하는 것이다. 눅4: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메시야로 말미암아 희년의 회복이 될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그러한 회복의 약속을 지금 하는 것이다.
31절의 유다족속은 남은 자들이 3년째 심은 포도 나무들이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으며, 이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피하는 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시며, 이것을 이루시는 주체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이라고 말씀하신다. 열심은 원어로‘키-ㄴ아트’라고 하는데 질투, 질시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여 의역이 된 것이다. ‘거룩한 열정’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이 원어는 사9:7절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말이다.
33-35절 약속
33,34절에서 다시 앗수르 왕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말하면서
35절에서 하나님께서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약속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남은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며 보호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36-38절 역사적 성취
그러나 이러한 미래적 구원의 약속은 당장 히스기야와 백성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일이다. 그라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권능으로 18만5천명의 군대를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게 하셨다(36절).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전염병에 의한 죽음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37:7절의 말씀대로 산헤립은 고국에서 칼에 맞아 죽게 된다.(38절)
36장에서 앗수르의 사신이 오고, 37장 상반부(1-20절)에서 이사야의 첫 번째 신탁(6,7절)과 히스기야의 기도(14-20절) 이후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본문의 내용은 왕하19:20-37절 내용과 완전히 같다.
21절 내가 앗수르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로 시작하며 오늘 본문의 내용이 14-20절까지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의 응답으로 나오는 것을 말씀하신다.
22-29절 앗수르 왕의 오만함을 벌하심
22절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 이제는 이스라엘(처녀 딸 시온, 딸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을 조롱하고 멸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23-25절 앗수르 왕이 훼방하며 능욕한 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즉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신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징계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그가 교만하여 자기의 힘을 자랑하였다.
26절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 뒤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 것이 단시간에 된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상고부터 정한 것이었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앗수르 왕이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앗수르의 행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 보다 과도하였다.(2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9절에서 앗수르 왕의 하나님에 대한 거스름 때문에 코를 꿰며, 재갈을 물려 오던길로 되돌아 가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지금까지는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자신의 힘을 써서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을 황폐케하고, 정복하였으나 이번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은 앗수르 왕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30-32절 이사야 두 번째 신탁
사37:6,7절의 첫 번째 신탁(계시)에 이어 30-32절의 두 번째 신탁(계시)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이사야서에서 흐르는 핵심 사상들이 언급되고 있다.
사7:14절 임마누엘의 징조에 이어서 30절의 징조를 한번 더 말하고 있다.
30절의 첫째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둘째 해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것이요. 라는 표현은 2년동안 사람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원문의 의미도 이 뜻과 동일하게 네 수확에서 스스로 난 것. 셋째해에 농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레위기 25:21절에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희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7번씩 7번째 안식년인 49년에 안식하고 희년인 50년에 안식하고, 3년째에 파종하면 4년째에 소출이 나오기 때문에 3년간의 양식을 공급해줘야 하는 것이다. 눅4: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메시야로 말미암아 희년의 회복이 될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그러한 회복의 약속을 지금 하는 것이다.
31절의 유다족속은 남은 자들이 3년째 심은 포도 나무들이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으며, 이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피하는 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시며, 이것을 이루시는 주체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이라고 말씀하신다. 열심은 원어로‘키-ㄴ아트’라고 하는데 질투, 질시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여 의역이 된 것이다. ‘거룩한 열정’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이 원어는 사9:7절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말이다.
33-35절 약속
33,34절에서 다시 앗수르 왕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말하면서
35절에서 하나님께서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약속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남은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며 보호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36-38절 역사적 성취
그러나 이러한 미래적 구원의 약속은 당장 히스기야와 백성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일이다. 그라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권능으로 18만5천명의 군대를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게 하셨다(36절).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전염병에 의한 죽음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37:7절의 말씀대로 산헤립은 고국에서 칼에 맞아 죽게 된다.(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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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8일
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7:1-20]
오늘의 본문은 36장에 앗수르부터 심한 모욕을 다 듣고 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기록한 장입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베 옷을 입으며 성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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