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북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와 요아스_그 나물에 그 밥 [왕하 13:1-13]
 – 2024년 09월 25일
– 2024년 09월 25일 –
예후를 이어 그의 자손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때문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아람의 핍박 속으로 휩쓸린다.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과 다른 부적합한 예배 제도는 북이스라엘의 100년이 넘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백성과 후대 왕들에게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데는 한 사람의 죄악으로도 충분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기의 남 유다의 요아스는 미완의 종교개혁끝에 아람 왕 하사엘이 쳐들어오자 그간 모아둔 성전 물건들과 돈을 내주고 말았다. 남 유다는 전체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오기는 하나, 요아스의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타협적인 신앙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이 시기의 북이스라엘도 회복과 혼란을 반복하며 점점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 이스라엘을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신 하나님(1~4절)
13장은 이야기의 무대가 유다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간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통치 제23년에 북이스라엘은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북이스라엘 11대 왕/예후 왕조 2대 왕)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17년을 다스린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아하스의 악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나, 7절에서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다는 언급에서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다시 널리 퍼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만 섬기는 예후의 종교개혁을 따르기보다는, 이전의 혼합주의적 종교 전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예후의 종교개혁에서 단과 벧엘의 황금 송아지 제의를 완전히 없애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은 죄는 조금만 방심해도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우상숭배의 죄가 쉽게 만연해지는 이유는 이를 통해 인간의 성공욕구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이런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여호와 신앙 보다 이방 제의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은 명백하다.
 
이와같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의 손에 넘기신다. “손에 넘기다”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아람의 승리를 약속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항상 패배했다는 것이다. 본문은 여호아하스 평생 동안 아람에게 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에게 진 것을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다.
 
나라 간의 압제는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고 영토의 일부분을 빼앗는 것이다. 하사엘은 남 유다 왕 요아스에게서도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받아 갔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스라엘의 경제, 사회가 피폐해 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군사, 경제적인 부담은 모두 백성들이 져야 하기에 백성들의 삶 역시 황폐해졌을 것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한 여호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절하게 구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2.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5~7절)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자를 주신다. 이 구원자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많은 학자들은 그가 당시 앗수르의 왕인 아다드-니라리 3세, 혹은  하맛의 자쿠르 등 이웃 나라의 통치자라고 본다. 한편으로는 당시 활동하고 있었던 엘리사라고 보기도 한다. 이 구원자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왜 구원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첫째, 구원자는 이방 나라 왕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구원자에 집중하지 않고 구원자를 세우신 여호와께 집중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엘리야 이야기 이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정세에도 관여하신다. 하나님의 시간과 기준에 따라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6~7절은 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구원을 받았으나 급한 상황이 정리되면서 이전에 믿던 신앙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길을 따르고 있었다. 아세라 상도 여전히 사마리아 곳곳에 서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지만, 이전의 모든 죄악의 길로 돌아섰다. 즉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했으나, 구원만 경험하고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고는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여호아하스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섬기는 방식도 여호와께서 정하신 방식으로만 해야 했다. 이는 십계명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아하스와 백성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회심이 아니라 개종한 것 뿐이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신만 요청한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람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다. 타작마당의 티끌처럼 되었다는 것은 알곡 하나 없이 먼지만 날리는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 군대를 거의 죽이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 보병 만 명만 남긴다. 이는 이스라엘 군대가 궤멸된것같은 심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배반한 심판의 결과는 혹독하기만 했다.
 
 
 
3. 여호아하스의 죽음 공식과 요아스의 통치(8~13절)
여호아하스는 아람과의 전쟁 외에 별다른 업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 왕의 묘실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위에 오른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대로 그의 자손이 왕위를 계승한다(8~9절).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 37년에 이스라엘 왕이 된다. 그런데 1절에서는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요아스 23년에 왕이 되었고 17년을 다스렸다고 기록하는데, 이에 따르면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 제39년에 왕위에 올라야 한다. 이런 이유로 다른 역본들에서는 요아스의 즉위 년도를 39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요아스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죄목은 아버지 여호아하스와 동일하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다.
 
요아스의 업적으로는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것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곧바로 죽음 공식으로 이어진다. 그도 사마리아 왕의 묘실에 묻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요아스에 대한 기록은 매우 간략하지만, 엘리사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배경이 된다.
 
 
 
나는?
-왕이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께서 왕을 아람에게 넘기셨다. 여호아하스가 죄악의 길에서 떠나지 않자 하나님도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그를 넘겨 버리신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자 다시 압제자의 손에 잠시 그들을 맡기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나라에 진정한 샬롬이 없음을 알게 하신다.
 
-우리에게도 준엄한 경고가 된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면 우리를 그것들에 넘기셔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하신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노예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다.
 
-아람 왕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자 들어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구원자를 보내주신다. 이전에 자기 장막에서 누렸던 샬롬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런데 이 회개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때로 고난으로, 혹은 형통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고난이나 형통 자체만 보고 불평하거나 세속적인 복만 추구하지 말고 진실한 관계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불신앙의 아버지 여호아하스, “그 신앙”을 물려받은 아들 요아스. 아버지 여호아하스와 아들 요아스는 대를 이어 각각 17년과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중에 3년은 함께 다스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둘 다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평가하신다. 아비의 길을 아들이 떠나지 않았고, 같이 있는 동안 아들은 아비의 삶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
 
-나는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신앙을 나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리라. 여호와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여호와만 섬기는 삶을 전수해 주리라.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징계하시는 분이시다(3절). 죄를 깨닫도록 반복해서 말씀으로 경고하시고 인내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계속 돌이키지 않으면 진노하신다. 징계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려는 사랑에서 나온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이유다.
 
*징계 중에서도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형편을 깊이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다가도 이스라엘이 호소하자 아람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신다(4절). 내가 어떤 상황과 형편에 있든지 나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보고 정직하게 나의 형편을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한 나라든, 사람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뜻대로 사용하신다(3, 5절).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나라도 움직여 사용하시고 구원하실 때는 구원자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의뢰해야 할 이유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의 공통점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고 계속해서 여로보암의 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그 죄의 영향을 끼치고 결국 모두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게 했다. 작은 죄라도 끝까지 싸워 몰아내지 않는다면 결국은 나뿐 아니라 주변에까지 죄의 영향 아래 있게 한다. 오늘 나의 경외함의 걸음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위급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원을 얻었지만, 여전히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고 있었다. 이처럼 날마다 하나님 은혜의 도우심 아래 거하면서도 아직도 끊어내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두는 죄악은 없을까?
 
 
 
*주님,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이어지고, 왕의 죄가 백성에게 미침을 보았습니다. 공동체의 경건함이 다음세대에 흘러가도록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바라보게 됩니다. 아비의 경건이 자녀들의 경건이 되도록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은혜의 생수를 마시면서 가끔 죄악의 쓴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경외하는 물만 마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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