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후의 잔인함을 통해 성취된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왕하 10:1-17]
 – 2024년 09월 21일
– 2024년 09월 21일 –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예고하신 대로 아합 집안이 진멸됐다. 이로써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왕이 된 예후는 이스르엘과 사마리아에 남은 아합 자손과 관련자들을 제거하는 데 사력을 다한다. 무력을 쓰지않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처단하면서 많은 이들을 살육한다. 단순히 여호와의 명을 따른 것만 아니라 자신의 왕조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는 자구책이었다. 예후는 아합의 후손들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이 머리를 성문 어귀에 두 무더기로 쌓아 놓는 끔찍한 짓을 했다. 당시에는 이처럼 시체의 머리를 쌓은 무더기들을 성문 바로 밖에 두어 주민들에게 반역은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일이 흔했다.
 
 
 
1. 아합의 후손들을 모두 죽임(1~7절)
이스르엘 왕궁에 있던 이세벨을 죽이고 왕궁을 점령하면서 반란에 성공한 예후는 남은 아합의 후손들도 모두 제거하기로 한다. 당시 사마리아엔 아합의 아들(자손) 70명이 있었다. 아합의 가족이 상당히 번성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장로들과 아합의 자손을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내 아합의 후손 중에서 새로 왕을 뽑고 자신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도전장을 보낸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기에 많은 군대와 병거와 말과 무기 뿐만 아니라 튼튼한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마리아 성이 예후를 상대로 전쟁 하기에 충분한 물적 인적 자원이 있다는 것인데, 예후는 사마리아 귀족들이 이것을 믿고 새로운 왕을 세워 자신에게 대항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후는 새로운 왕에 대해 ‘훌륭하고 올바른 자’라는 표현을 통해 조롱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아합 가문에서 이런 사람을 찾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신 있으면 새로 왕을 세워 자신과 싸우자는 예후의 편지를 받은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매우 두려워 한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두 명의 왕들도 감당 못한 예후를 자신들이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사마리아의 모든 관리들과 귀족들은 예후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이고 당신이 말하는 대로 모두 할 것이며 당신만이 왕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예후에게 복종할 것을 전달한다. 5절은 이 뜻을 모은 사람들의 명단을 나열한다.
 
예후는 다시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신하가 된 징표로 내일까지 아합의 자손들의 머리를 이스르엘로 가져오라고 요구한다. 이세벨을 죽일 때 처럼 자신에 대한 충성의 징표로 아합의 자손들을 죽이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자 귀족들은 즉시로 아합의 자손들을 죽여 그 머리를 자르고 광주리에 담아 예후에게 보낸다.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아합의 시대에 왕자들을 키운 자들이었는데, 이세벨을 죽인 시종들과 다름 없이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위해 너무나 쉽게 배신하고 만다. 이런 모습들은 아합 왕조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이 충성과 신의로 아합 왕조를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출세와 권력과 부를 이해 움직인 기회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아합의 후손의 시신을 통해 경고함(8~11절)
예후는 사마리아의 귀족들이 가져온 아합 가문 왕자들의 머리를 성문 바깥쪽 문 앞에 두 무더기로 쌓아 다음날 아침까지 두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앗수르의 관습과 같은데, 적이나 반역자의 목을 쌓아 전시함으로써 반역에 대한 경고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다. 예후는 이 방법을 통해 자신을 반대하고 아합 가문의 편을 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예후는 백성들에게 나가 이 광경을 자신의 반역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는 기회로 삼는다. 예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의롭다’고 선언한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에게 반역하고 그를 죽였다고 한다. 이 사람을 죽인 사람은 누구냐고 묻는데 이는 마치 왕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이런 예후의 발언은 왕과 왕자들의 죽음에 대해 백성들은 아무런 죄가 없고 다만 자신은 왕을 죽인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을 죽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왕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모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에 내리신 예언의 성취라고 선언한다.
 
자신이 아합을 죽인 것과 아합의 왕자들이 죽임당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정당한 행동이라고 강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의롭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예후는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선포한다.
 
이런 예후의 발언이 진정한 신앙고백인지, 아니면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인지는 앞으로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반역에 성공한 예후는 이스르엘에 남아 있던 아합의 가족들과 그의 신하들과 아합 왕가의 후원을 받으며 권세를 누리던 모든 사람들과 제사장들(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까지 다 죽인다.
 
 
 
3.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죽임(12~14절)
이스르엘에게 반정에 성공한 예후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간다. 가는 도중 “목자가 양털 깍는 집”으로 번역된 “벧에케드하로임”이란 곳에 들르게 된다. 이 지역은 사마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산악 지역으로 목자가 양을 모으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이 지역은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 외딴 곳에 있기에 뭔가 의도를 가지고 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도착한 예후는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서 그들이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자 자신들은 아하시야의 형제들이라고 소개하며 왕의 아들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요람과 이세벨의 아들들에게) 샬롬의 인사를 하러 간다고 대답한다. 이들은 아직 요람과 이세벨과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후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먼저 듣고 반역의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미리 아하시야의 형제들(이세벨의 자손들)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다. 신분을 확인하자 예후는 망설임 없이 이들을 모두 사로잡아 “벧에케드”의 웅덩이에서 42명이나 되는 이들을 모두 처단한다. 화자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4.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신하들을 진멸함(15~17절)
사마리아로 가는 도중 예후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온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다. 레갑 족속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남긴 말을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본문의 여호나답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여호나답은 예후와 동맹을 맺기 위해 나왔고, 자신이 예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맹세를 한다. 그러자 예후는 그와 동맹을 맺는다.
 
여호나답은 예후와 동맹을 맺은 첫 번째 인물이다. 여호나답과 예후는 사마리아로 함께 가서 거기에 남아 있는 아합의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이런 예후의 행동은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심 없는 철저한 예후를 통해 아합 가문에 내리신 심판 예언을 모두 실행하셨다.
 
이런 예후의 무자비함을 보며 그를 두려워하게 되지만, 이를 통해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최측근인 이스르엘 귀족들과 아합의 70명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요람의 뒤를 잇는 왕을 세워 아합 가문을 위해 (자신에게 대항하여) 싸우라고 요구한다. 당장 항복하라는 것을 애둘러 표현함으로써 반란 의지를 꺾으려고 한 것이다. 역시나 편지를 받은 즉시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고”,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는 말로 항복과 충성 의사를 밝힌다. 그들은 이미 추락한 왕조에 목숨을 걸 만큼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예후는 이스르엘 귀족들이 맹세한 충성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왕자 칠십 명의 묵숨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자마자 이스르엘의 귀족들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예후에게 찾아간다. 예후는 왕자들의 머리를 성문 어귀에 쌓아 놓음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자가 받는 심판의 심각성을 일깨운다. 다음 날 아침 예후는 이스르엘 귀족들이 한 일이 엘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이었기에 ‘의로운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잔혹하기만 한 살육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 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시선에 매우 낯설고 당황스럽게 보이지만, 당시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지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심판하셨지만, 예후가 한 일은 너무 잔인했다. 예후는 요람 왕에게 문안하러 찾아가는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을 죽였으며,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손 잡고 사마리아에 남아있는 아합의 집을 진멸한다. 예후는 스스로 그것을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라고 호기를 부렸지만, 그것은 예후의 지나친 권력욕을 통해 하나님께서 “바알의 집”이 되어버린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사건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한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로 내 모든 활동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연약함이 누구에게나 있다. 분별없는 열정이나 이기적인 야망과 결합된 열심을 잘 돌아보고 동기와 결과만으로 불의한 과정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새번역_17절). 엘리야가 한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아합의 왕자들, 그 편에 있던 관리들과 친지들과 제사장들을 남김없이 처단했다. 또, 이 반역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세벨에게 문안하러 가는 아하시야의 친족 마흔 두 명을 죽인다. 여기에 자신의 행위가 여호와의 심판임을 지지해주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의 가세는 큰 힘이 되었다.
 
*예언이 대충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예후의 등장이 선명하게 증거한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새겨져야 할 것이 아닌가!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예후를 통한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은 “잔혹”했다. 이는 공의와 정의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심판은 반드시, 그리고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심판 하시기까지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일단 심판이 시작되면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철저하게 공의의 하나님만 보인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이 사람의 눈에는 매우 잔혹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면만 보고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심판은 그만큼 죄의 잔혹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아합과 이세벨의 죄는 도가 넘어도 한참 넘었다. 온 이스라엘을 바알 천지로 만든 것만으로도 그들의 죄는 차고 넘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염두하지 않는 삶이 가져온 무도함으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았다. 그렇게 산 인생에 철저한 심판이 없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고 누린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한편 심판의 도구로 쓰임받는 예후의 모습도 유의하며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잔혹해도 노무 잔혹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지지하며 함께 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자신의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16절)”보라며 사마리아에 남아있던 아합에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한다. “여호와를 향한 나의 열심”이라며 살육을 지나치게 정당화 한다. 즉, 자신의 정칙적 기반을 더욱 안정화 하기 위해 “여호와를 위한 길”을 악용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도구이지만, 예후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예후는 자신이 여호와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정당화 하지만, 실상은 아합 가문과 그를 위해 부역하던 이들을 완전히 도려내고 반역으로 오른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화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나님의 잔혹한 심판을 감당하는 예후가 자신이 남보다 옳다는 생각과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심판자로 서 있지만, 언제든지 죄악을 벗하면 자신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공의로운 심판자는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사랑의 삶을 행여야 하겠다.
 
 
 
*주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지만 예후의 잔인함이 도를 넘는듯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예후같은 지도자가 있는듯 하여 괴롭습니다. 이 시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심판이 잔혹하다 하기 전에 하나님을 떠난 죄의 잔혹함을 기억하여 늘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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