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렘 32:26-35]
 – 2024년 07월 15일
– 2024년 07월 15일 –
예레미야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신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이 불러온 참사가 아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반과 우상숭배가 초래한 여호와의 징벌적 재앙이다. 예레미야의 기도가 개인을 넘어 멸망에 넘겨진 공동체의 관심을 대변하고 있듯이 여호와의 응답도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주는 일종의 가르침이다. 회복과 관련된 메시지를(36~44절) 주시기에 앞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하시고(28~29절) 그 이유를 알려주신다(30~35절). 예레미야가 앞서 거듭 선포한 메시지의 요약과 같다.
 
여호와의 구원을 원한다면 이스라엘은 멸망의 원인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당시 일반적인 구원신학의 핵심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 그러므로 그분의 진노는 일시적이며 노하실지라도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셨다. 하나님에 의한 멸망의 심판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일방적인 구원신학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은 바벨론 신 마르둑에 의한 여호와의 패배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이들은 유다 멸망의 원인을 여호와께 돌린 것이다. 병의 진단이 틀리면 처방전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계획하신 구원에 참여하고 싶다면 유다의 멸망이 여호와의 징벌적 재앙임을 명심해야 한다.
 
 
 
1. 말씀의 계시와 여호와의 자기소개(26~27절)
예레미야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신다. 예레미야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너희(백성)”에게 전달하도록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진다. 먼저 자신을 “나는 여호와요”라고 밝히신다. 이 표현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24:7에서 여호와께서는 제1차 바벨론 포로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라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는 표현이다. 문맥상 19절의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에 연결된다. 24절과 관련해 보면,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이 이들은 때가 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에 불과할 뿐이다. “내게 할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예레미야의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17절)”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이다.
 
 
 
2. 확정된 심판(28~29절)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하신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불타게 하신다. 불가능을 모르시는 분의 결정이기에 예루살렘은 어떤 경우에도 멸망을 피하지 못한다. 또한 예루살렘 점령으로 재앙이 끝나지 않는다. 바벨론 점령군은 성에 불을 질러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29절) 성의 심판이 만연한 우상숭배 때문임을 시사해준다. 지붕에서의 분향은 가나안을 통해 받아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일월성신 숭배를 가리킨다.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렸다. 성 안에 있는 집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상숭배가 저질러졌다. 예레미야는 19:13에서 이미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라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었다.
 
 
 
3. 심판의 이유(30~35절)
여호와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30~31절은 역사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한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면서 여호와를 노하게 할 뿐이었다(30절). “예로부터”는 문자적으로 “어릴 때부터”, “젊은 때부터”로 광야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부터를 의미한다.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표현하고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악이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육체의 하나님”을 떠나 육체에 불과한 자들이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하였다.
 
이와같은 뿌리깊은 반역의 중심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자리 잡은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은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여호와의 “노여움과 분”만 일으켜왔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성이 세워진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진노를 돋우기만 해왔다(겔 16:1-52). 더 이상의 기다림이 무의미해졌기에 마지막 결정이 내려진다. 여호와께서 당신 앞에서 성을 치워버리기로 하신다(31b절). “올기려 하노니”를 직역하면 “치워버리겠다”이다.
 
32~33절은 악의 편만함을 고발한다.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 악행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전 722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나 멸망을 앞둔 유다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다. 마치 악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처럼 악을 저지른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한 것을 보았음에도 유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는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에서 유다의 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온갖 악을 저지르며 여호와를 화나게 했다.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의식적이었다(33절). 이들은 여호와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이고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이들을 돌이키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보내어 줄곧 가르치셨지만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맹목적 질주 앞에 하나님의 가르침과 훈계는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를 통해 여호와의 노력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듣지 아니하며”는 현재 분사형으로 불순종이 이들의 유일한 답변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여호와의 심판은 유다 자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난 후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34~35절은 우상숭배의 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일부를 제외하면 7:30b~31의 반복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 더럽혔다(34절, 왕하 23:4~7).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여호와께서는 자기 집에서 우상들과의 동거를 강요받으신 것이다. 우상들이 성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면 성전 밖의 형편이 어떠할지는 뻔했다. 우상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을 내준 자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다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고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35절)” 하였다. 이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몰렉에게 자기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을 여호와께서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어린아이 희생제사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간주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예루살렘 성이 성전에서부터 주변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의 역겨운 짓거리로 온통 더럽혀졌는데,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예루살렘 성을 지켜주셔야 할까?
 
 
 
나는?
-예루살렘 성 멸망은 죄에 어울리는 심판을 받은 것이다. 느부갓세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그의 군사들이 성읍에 불을 놓을 것이다. 이것은 그 집 지붕에서 바알 신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린 자들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심판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했지만, 한시도 예루살렘 성에서 죄가 떠난 날이 없었다. 그러고도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무지요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한시도 죄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뿐만 아이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무시하여 주의 분노를 자아냈다. 특히 왕과 방백과 제사장과 선지자 등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범죄하였으며 백성도 소경의 인도를 받아 분별없이 욕망을 따라 살아갔다. 그러므로 심판이 조상들 때문에 임했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31:29-30).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셔서 가르치고 일깨우고 경고하였는데도 듣지 ㅇ낳고 받지 않았다.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하였듯이 감금하고 죽이려 하였다. 집집마다 우상을 세워 집을 더럽혔으며 심지어 바알 산당을 건축하고 자녀들을 물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마저 시행하였다. 그러고도 하나님 앞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주권자가 아니었다.
 
-주의 뜻을 알고 싶어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은혜를 베푸시지만 행위의 열매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은혜로 구속하여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창조하셨으나 불순종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게 넘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서만은 아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해가는 이유도 단순히 힘이 약해서가 아니다. 주변 열강들 사이에서 외교를 잘못해서만도 아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다. 하나님은 쉼 없이 백성을 가르쳤으나 백성은 가르침을 가볍게 취급했다. 성전을 스스로 더럽혔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의 일에는 왕이나 귀족, 백성이 한결같았다. 제사장이나 예언자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에는 지도자가 정신을 차려야 마땅하고 백성은 중심을 지켜야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런 사회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지도자부터 백성까지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결국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도구 삼아 징계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도자가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백성이라도 똑바로 정신차려야 한다. 한국사회의 정치나 교회나 이 말씀이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정신차려야 한다.
 
 
 
 
*주님,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좌 가운데서도 자기의 죄를 돌아보지 못하는 무지함이 심판을 불러왔음을 봅니다. 나의 죄를 들추어 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러난 죄를 주님의 손 위에 올려드리며 죄가 구별된 삶을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지도자나 백성이나 모두가 정신차리지 못하면 결국 징계의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음을 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지도자, 백성을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 사회, 종교에 지도자다운 지도자, 깨어있는 백성의 존재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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