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기손강에서 시스라와 그의 병거를 넘겨 주시겠다는 말씀대로(7절) 앞서 행하시며 시스라와 온 병거와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다(14-16절). 또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시겠다는(9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서 죽임을 당한다(21-22절). 말씀하신대로 ‘여인’ 야엘의 담대한 행동이 이스라엘을 구했다.
1.바락의 헛다리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바락은 전쟁은 하난미께서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드보라에게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올라가지 않겠노라 말했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과정에서는 이런 바락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패주하는 시스라의 패잔병들을 처리하는 데 몰두한다. 그는 끝까지 시스라를 추격하여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겠노라 어깃장을 놓던 그 자리에서 말씀하셨었다(9절). 한창 패잔병들을 추격하면서 시스라를 찾으려는 그의 머리에는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고 난 후, ‘나가서(22절)’ 이를 알리지 않았다면 계속 추격했을 것이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야엘의 장막에 관자놀이에 말뜩이 박힌 시스라를 바라본 바락의 마음은 어땠을까?
*온전하지 못한 순종에도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말씀하신 대로 완벽한 승리를 주셨다. 바락은 그 승리를 겉돌며 거두었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은혜가 이와 같다. “온전히 믿고 순종하면 드보라와 야엘처럼 승리의 현장에서 당당하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안한 믿음은 승리의 현장에서 개운치 못한 후회함이 남을 뿐이다.
2.겐 사람 헤벨과 야엘
드보라와 바락의 출정과 시스라와의 개전 사이에 별로 상관 없을 듯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데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가운데 헤벨이라고 하는 겐 사람이 동족을 떠나, 게데스 부근에 있는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새번역_11절)”
‘모세의 장인’이라고 번역 되었지만, 장인(하탄)이라는 단어는 “장인”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사위, 아들, 처남”이란 뜻도 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모세의 장인(처의 아버지)는 출 2:21에서 “르우엘”, 출 18장에서 는 “이드로”로 기록 되었다. 그리고 민 10:29에서 “호밥”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르우엘(이드로)의 아들”로 소개한다. 그렇다면 “모세의 장인 호밥이 아니라 모세의 처남인 호밥의 자손 헤벨”로 이해해야 한다.
또, 삿 1:16에서 모세의 장인의 후손들인 겐 사람들이 가나안 남부 지역에 정착했다는 기록으로 이들과 연관된 정보가 등장한다. 헤벨은 이들 중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정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어지는 12절에서는 바락의 군대가 다볼산에 모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렸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17절에서 시스라가 패주하여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다고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한다. 그리고 18절에서 야엘은 시르사를 영접하면서 “나의 주여(아돈)” 이라고 부른다. “아돈의 뜻은 주, 주님(Lord), 주인(master), 소유주(owner)”라는 의미들이 있다. 이와같은 기록을 통해 유추하면, 겐 사람 헤벨은 이중 스파이였다.
납달리 지파 바락의 거주지 게데스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들의 근황을 하솔왕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하솔 왕에게도 충성하는 배신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주소를 잘 대변해 준다.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을 헤벨도 배신한다.
그런데 그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 배신의 삶에서 돌이킨다. 그녀의 돌이킴은 가나안 전쟁 개전 초기 여리고성의 라합을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백성들의 삶을 익히 듣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고자 결단한 믿음의 결연한 행동을 생각하게 한다.
야엘은 시스라의 행색을 보고 단박에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승리 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지긋 지긋한 이중 스파이의 삶을 끝낼 결단을 내린다. 헤벨에서 이런 결단의 모습이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헤벨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또, 야엘이 시스라를 해치우는 과정을 보면서 바락과도 비교가 된다. 주저하던 바락과 달리 야엘은 결심하고 결행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당연하게도 승전의 주역은 야엘이 된다!
3.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는….
여성 리더십의 부각은 그만큼 남성 리더십의 쇠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뭐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인가 싶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는 성별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리더십이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곳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리더십이 당연시 여겨지던 모습과 분명 차별되는 모습이었다.
드보라(꿀벌)와 야엘(염소)의 이름의 의미로만 보자면, 이 여인들의 순종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하는 데, 꿀벌(드보라)과 염소(야엘)의 순종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에는 전통에 얽매인 관습, 편파적으로 안착된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이를 통해 세상을 통치해 나가신다.
*바락과 헤벨처럼 나약하고 배신하는 시대정신 속의 남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행하실 “승리하는 전쟁”을 확신했던 두 여인을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전쟁은 그치지 않을 터인데, 하나님의 호명을 받아 믿음으로 이 전장에 설 자 누굴까! 바로 나이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의 백성 안에 머물기를 포기한 헤벨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 주저하는 나약한 바락의 모습이 아니라, 알려주신 대로 순종하며 기꺼이 다볼산에 동행한 드보라나, 자신의 장막에 피신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고 다시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복권되기를 주저 하지 않았던 야엘과 같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꿀벌(드보라)”을 보내 주시고 “염소(야엘)을 예비 시켜 주셨다. 그녀들의 결단과 결행의 순종을 통해 20년 간의 고통을 끝내게 하셨다.
-드보라 앞의 바락이나, 야엘의 손에 황당하게 죽어간 시스라의 모습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감동) 앞에 온전히 순종 하여 결행 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된다. 사사시대는 청동기 시대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청동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하솔왕 야빈은 이미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리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라도 하나님께서 휘두르시는 자연의 칼앞에 속수무책이다. 힘이 세다고 이기는 것도, 약하다 하여 무조건 패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논리에 잠식된 영성 안에 뿌리 박힌 패배주의부터 걷어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 철기 문명도 견뎌낼 재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야 말로 문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지혜로운 삶인 것이 틀림없다.
-바락의 헛다리,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버스 떠나자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머쓱함과 부끄러움이 왜 내 몫처럼 느껴질까? 왜 오늘날 교회처럼 다가올까! 코로나와 함께 일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해 나가는 중요한 시기에 바락의 헛다리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바락은 여전히 다볼산에 집결하고도 주저하고 있었다. 기손강에 시스라의 900대의 철병거가 몰려드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반면, 가장 두려워 질 수 있는 그때 오히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14절)”외치는 드보라의 외침에 그제서야 진격했다!
-드보라가 바라보는 하나님을 나도 바라 보기를 사모한다! 나를 앞서 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며 목회 하고 싶다! 주님의 등을 보고 싶다!
*주님, 바락이나 헤벨이기보다 드보라나 야엘과 같은 야성의 믿음을 추구하겠습니다. 주님 말씀 앞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앞서 행하시는 주님의 등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 땅에! [시편 114:1-8]
이 시편은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111~118편)의 네 번째 시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회고하는 서술적인 찬양시이다.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권고의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