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를 돕는 하나님의 손길(사람들)[렘 26:16-24]
 – 2024년 07월 02일
– 2024년 07월 02일 –
유다 왕 여호야김에게 예언자는 왕의 권위에 종속된 인물에 불과했다. 예언자는 왕권의 지지자여야지 고발자여서는 안 됐다. 예언자가 왕권을 비판하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여호와의 예언자를 폭력으로 억압함으로써 여호야김은 예언자를 보내신 여호와의 권위를 무시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이스라엘 왕정의 대립과 긴장은 왕정이 도입되면서 계속된 현상이었다. 왕정은 여호와의 통제에 대한 거절이자,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제도이기도 했다. 왕정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여호와의 권력을 대변하는 예언자와 왕 사이에는 처음부터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성전과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에 어려웠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호와가 계시기에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성전에 대하여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거짓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원고인 예레미야를 고발하며 사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관들과 백성은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에 반박했다. 여기에 지방의 장로들이 일어나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미가를 언급하며 예레미야를 변호한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시 한번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1. 예레미야의 무죄 판결(16절)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고발(11절)과 예레미야의 자기변호(12~15절)가 끝나고 재판을 주관한 고관들의 판결이 내려진다. 특이하게도 증인과 방청객으로 참여한 모든 백성도 판결에 참여한다. 본문에서는 제사장들, 예언자들과 함께 예레미야의 생명을 위협했던 모든 백성(8절)이 재판정에서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언제나 고관들과 함께 언급된다(11, 12, 16절). 이는 예레미야를 고발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백성으로부터 고립됐음을 시사한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만한 이유가 없다(16절)”라고 예레미야의 무죄를 선언한다.
 
그런데 무죄 판결의 근거와 고발의 근거가 동일하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기에” 고관들과 백성은 무죄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고발했다. 고관들과 백성은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기에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였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로 정죄하였다. 고관들은 예언의 형식에 맞춰 판결했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언의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고관들의 논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는 모두 여호와의 예언자가 된다. 반면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주장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멸망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없는 주제이기에 이를 예언한 자는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전과 성은 여호와와 동격이었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의 파괴를 외친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저주하거나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였다.
 
 
 
2. 예언자 미가(17~19절)
본문은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의 완악함과 부당성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 고발하는 장면이다. 지방의 장로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미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경고한다. 미가라는 선지자가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과 같은 내용을 선포했는데, 히스기야 왕은 미가를 죽이지 않고 그의 심판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수용하여(왕하 18:4) 여호와의 재앙을 돌이킬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장로들의 주장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주장이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에도 어긋나는 거짓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미가 선지자도 거짓 예언자여야 한다. 미가가 여호와의 예언자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할 수 없다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주장은 거짓이 된다. 예레미야는 히스기야 왕이 적극적으로 반응한 미가 심판 예언의 전통을 따라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한 것이다. 장로들이 전하는 미가의 예언은 미가 3:12의 문자적 인용이다(개역 개정은 같은 표현을 달리 번역하였다). 미가의 예언 후 대략 백년 후에 지방 장로들의 입에서 글자 그대로 인용될 수 있었음은 이 예언이 유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미가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한 최초의 예언자였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유다의 이상적인 왕인 히스기야와 요시야에 대비하여 고발한다. 이 두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는 전형적인 의로운 왕이었다. 18~19절의 말씀은 형식상 그 지바으이 장로들이 온 회중(17절)에게 주는 말씀이지만, 실제 청자는 여호야김이었다. 여호야김에게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심판 선고 앞에서 왕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히스기야가 미가의 심판 예언에 자신을 낮춰 여호와의 재앙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처럼 여호야김도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을 두려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선포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 예언자 우리야(20~24절)
예언자 우리야의 살해 이야기는 독자적인 이야기였지만, 본문에서 지방 장로들의 경고에 대한 여호야김의 반응으로 읽도록 배치된 것이다. 여호야김은 조상 히스기야와 전혀 달랐다. 거리낌 없이 여호와의 예언자를 죽임으로써 유다의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여호야김 왕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에 일차적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심판의 메시지는 여호야김 시대에 예레미야 뿐 아니라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는 예언자도 외쳤다.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고 예언하였다(20절).” 우리야는 본문에서만 언급된 예언자로, 그가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이 예레미야의 선포와 같았다고만 소개하였다. 16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라는 언급은 우리야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언자임을 보여준다.
 
우리야와 예레미야 두 예언자가 동시에 같은 메시지를 전한 것은 여호야김의 책임이 유다의 운명에서 막중했음을 드러낸다. 여호야김의 눈에 우리야의 예루살렘 성과 가나안 땅의 멸망 선언은 왕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여호야김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36:26; 대하 24:20-22) 목숨의 위협을 느낀 우리야는 애굽으로 도피한다(21절). 하지만 이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지 않는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사절단을 보내 우리야를 송환해 오게 한다. 여호야김은 그렇게 송환된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 시체를 예루살렘 성 밖 기드론 계곡에 있는 평민의 묘지(공동묘지)에 던져 버린다(23절). 아무리 여호와의 예언자라 할지라도 왕권을 무시하고 예루살렘과 가나안의 멸망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반역자나 다름없었다.
 
우리야의 죽임당함은 당연히 그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예레미야를 바라보게 한다. 그는 어떻게 여호와김의 폭력과 위협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24절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야와는 달리 예레미야 주변에서 그를 보호해 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지켜주었다. 만약 그가 주전 622년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요시야왕에게 전달한 서기관 사반(왕하 22장)과 동일하다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사반 집안이 예레미야를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준비된 사람을 통해 예레미야를 살리셨다. 제사장, 예언자들과 뜻을 같이했던 백성과 고관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셨다. 그리고 유다 중에 남아 있는 경건한 지방 장로들을 통해 예레미야를 변호하게 하신다. 재판을 주관한 고관들과 이를 지켜본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는 이유로 선지자를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영적인 지도에 앞장서고 시대를 분별해야 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도리어 백성에게 훈계를 듣는 형국이다.
 
-또 유다의 장로들이 예레미야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들은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과 성전의 철저한 멸망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한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해 냈다. 미가의 경고를 받은 히스기야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우상을 척결하여(왕하 18:4) 심판을 피했다. 그런데 어찌 지금은 선지자를 죽여서 재앙을 초래하려고 하느냐고 항의한다. 지금은 선지자를 죽여야 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탐욕과 그릇된 야망과 헛된 신념을 무너뜨려야 할 때라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는 신앙 선배들의 지혜로운 충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를 깨닫게 한다.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죽이지 못하게 돕는다. 선지자의 시대는 심판을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타락했지만, 소수의 신실한 백성이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억눌리고 짓밟힌 선지자의 목소리를 해방시켜 주고, 신앙의 전통을 고수하여 희망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미가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돌이킨 히스기야와 달리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를 애굽까지 추격하여 붙잡아 죽인다. 그의 시신은 평민의 묘실에 던져짐으로서 죽은 후에도 모욕을 주었다. 여호야김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저항한 것이다.
 
*같은 예언을 하였으나 말씀을 선포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 태도가 생사를 갈랐다. 예레미야는 죽음을 각오하며(14절) 말씀을 전했고, 우리야는 죽음을 두려워했다(21절). 죽음을 강오한 그의 모습에 고관들과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적극 구명하였다. 하지만 우리야는 달랐다. 여호야김이 그를 죽이려하자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쳤지만, 엘라단을 보내 붙잡아 와서 처형하고 평민의 무덤(공동묘지)에 던진다. 치욕적인 죽임을 당한 것이다.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지만, 히스기야와 여호야김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도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분노를 거두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보라. 하나님의 돌이키시는 은혜로 인해 평안이 임할 것이다.
 
 
 
*주님, 예레미야를 위해 고관들과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지방의 장로들을 사용하셔서 지켜주심을 봅니다. 주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똑같은 경고 전혀 다른 반응을 기억하겠습니다. 쓰디 쓴 말씀이라도 나를 살리시는 말씀으로 늘 받겠습니다.
*주님, 죽음을 각오한 예레미야와 죽음을 두려워한 우리야의 길이 다릅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선명하게 가늠이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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