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의 기도_절망 속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질 희망을 보다! [렘 32:16-25]
 – 2024년 07월 14일
– 2024년 07월 14일 –
아나돗 땅을 매매하라는 명령에 순종한 후 본문은 예레미야의 기도가 이어진다.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넘긴 후에 여호와께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아나돗 땅을 매매한 것에 대한 감사보다 하나님의 창조와 출애굽 사건, 가나안 입성에 감사하는 내용을 이룬다(17~22절). 하지만 가나안 진입 이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소리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그 결과가 여호와의 재앙과 심판이다. 이에 다시 여호와의 심판을 언급한다(24~25절).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실 것이다. 바벨론의 침략이 여호와의 심판임을 명확하게 한다. 한편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조카 하나엘의 밭을 샀지만, 밭 구매에 담긴 신학적 의미(15절)를 전달받고도 무엇인가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여호와께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다.
    
동사 “기도하다(팔랄)”는 예레미야서에 모두 열 번 나온다. 이를 유다 심판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심판 전에는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7:16; 11:14; 14:11). 37:3에서는 시드기야 왕이 중보기도를 부탁한 것이고, 42:2는 멸망 이후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를 암살한 후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운 애굽으로 피하려는 자들의 기도 부탁을, 예레미야가 기꺼이 수용하며 등장한다(42:4, 20). 멸망 이후의 회복을 내다보는 29:7에서는 예레미야가 유배민들에게 성읍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할 때 사용되었다. 29:12절에서 이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응답하실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본문 16절에서 자신이 직접 기도한 내용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이 기도에 32:26~44를 통해 응답하신다. 이를 통해 심판 이후의 시대를 사는 유배민들도 여호와께 기도하면 그분께서는 마찬가지로 응답하신다.
    
    
    
1. 예레미야는 왜 기도를 드렸을까?(16, 24~25절)
예레미야의 기도는 16절과 25절이 표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17~24절의 기도에는 아나돗에 밭을 산 사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다만, 24~25절의 언급은 15절에서 밝힌 표적 행위의 해석을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구원의 말씀으로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기도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로 시작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매매 계약서를 바룩에게 넘겨주고 난 뒤 예레미야는 감사와 기쁨이 아닌 당혹스러움과 슬픔이 그로 기도하게 한 것이다. 기도의 마지막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이것은 예루살렘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그런데도 주 여호와께서는 돈을 주고 밭을 사고 증인들을 세우라고 하셨다. 이 성이 갈대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말이다. 예루살렘 성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망하는데,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 큰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17~19절)
예레미야의 기도는 시간적으로는 태초에서 현재로, 공간적으로는 우주에서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슬프도소이다”는 그의 당혹스럽고 억눌린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기도 전체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덧칠해 준다. “주 여호와여”는 25절과 함께 두 번 반복되는데, 탄식과 호소의 음성을 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도지만, 예레미야는 먼저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이어간다.
    
여호와는 큰 능력과 펼친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큰 능력과 펼친 팔은 출애굽과 창조와 관련하여 각각 두 번 사용된다. 여호와가 바로 큰 능력과 펼친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세상을 창조하셨다(17절).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께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예레미야의 이와 같은 고백은 일종의 간구이기도 하다. 즉,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를 외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상황에 개입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접적인 표현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 능력을 인정한 예레미야는 십계명의 일부를 인용하여 여호와의 크신 은혜를 주장한다(18절).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니이다(18a절).” ‘은혜(헤세드)’는 여호와의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가리키고, ‘갚으시오니(쉴렘)’라는 ‘부당하게 발생한 손실에 상응해서 보상하다’를 뜻한다. 당면한 재앙이 가나안 정착 이후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기에 직접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은혜를 수천 대에 걸쳐 베푸시는 여호와의 성품에 호소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크신 지혜와 능하신 행동으로 인류를 통치하신다. ‘책략(에차)’은 ‘조언, 결정, 계획’을 의미한다. 천지를 지으긴 분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지켜보시고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아주신다.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기에 여호와의 판결은 언제나 공의롭다. 여호와께서는 은혜가 한없이 크신 분이고 각 사람의 행실을 살펴 갚아주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거두신다면 이스라엘도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에 대해 그분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3. 출애굽과 땅의 선물, 가나안 정착 이후 불순종과 그 결과(20~25절)
이스라엘의 길은 여호와의 길하고는 전혀 달랐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23절은 이를 삼중적으로 고발한다. “그래서 그들이 들어와 이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율법에 따라서 살지도 않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실천하라고 분부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모든 재앙을 당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 나빠져만 간 의도적인 악행이었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거두고 이들의 행위대로 벌하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는 바벨론의 군대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이 초래한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이었다(24절).
    
    
    
나는?
-바룩에게 매매 증서를 넘겨준 후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매국노와 정신 질환자 취급을 받으며 감금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멜의 토지 구입 명령을 통해 이 백성에게 희망을 주신 것을 깨달았기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권력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바벨론의 위협만 보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너머에 있을 하나님의 시대까지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산 것은 밭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주고 산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산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의 능력을 갖추셨으니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언약적 은혜로 보호하실 것이다. 또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이라도 거역하고 제 길로 가면 심판하실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모략과 지혜를 당할 자가 없다. 하나님은 인류가 가는 모든 길을 보시고 선악을 따라 갚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행악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 없지만, 동시에 심판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아나돗의 땅을 사라고 하심으로 보여주신다.
    
-심판의 경고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대아 사람들이 쌓고 있는 흉벽은 점점 올라가고 성안의 백성은 기근과 염병과 바벨론 군의 공격에 시달린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에게 항거한 자들에게는 전혀 살아남을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을 겸허히 수용하고 단순히 순종할 때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찾아왔다.
    
-환난 중에 평안이 넘쳐났다. 이 평안은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스며 나온 것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주님의 뜻을 알고 싶어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이다. 그 매달림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해결하지 못하는 애태우는 문제가 있을수록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 여쭤보며 고통의 순간을 희망으로 인내해야 하리라. 약속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말씀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예레미야의 탄식의 부르짖음 속, 신뢰의 고백에 능치 못하실 것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화답하신다(27절). 삶의 걸음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가? 커다란 절벽에 막혀 있는가? 오도 가도 못하는 곤경이 발목을 잡고 있는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
    
*행위의 열매대로 심판을 하시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이 슬펐다. 이 와중에 토지 매매 명령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공의로우심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해야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도 있다. 이 믿음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언대로 심판이 필연적으로 다가왔다면, 예언대로 희망도 필연적이다. 지금 당장 희망을 보기를 원하지만, 희망의 가치를 곱씹고 곱씹어 때가 이를 때 이루지는 희망을 바라보는 것이 깨어진 세상, 좌절된 상황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게 한다. 현실에서 바라는 예레미야의 희망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희망과 결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희망을 신뢰하여 심판의 때를 꿋꿋이 견디어 내야 한다.
    
*말씀대로 심판이 이루어지면, 말씀대로 회복도 이루어진다! 심판의 자리에서 회복을 꿈꿀 수 있는 이유이다!
    
    
    
    
*주님, 예레미야의 탄식 속에 담긴 신뢰를 본받고 싶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믿음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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