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정복과 불순종의 결과 [이사야 1:22-36]
 – 2026년 09월 03일
– 2026년 09월 03일 –
지리적으로 보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남부 지역 정복 보고에 이어 북부 지역의 보고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의 전쟁 보고는 암울하다.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불완전한 정복에서부터(22~29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의 정복 실패가 이어진다(30~33절). 급기야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게 산지로 쫓겨나고 만다(34~36절).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을까?



1.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성공 속 실패(22~26절)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이 벧엘을 치러 올라갈 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22절)라고 기록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나안 북부 지역에서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처음에 거둔 벧엘의 승리(22~26절)는 전투 전 정탐 과정에서, 성읍에서 나온 한 사람의 이기적인 배신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목숨을 연명한 그가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벧엘의 본래 이름인 루스로 명명함으로써, 잠재된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3~4). 야곱은 이곳에서 꿈을 꾸며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창 28:10~19, 31:13). 가나안 정복 때에는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점령한 후 벧엘을 정복하였다(수 12:16). 이처럼 역사적인 성읍 벧엘을 점령할 때 요셉 가문이 보인 모습은 의외다.

요셉 가문의 벧엘 정복 기사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라고 했는데, 정탐을 먼저 실시한다. 마치 여리고성 정복처럼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것 같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요셉 가문의 전략과 실행에는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나도 요셉 가문과 다를 바 없다.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걸음에 하나님을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정찰병들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하였다.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새번역_24절)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 “선대하리라”(자비를 행하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노골적으로 행한다. 신명기 7:2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요셉 가문은 벧엘 사람과 약속을 맺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가나안 전쟁의 큰 전투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승리했었다. 그런데 이후 분배받은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망각한 채 전쟁을 치러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하나님 없이 전투를 치러 가고 있었다.
요셉 가문의 실패는 “불순종의 실패”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 힘을 쏟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실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전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2. 북쪽 지파들의 점령 실패: 쫓아내지 않았다 vs 쫓아내지 못했다(27~36절)
므낫세(27~28절), 에브라임과 스불론(29~30절), 아셀과 납달리(31~33절), 단(34~36절) 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 실패 서사가 이어진다. 여호수아 23:13은 이미 사사 시대로 접어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사기 2:3에서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고, 본문 29, 30, 32절에서는 가나안 족속이 게셀과 기드론과 나할롤에서 에브라임과 스불론과 아셀 지파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기록한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우상 문화가 이스라엘에 스며들었다.

“쫓아내지 못하였다”(27, 29, 30, 31, 32, 33절)와 “쫓아내지 않았다”(28절)라는 표현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요셉 가문을 비롯하여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이들의 실패를 “쫓아내지 못하였다”로 표현한다.

27절과 29절을 보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여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28절과 30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노역”을 시키기 위해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들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28, 30, 33, 35절에서는 그들이 “노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즉, 경제적인 이득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맞바꾼 것이다. 자신들의 편리함과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랬더니 도리어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 산지로 밀리게 되었다(34절). 아모리 족속은 작심하여 단 지파를 산지에 고립시켜 버렸다. 이후에는 요셉의 가문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노역”을 시키며 가나안 족속과 여전히 그 땅에 함께 거하였다.

문제는 이것이다. 단 지파는 힘이 약하여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산지에서 위기의 삶을 살았지만, 요셉의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힘이 강해졌을 때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며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복 전쟁 직후 삶의 터전을 세우고 재건하는 일에는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했을 터이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둔 이들에 대한 목적은 분명했다. “노역”은 종전 후 재건 사업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기에, 각 지파들은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이 유혹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족속들을 활용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을 이겨 내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내를 포기하였다. 나의 삶에도 이와 같은 유혹이 왜 없겠는가! 좀 더 쉬운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 눈감고 싶은 유혹은 수시로 일어난다. 세상 이치로 판단하면 고민될 것도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뜻에 부응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 길이 탄탄하게 서는 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정착 초기에 모든 것이 낯선 가나안의 기후와 풍토, 환경 등에 적응하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과 경험이 당연히 필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달프더라도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가치와 비중이 삶에서 약화되자,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붙들어 주던 경계선은 쉽게 무너져 갔다.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두는 행태가 급속히 퍼져 버린다. 그리고 결국 어처구니없게도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분배받은 해안 지대의 땅을 빼앗긴 채 산지로 밀려나 버렸다. 이 기막힌 단 지파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실상을 보여 주는 17~18장 제사장직 매매 사건의 핵심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 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한 번 어기기 시작한 명령은 이제 그 권위를 잃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나는?
-본문에서 유일하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는 표현이 나온다(22절). 이것은 다른 지파에게는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지파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승리는 전술과 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라는 것이다.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상수'(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지는 수, 굳어진 값)일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친히 열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 지파가 그렇게 벧엘을 정복한다. 정탐 후 내부 협력자를 포섭하여 성읍의 입구를 알아내고, 들어가서 차지한다(22~26절).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과 비슷한 서사다. 그 협력자와 가족은 여리고의 라합 가족처럼 목숨을 구하고 ‘루스’라는 성읍을 건축하여 살아간다. 요셉 가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였을 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과 용맹으로 승리를 얻어 낸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이면에, 그 협력자 가족이 라합 가족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나안적인 삶을 계속 살게 해 준 것이 탐탁지 않다. ‘타협’이었던 것이다. 요셉 가문이 승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은 ‘타협’의 함정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좀처럼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민족을 다 쫓아내어 약속하신 기업을 얻기에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가나안 민족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장 큰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도 이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강성해진 후에도 쫓아내지 않고 공존하면서 그들을 이용만 할 뿐이었다. ‘쫓아내지 못한’ 전쟁에서 ‘쫓아내지 않은’ 환경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27~33절). 자기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부리는 것’이 힘들여 쫓아내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기는 결국 이스라엘이 용납한 세력에게 이스라엘이 종속되는 역사다. 타락은 아주 작은 타협에서 시작됨을 간과하면 안 된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과 아셀, 납달리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언급 자체가 없다. 하나님이 지레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거절한 것이다. 이들 지파는 상대가 너무 강해서 포기했고, 그들을 이용하고 싶어서 포기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충성하지 않을수록 승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심지어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를 산속으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34~36절). 비록 단은 작은 지파였지만, 문제는 전력의 열세가 아니라 믿음의 부재다.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 단 지파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강렬한 세속주의와 다원주의 사회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수하는 교회를 배타적이고 외골수인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도전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에는 쫓아낼 수 있어도 쫓아내지 않았지만,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수 없어서 아예 산지로 내몰린 채 내려오지 못했다. 단 지파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였다. 지파의 규모만큼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작았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도 산지로 쫓겨 옴짝달싹 못하는 초라한 분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때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현실에 갇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쫓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쫓아내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유혹 앞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하게 여겨지고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여겨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까지 당장의 필요에 급급하다 보면 결국 그 믿음은 무너진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현실 타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내 전략과 실행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맹신해서도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힘과 능력에 함몰되면, 그것으로 역시 망한다. 당장은 달콤한 성취의 짜릿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염려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잠시 태풍을 만난 것이고, 홍수를 만난 것이다. 숨을 고르며 안전하게 피신하여 이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 지금 여기 이곳은 본향을 향해 걷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빠진 “노역”의 유혹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역”을 당했었음을 망각한 비윤리적인 처사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일상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체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고, 가나안 족속과 어떤 약속이나 관계도 맺지 말라고 이미 명령하신 그 말씀을 철저히 지켰어야 했다.

-자신들의 힘과 전략으로 쟁취한 승리의 독이 영적 지각을 마비시켜 버렸다.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승리, 이런 형통은 복이 아니라 저주다.

+ 기도제목

*주님, 쫓아내지 못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영역에 주님의 능력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주님, 쫓아내지 않고 있는 인간적인 계산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떨쳐 낼 결단을 주십시오.
*주님, 내 능력으로 얻은 승리가 하나도 없음을 늘 깨닫게 해 주셔서, 망국의 길을 걷지 않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