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5]
 – 2026년 04월 08일
– 2026년 04월 08일 –
요 21:15-2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디베랴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신 주님은 베드로를 따로 부르신다. 그에게 사랑을 확인한 후에 제자들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신다. 베드로와 함께 있던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진리를 증언하도록 사명을 받는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양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사명을 다하다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와 경쟁자인 애제자는 장수하면서 그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사명인지에 대한 논쟁은 당시에도 있었으나 예수님은 각자 사명이 다르며 각 사명이 모두 의미 있다고 한다.
 
 
 
1.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과 명령(15~17절)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다”라는 표현을 위해 헬라어 ‘아가파오(아가페)’와 ‘필레오(필리아)’를 교대로 사용하셨다(15~17절). 일각에서는 사용된 단어에 따라 다른 해석을 시도하지만, 요한복음 전체 문맥에서 이 두 단어는 의미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대개 아가페를 “하나님 차원의 사랑”으로 필리아는 “인간 차원의 사랑”으로 해석하곤 하지만, 요 5:20과 16:27에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필레오”였다. 본문에서도 이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증거는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17절)”라는 문장을 통해, 요한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는 예수님의 질문이 세 번째라는 것을 밝히며, 앞서 언급한 아가파오로 물으신 것 까지 다 포함하여 이렇게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구분없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비슷한 단어들을 서로 바꿔 사용한 예가 더 있다. ‘어린 양(아르니온)’과 ‘양(프로바톤)’이 함께 쓰였고, ‘먹이다(보스코)’와 ‘치다(포이마이노)’가 함께 사용되었다. 이렇듯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학기법에 가깝다. 이뿐 아니라 요한복음 서론에서 “알다’와 ‘영접하다’와 ‘믿다’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1:10~12). 또한 ‘믿다’와 ‘순종하다’도 같이 사용된다(3:36). 예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로고스’와 ‘레마’가 뜻을 정확히 구분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이와같은 요한복음의 특징은 특정 단어를 통해 그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구분하려는 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오헤할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양을 먹이라’와 ‘양을 치라’는 표현은 목자의 사명을 암시한다. 양을 먹이는 것은 본래 예수님의 사명이었다(10:1~8; 참조, 겔 34:23; 37:2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들을 위탁하시며 자신을 대신하는 목자가 되라고 하신다. 
 
신약에서 “먹이다(보스코)”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용례는 본문이 유일하다. 누가는 이 단어를 집 나간 탕자가 돼지를 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였다(눅 15:15).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놀라운 직분을 받는다. “치다(포이마이노)”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하고(마 2:6; 계 7:17),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나타내기도 한다(행 29:28). 문자적인 뜻은 양을 먹이고, 지키고, 인도하는 목자의 전반적인 목양활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먹이다”와 “치다”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어떤 목양을 일컫는 것일까? 요한복음 10장에 따르면, 목자로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꼴을 제공하셨다(10:9). 양들을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셨다(10:10). 또한 삯꾼과 달리, 이리로부터 목숨을 다해 양들을 지키셨다(10:12~15). 양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도 인도하셔서, 두 종류의 양들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10:16). 이러한 목자로서의 얘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델이 된다. 예수님이라는 위대한 목자의 위임을 받아, 양들이 예수님의 목양을 잘 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베드로의 운명과 사명(18~19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젊었을 때의 모습과 늙었을 때의 모습이 다를 것이라 하신다(18절).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다니지만, 늙어서는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 하신다. 특히 주님은 “팔을 벌리다”는 표현을 통해 이를 묘사하신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말씀을 해석해준다(19절).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영광을 얻으시는 분으로 앞서 묘사되었다(13:31~32).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1). 예수님은 사명을 성취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4).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를 암시하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제자도를 암시하기도 한다(13:36). 즉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3.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과 사명(20~25절)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을 묻는다(21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운명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데 집중하라고 하신다(22절). “따르다(아콜루떼오)”는 이미 19절에서 언급된 제자도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일찍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고별강화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려 했다(13:36~38). 하지만 예수님은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 하셨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은 정식으로 베드로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양의 삶을 감당하라 하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킨다(23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23절). 따라서 본 단락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을 다루지만, 실제로는 베드로의 사명도 계속 언급하시는 것이다.
 
“이 일들(24절)”은 요한복음 전체를 가리키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증언을 의미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증언”에서 시작해서(1:6~9)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로 바라보는 요한복음 전체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다. 요한복음의 중심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있다. 세례 요한의 주된 사역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다(1:7~8, 15, 32, 34; 3:26; 5:33).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했고(4:39),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을 증언했다((5:36; 10:25).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증언하셨다(5:37; 8:18). 그리고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며(5:39),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저자는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자로 묘사한다(19:35; 24절).
 
이러한 증언들을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것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라고 밝힌다(20:30~31).
 
 
 
나는?
-예수님은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나타나셔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님이 이 오래참으시는 끈질긴 사랑이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이끌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은 세 번의 부인을 통한 철저한 배신에 대해 세 번의 무례하 듯 보이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지독하게 철저하고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 ‘주님께서 아신다’고밖에는 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믿나이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는 고백처럼, 사랑하지만 그 고백이 곧 사랑의 삶을 보장하는 것도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양을 치고 먹이라는 사명을 주신다. 그것은 사랑이 없이는 주의 양을 돌볼 수 없다는 의미이며, 또한 사랑의 고백은 주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실천으로만 그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주를 사랑함이 없는 이는 삯꾼 목자가 되며, 그것은 거짓 사랑 고백임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를 향한 내 사랑 고백도 나의 삶에서 그 진실성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각각 다른 삶을 준비하시고 기대하시며 또 친히 빚어가신다. 베드로는 장차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버려서 양들을 치고 먹이는 목자가 되게 하실 것이고, 요한은 좀 더 오래 살면서 다른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기대와 돌보심과 인도하심 없이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 차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사랑을 다짐 받고 싶어서라기보다 사랑하다는 고백과 사랑하는 삶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려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삶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이 성숙이고, 마침내 일치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삶으로만 증명된다. 예수님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양을 치고, 양을 먹이라고 거푸 대답하셨다. 고백만으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한다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예수님처럼, 양을 위해 희생하는 목자가 되라는 당부셨다. 고백만 하는 사랑은 허무하다. 사랑하는 삶이 함께여야 묵직해진다.
 
*흥미롭게도 자기의 죽음 예언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도 궁금해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허락하신 소명은 나와 관계없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소명은 더 나은 소명도, 더 못한 소명도 없다. 다만, 소명에 충성하느냐, 불충성하느냐만 있을 뿐이다. 순종하지 않는, 더 나아가 충성하지 않는 소명은 모두 죄의 길을 재촉할 뿐이다. *신앙의 슬럼프는 주님과의 대화가 터지면 물러간다. 영적 침체는 주님과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차리신 밥상은 말문이 다시 터지게 했다. 주님께서 책망보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이라, 내 양 떼를 쳐라, 내 양 떼를 먹이라” 연이어 대답해 주심으로 주님의 양 떼를 맡기기 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양 떼도 사랑하며 먹이고, 친다.”
 
*오늘 나에게도 성령께서 이렇게 물으신다. “내 사역 잘하고 있니?, 이것밖에 못하니?” 가 아니라 “네가 그 어떤 것, 어떤 사람들 보다 나를 사랑하니?”… 일의 능력을 묻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신다.
 
*그렇다! 주님의 공동체는 일, 능력이 우선이 아니다. 사랑이 먼저다! 사랑이 최고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최고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먼저다! 이 기본적인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회복이 일어나면 주님을 위해 어떤 길이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주님을 부인하던 그 입술은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그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그가 원치 않는 고난의 자리로 그를 이끌 것이다(18절). 하지만 베드로는 달라질 것이다. 또 다시 부인하며 도망 치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위한 고난이 기다리는 그의 삶을 굳게 붙잡고 세우는 것은 “사랑”이 틀림없다. 사랑하면 견딘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말씀 하신다(19절).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 일까? 그 길은 “주님을 사랑하며 걷는 길이다.” “주님을 사랑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라 하신 길을 기꺼이 걷게 될 것이다. 그 길의 끝이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닐 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예수님처럼, 예수님께 보냄 받은 그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온전하게 끝까지 따를 것이다.
 
*갈릴리 디베랴 카페에서의 “사랑 대화”가 주님과 끝까지 걷게 한 회복의 첫 걸음이었다.
 
*내가 걸어갈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는 마음은 처음에는 단순한 궁금함으로 시작했을 지 몰라도 점점 이에 마음을 빼앗기면 “주님”이 보이지 않고 “그”만 보인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살아가다 “그에게 집중하며 자신과 비교하며 주님을 잃어버린다. “애초에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각각의 걸어야 할 삶의 길의 모습이 다르다. 베드로와 요한은 똑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걸어가는 삶의 모양은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걷다 주님 앞에 서게 된다. 그 길을 굳이 비교하며 걸어갈 필요가 없다. “주님만 바라보며” 걸으면 된다.
 
*또, 요한이 굳이 이런 기록을 남긴 이유가 있다.  “이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새번역_23절).” 갈릴리에서의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고난 받다 죽는 삶과 비교해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소문으로 퍼졌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즐거운 식사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놀랍고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부끄러움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 민망함은 고스란히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특히 베드로가 그랬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런 제자들의 민망한 기억들을 따지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환난, 핍박의 시대에 주님의 증인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내려면 반드시 씻어내야 할 마음의 짐, 흔적들이었다. 삼 세번, 질문이 이어지며 베드로의 안색은 점점 “근심(17절)”되어 갔다. 의례적인 그의 대답은 주님의 질문이 거듭 될 수록 고심하고 고뇌가 담긴 대답이 되었다.
 
*나도 주님의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면….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는 주님의 질문이 이어진다면?  나의 대답은 어떨까? 주님의 반복되는 질문은 의례적인 형식을 깨뜨리고 마음의 중심을 흔드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그저 의례껏 시작 되었지만, 점점 진실하고 무게있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진실하고 무게있게 대답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닥쳐올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할 것이다. 기꺼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사람들이 주는 고난을 온 몸으로 감당하게 할 것이다. “사랑의 대답이 사랑의 삶을 온전히 지키며 살게 하였다.”
 
*나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지… 주님이 주는 삶의 혜택들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처럼 앞으로의 삶이 혜택이 아니라 고난으로 채워져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무게감 있는 고백의 힘으로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오늘 아침 나에게 던지시는 질문 인 것만 같다!
 
*종홍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갈릴리 식당의 대화(교제)와 같은 은혜가 늘 저에게 필요합니다.
*주님, 일과 능력보다 사랑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꼭 붙잡겠습니다.
*주님, 비교하는 일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협력과 연합의 가치를 주님만 바라봄으로 구현하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사랑을 받았으니, 주님만 바라보며 충성되이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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