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 대한 저주 요청이 이어진다. 특히 악인이 저주 받아야 할 이유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 다윗의 성숙함이 돋보인다.
1.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16~20절)
시편 109편의 저주의 내용은 개인적인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묘사한다는 전제를 놓치면 안 된다. 이미 기록된 악인의 죄(2~5절)를 좀 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듯 본 단락을 통해 나열한다.
16절은 악인의 행동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인데, 악인이 “인자(헤세드)” 베풀기를 기억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그의 백성도 서로 인자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원수는 시인을 향해 거짓을 말하며 선으로 악을 갚았다(2~5절). 이것이 인자 베풀기를 잊은 모습이다. 13~15절에서는 “기억하다”라는 동사가 반복되며 하나님께서 악인의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들의 기억은 끊으셔야 한다고 했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이 “인자 행하기를 기억하지 않은” 모습이며,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은 행동이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17~19절은 이렇게 인자를 기억하지 않는 결과로 임한 저주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악인이 다른 이들을 저주하기 좋아하더니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였고, 축복하기 싫어하더니 그 복이 악인을 떠났다고 말한다(17절). 이런 모습이 “인자함이 없는” 구체적인 사례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절은 악인이 저주하기를 옷 입듯 했는데, 그 저주가 정작 그의 몸과 뼈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19절도 역시 저주가 악인에게 옷과 띠와 같다고 한다.
20절은 저주가 악인 자신에게 임하는 현상은 그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보응임을 제시한다. 악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임하지 않게 되며, 복은 떠나고 저주가 임하게 된다. 악인은 여호와와 관계없는 자들이다.
2. 여호와를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다(21~31절)
이 단락은 악인에 대한 저주라는 주제를 접어두고 시인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겸손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 인자하심을 근거로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1절은 하나님께 올려드린 구원의 요청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따라 자신을 대해달라고 요청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건져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지가 담긴 이름임을 밝혔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에 따라 자신을 대해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근거한 구원 요청임을 선명하게 나타낸다. 특히 “주의 인자하심으로(헤세드) 나를 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굳게 의지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기억하지 않았기에 저주받았으나,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기억하고 있으므로 구원을 요청하여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22~25절은 시인의 고난에 대한 묘사이다.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22절)”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실제의 삶이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일 수밖에 없다는 표현에 더 가깝다. 23절은 자신을 석양의 지는 그림자, 바람에 불려가는 메뚜기로 표현하고 24절은 금식으로 인해 무릎과 육체가 수척함을, 25절에서는 악인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비방하여 수치거리가 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고난의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요청하려는 절실함을 드러내준다.
26~27절은 다시 한 번 인자하심에 근거한 구원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간구한다. 그 이유를 27절에서 이러한 구원이 악인들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악인들은 시인을 저주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저주를 악인들에게 돌리시고 시인에게는 구원을 베푸셨음을 보이셔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의 공의가 명확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도한다.
28~31절은 109편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28절은 저주와 복의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악인들이 시인을 저주하였으나 하나님은 시인을 복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20, 26절이 밝히듯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 이루어 져야 하기 때문이다. 29절은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역시 18~19절에 등장한 옷 입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30절은 여호와께 입으로 크게 감사하며 수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할 것을 약속한다. 이는 “신뢰의 고백”으로 일컬어지는 시편 탄식시의 전형적인 마무리 형식이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고 오히려 악인에게 저주를 내리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는 것이다.
31절은 여호와께서 궁핍한 자의 오른편에 서서 구원하신다는 이미지를 구현한다. ‘오른편에 서서’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적극적이고 주권적인 도우심에 대한 표현이다. 여호와께서는 왕으로서 좌정해 계시지만, 때로는 일어나셔서 시인을 위하여 의의 구원을 행하신다. 정리하면, 이러한 여호와의 주권적인 모습은 108편에서는 열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는 것으로 나타났고, 109편에서는 악인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의를 이루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110편에서는 보좌 우편의 주님께 통치권을 위임하심으로 언약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시인은 “인자”를 베풀 줄 모르는 악인이 하나님과 이웃의 인자를 경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주하기를 좋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들에게 도리어 저주가 임하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저주는 날마다 옷을 입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었다. 날마다 쉼 없이 시인에게 악담을 퍼붓는 이들이 벹은 저주가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자를 모르는 악인들은 인자를 행할 수도 없다.
-시인은 자신의 운명이 악인이 저주한 대로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기도한다. 하나님은 인자를 거두지 않으실 줄 믿었다. 자신의 가난과 궁핍과 상처를 외면할 분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대로 석양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목숨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대적의 비방과 조롱 앞에서 하나님의 신원만 기다리며 금식하느라 수척해진 자신을 주님이 건져주실 것을 믿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악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증명해주시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하면 그대로 이뤄질 줄 아는데, 도리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다짐하면서, 악인들의 오른편엔 사탄이 있지만(6절), 자신의 오른편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변호해주시기를 구한다. 부당한 고소에 죽음의 선고를 받을지 모르는 이 다급한 처지에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간청한다. 시인이 의지할 분은 참된 재판장되신 하나님밖에 없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소관이다. 내가 축복하고 저주한들,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축복과 저주는 결정된다. 시인은 남을 저주하고 저주의 삶을 안겨주던 자들이 여호와께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니 그들이 뱉은 저주가 그들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저주하는 자로 인해 내가 상처와 고통을 받을 필요없다. 하나님께 토로하면 된다. 내가 직접 그 악을 갚으려고 반응할 필요도 없다. 우리 삶의 주권자되신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실 것이기에…
-반면 시인은 악인들의 이런 저주와 조롱과 학대와 몰인정 앞에서도 그가 기댈 것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간구한다. 악인에게 저주가 돌아가는 것이 의인인 시인에게 구원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믿었다. 그렇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잡는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
*다윗은 악인의 무고한 비난으로 큰 고통을 당할 때 그가 한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라고 고백했다. “주의 인자하심은 선하시오니”, “나를 선대하소서”라고 고백한다. 대적을 향한 저주를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면서도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원수는 자신을 대적하여 악담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므로 그에게 선대하실 것을 구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의 인자하심의 은혜로만 오늘을 살아갑니다.
*주님, 선하신 주님께 토로하면 주님께서 선대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