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미 일어났어도 거짓을 신뢰하다니…. [렘 27:12-22]
 – 2024년 07월 04일
– 2024년 07월 04일 –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세 세대의 통치권을 허락하셨기에 유다 역시 살아남으려면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를 섬겨야 한다. 많은 예언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임박한 구원을 외치지만, 이들의 선포는 여호와의 결정에 거스르는 거짓 예언이다.
    
주전 597년 첫 번째 바벨론 유배로 유다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시드기야와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특히 예언자들은 귀에 듣기 좋은 구원 예언으로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을 오도한다. 물론 이 해에 일어난 바벨론의 1차 예루살렘 침공과 유배를 여호와의 심판으로 간주하는 것은 구원 예언자들과 예레미야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심판 이후의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 구원 예언자들은 주전 597년의 재앙으로 여호와의 심판이 끝났기에 구원과 회복을 선포한다. 예레미야는 반대로 본 심판의 서곡으로 보았기에 더욱더 파국적인 재앙을 선언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유배당하는 재앙을 경험한 자들에게 구원 예언자들의 선포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처럼 들렸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더 큰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를 거절하고 가까운 회복을 선포한 구원 예언자들을 선택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1. 시드기야에게 주는 경고(12~15절)
멍에의 표적 행위와 관련된 이야기는 15절까지 이어진다. 줄과 멍에의 예언은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왕들에게 선포되었다. 12절은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라고 기록하며 예레미야가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받았음을 밝혀준다. 본문은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표적 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이방 왕들과 유다 왕에게 주는 단락으로 구성된다. 이 단락에서 주변 다섯 나라에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유다 왕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운명 또한 결정하시는 분임을, 다른 한편으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드기야에게 주는 말씀은 4~7절을 제외하면 8~11절에 사용된 단어와 표현뿐만 아니라 때로는 문장까지도 거의 그대로 12~15절에 다시 등장한다. 차이는 본 단락에서는 “거짓을 예언하다”라는 표현으로 구원 예언자들에 대한 고발이 더 강화되었다(10a, 14b). 15절에서도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라고 거짓 구원 예언자들의 예언을 듣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구원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았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들이기에 이들의 예언은 거짓이고 들어서는 안 된다.
    
    
    
2. 구원 예언자들에게 대한 경고(16~22절)
16절의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라는 14절의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와 원문에서는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또, 17절의 “~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는 12절의 “~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의 문자적인 반복이다.
    
거짓 예언과 바벨론의 지배를 내용에 다루지만, “바벨론 왕의 멍에” 대신 “여호와의 성전 기구(18절)”가 등장한다. 성전 기구 일부가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시대적 배경은 시드기야의 통치 초반이다. 주전 597년의 파국 이후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성전 기구가 이제 “속히”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다(16절). 28:3에서는 거짓 예언자 하나냐가 여호와께서 “이 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돌려놓으실 것을 선포했다. 빼앗긴 성전 기구가 돌아오는 것은 바벨론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바벨론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에게 예언자들의 구원 선포는 분명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으로 들렸겠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짓 약속이었다. 구원 예언자들의 거짓을 따른다면 예루살렘 성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17절).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에게 칠십 년 또는 세 세대의 지배를 허락하셨기에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참된 예언자라면 값싼 위로로 백성을 현혹하지 말고,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한다(18절).”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하셨기 때문에 남은 유일한 길은 그분 앞에 나아가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뿐이다. 모세가 중보기도로 여호와의 심판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처럼(출 32:7~14; 민 14:13~20; 신 9:18~29) 그분의 심판 결정을 아는 예언자는 백성을 위해 여호와께 매달려야 한다.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16절)”라고 여호와의 임박한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맞서 예레미야는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이 성에 남아 있는 기구(19절)”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포한다. 이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귀족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유배할 때(20절; 왕하 24:13~18), 가져가지 않은 것마저 빼앗길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예루살렘과 유다의 몫은 구원이 아닌 완전한 멸망이었다.
    
한편 성전 기물의 구체적인 언급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떠나셨음을 시사해 준다. 예레미야 52:7에서는 “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라고 기록한다. 21절은 19절의 반복으로 재앙의 정도가 더 강조되었다.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진다. 성전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 예루살렘 주님의 집도 점령군에 의해 약탈을 당할 것이다.
    
한편 22절은 멸망의 심판을 넘어 회복의 미래까지 내다본다. 바벨론의 지배가 한시적인 것처럼, 옮겨진 기물이 바벨론에 머무는 기간도 제한적이다. 여호와께서 찾으실 때까지(개역 개정_”돌보는 날까지”) 바벨론에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여호와께서 기물을 다시 올려와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 예언은 에스라 1:7~11에서 바사 왕 고레스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어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함으로 성취된다.
    
    
    
나는?
-항복의 순종이 살길이다. 시드기야 왕도 바벨론에 항거하는 대신 항복해야 살 수 있었다. 바벨론 왕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용해야 했다. 바벨론 왕에 대한 반란은 하나님께 대한 반란이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인정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불쾌하여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 멍에를 질 때 생명도 있고 소망도 있다.
    
-진실을 직면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외면하며 자기 생각과 마음에 취한 삶은 결국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덮쳐올 것이다.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비루한 일이지만, 죄에 대한 징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겸허히 순종 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순종이지만 해야 한다.
    
-거짓 예언을 경계해야 한다.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듣기는 좋아도 거짓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 예언을 믿는 백성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전하는 자뿐 아니라 듣는 자에게도 책임을 물으신다.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전하는 자의 마땅한 도리라면 분별하여 듣고 아닌 것을 거부하는 것 역시 듣는 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은 아무리 달콤한 희망 섞인 말이라도 붙잡으면 탈이 난다. 오늘날 무수한 거짓 정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즐겁게 할지라도 성령께서 나를 불편하게 하시면 분별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붙잡으면 안 된다.
   
-거짓 희망을 의지하면 안 된다. 거짓 선지자들은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이미 상당한 성전 기물을 탈취당했는데도, 성전은 절대 멸망하지 않으며 빼앗긴 성물들도 머지않아 되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가득한 말로 백성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장밋빛 희망으로 뼈아픈 회개가 필요한 오늘의 현실을 가리는 일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심각한 기만이다. 그것은 성물이나 성전에 대한 주술적인 애착에서 비롯된 생각이요, 바벨론을 자극하여 그들의 정책 변화를 불러올 위험천만한 선택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성전 기물마저 빼앗기고 성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심판받아 마땅한 자기 악행과 죄악을 인정하고 심판을 수용하면 참 희망의 날을 만날 것이다.
    
    
*본문은 26장에 언급된 유다 전체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경고가 시드기야 왕(12~15절)과 제사장들(16~18절)에게 개별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13절과 165절을 통해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백성들도 공동의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섬겨야 할 것과 거짓 예언자의 예언을 듣지 말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때로 전체적으로 듣는 말씀의 책임에서 스스로를 배제 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와 무관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말씀 하시지만,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선포하는 순간에도 성령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의 귀를 언제나 열어놓아야 한다.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착각을 이미 깨뜨리셨었다(26:6). 본문은 남아 있는 성전 기구들마저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될 것을 선언하시며 형식적인 종교로 몰락할 가능성이 있는 기구마저 모두 바벨론으로 옮기시는 의지를 보이신다. 내가 드리는 삶의 예배, 주일의 예배가 과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의 감격으로 드리는가? 아니면 형식만 그저 지키는가?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환경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환경 속에서 다듬으신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내가 익숙하고 평안한 곳에서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환경 속에서, 결코 감당하고 싶지 않은 무게를 통해 삶의 걸음을 이끄신다. 어떤 측면에서는 환경과 상황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을 다듬어 가시는 것이 확실하다.
    
*보냄을 받지도 않고 주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거나, 전체를 살피지 않고 부분적으로 보며, 본문에서 벗어난 말씀이나 강의, 성경 공부를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성경을 이용하여서 하는 경우도 주의해야 한다. 특정인을 의식하여서 해야 할 말을 주저하는 예도 없어야 한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충고나 책망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이 성숙하더라. 나는 어떨까?
    
    
    
*주님, 매일 묵상의 여정 속에서 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겠습니다.
*주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성령께서 강권하실 때 용기를 발휘하겠습니다.
*주님, 거짓 목사들이 판 치는 세상 속에서 말씀 앞에 진실하고, 삶에서 성실하게 말씀을 살아내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거짓 목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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