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스런 가나안 정복 전쟁의 말기 하나님을 떠난 모습은 급기야 “여호와의 사자”까지 등장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여호와의 사자의 선언은 가나안 땅에 적응해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도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도록 내버려 두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
세월 앞에 장사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끝이 났고,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정복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지만 그들도 역시 조상의 길로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세대”였다. 홍해,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 시내산 언약식,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러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공통 경험에서 오는 일체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없는(여호와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은 후의 일이었다.
1.통곡의 땅(1-5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몇가지 대명사로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이다. 그런데 그 땅에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제껏 승리의 환호성이 더 많이 울려 퍼지던 백성들에게 깊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가는 것은(1절) 길갈은 여호수아 세대가 요단강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12 돌기둥을 세운 장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녀들에게 상기 시켜 주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는 성읍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었다. 성막도 가나안 땅에서 처음 세워진 곳이었다. 이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 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상기 시키시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부어 정복 전쟁에 임하지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인 여건들과 타협하며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김없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라 하셨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런 불순종을 꾸짖으신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한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를 회상하신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던 것(6-7절)”을 돌아보신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벧엘)으로 올라와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들은 결국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새번역_3절).” 라고 외쳤다.
이에 백성이 큰소리로 울었다! 언뜻 보기에는 진실된 회개의 모습인 듯 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실된 회개에는 몇 가지 증표가 따른다. 먼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표현들이 나타난다. 단순히 감정적인 격한 표현들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예배와 기도의 진정성은 반드시 기도와 예배 후의 모습에서 변화된 행동을 찾아 볼 수 없다? 통곡 후의 의지에 찬 변화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보김(우는 자들)”일 뿐이다. “보김”은 회복이 완성 된 것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이어야 했다.
2.다음세대가 아니라 다른세대(10절)
“보김”의 땅이 되어 버릴 원인을 여호수아 세대의 모습을 회상하시면서 알려 주신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장로들(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0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것 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어김없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김없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다. 그런데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려 주지 못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하고(않고) 땅만 물려준 그들의 다음세대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이 다른세대가 물려 받은 것은 그저 땅 뿐이었다. 출애굽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불려 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고민할 필요 없는 기본 선택이었다. 여호수아 세대는 이 땅의 풍요함을 물려 주기 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물려 주었어야 했다.
*결국 땅(물질)만 물려주면 안 된다. 부모와 공통 분모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공통된 경험은 우리의 자녀 세대가 우리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3번의 절기(초막절(유월절),맥추절(오순절), 수장절)를 모든 이스라엘이 지키라 하셨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정서를 갖도록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자녀들과 함께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의 자리를 함께 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함께 목청껏 마음다해 드리는지, 가정에서 혹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 이와같은 심정으로 함께 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정확하지 않지만 이미 한국 교회 안에 다음세대가 모이는 주일학교 70%가 넘게 사라졌다는 보고가 절망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귀한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다음세대가 되는 기초를 쌓는 일이다. 부모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젖듯 마음에 스며들어 있어야 “다음 세대”가 된다.
*모세의 세대가 여호수아의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에서 함께 만나고 누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오롯이 그 세대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하지만 여호수아 세대는 그토록 소망했던 가나안 땅을 분배 받는 은혜가 성취 되었지만, 여호수아를 알고 따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죽자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나는?
-여호수아를 알았단 세대는 통곡은 무성한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땅을 다음세대에게 물려 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무성한데, 말씀대로 살아내는 삶은 없는 자세를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을 물려 주었지만, 살아내는 삶은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들도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함께 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식의 말만 무성한 계승은 전혀 다른 세대를 낳게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진정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존의 세대, 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듣고 자라왔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학문의 지식 뿐 아니라 경험의 지식, 정서의 지식을 포함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두 버무려진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이다.
-다른 세대의 출현은 기록이 전수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땅이 전수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수 되지 않아서 출현 된다. 복음을 심으면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하나님을 심지 않았으니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도 부모님에게서는 다른 세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정말 다른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부모님에게 내가 다른 세대이듯, 나의 자녀도 이미 다른 세대일 수 밖에 없다. 삶의 철학이나 가치, 태도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중심은 다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만큼은 다른 세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그래서 가족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정예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자연스러운 말씀 읽기나 묵상 나눔을 티타임과 곁들여 갖는 다거나,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 잠재우기 전에 기도를 해준다거나, 함께 교회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거나… 지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공통 경험의 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을 아이들과 꿋꿋이 감당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면 부모가 삶으로 보여주고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 하면 된다. 함께 경험 된 신앙의 추억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한다.
*”보김(우는 자들)”은 나의 세대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보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세대의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사사시대의 특징은 “보김”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는 “보김의 세대”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보김이었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함께 하시며 앞장 서시며” 광야의 길을 인도하셨던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김”의 세대가 지금 해야 할 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주님, 보김(우는 자들)이 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그 안에 거하겠습니다.
*주님,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교회가 앞장 서겠습니다. 땅 보다 하나님을 물려 주겠습니다.
*주님, 나의 자녀들에게 땅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 땅에! [시편 114:1-8]
이 시편은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111~118편)의 네 번째 시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회고하는 서술적인 찬양시이다.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권고의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