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벌써 다섯 번 째…. “또” [삿 6:1-10]
 – 2021년 11월 12일
– 2021년 11월 12일 –

기드온 이야기다.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까지 합하면 9장까지 쭈욱 이어진다. 사사들의 이야기중 가장 많은 분량이다. 그만큼 기드온의 이야기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세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나 “또”이다. 사사 드보라 이후 평안의 시대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1절)” 고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지독한 “또”의 망령은 왜 이리 질긴 것일까? 이것이 인간 안에 깊게 오염된 죄의 본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앞에서 범죄의 “또”가 고통의 시대 “또”를 다시 불러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또” 일까? 답답하고 짜증이 날려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또”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할 말 없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시작된 고통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분배 받아 삶의 터를 일구던 곳에서 압제받아 괴로움을 당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2절)” 만들어 피할 정도다. 아니, 쫓겨난 것이다.

*자신들의 편리함과 합리적인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쫓아내라”를 불순종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거주한 민족들에 의해 핍박과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디안 족속”에게 오히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간 것”이다.

*사사기 저자는 미디안 족속의 만행을 고발 하면서 “파종 할 때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블레셋 성 중의 하나)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멸하여 하니(3-5절)” 라는 표현들로 그 심각성을 고발한다.

*미디안 족속은 이렇게 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과 연합하고(아말렉과 동방 사람) 남쪽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족속의 가사 성읍 근처까지 “진을 넓게 쳐서” 아예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약탈은 마치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고 기록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5절)”고 했다. 아예 정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1.미디안은 누구?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로 맞이한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명의 자녀중 넷째 아들이다(창 25:1-2).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사이에 낳은 자녀들이 훗날 이삭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이들 자녀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며 모두 요단강 동쪽 땅으로 보냈었다. 혈통을 따진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싸우기 보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미디안은 아말렉과 동방사람들까지 연대하여 침략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 뿐 아니라 미디안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을 큰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나안 땅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때에도 모압과 연대하여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였고(민 22:4), 싯딤에서는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었다(민 25장). 이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응징하여 씨를 말리기까지 했다(민 31:1-18). 미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 것이다. 지금은 통쾌하게 상황이 역전 되었다.

이들은 주로 요단강 동편 남부에 거주하며 시내 반도에서 요단강 동편 북부를 오가는 반유목민 생활과 대상(장사)를 하던 부족이다. 한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이었고, 사사 옷니엘과 드보라시대 미디안 족속이던 겐 사람의 자손들이 정착한 것(삿 1장)과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이야기도(삿 4-5장)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되어 함께 생활 하였지만,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빼앗긴 삶의 일부 터전의 복권을 위해 힘을 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흘러 미디안의 후손은 그때 진멸 당했음이 무색하리 만치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밀고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누리던 중,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니” 대적이 더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에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 보다, 민족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 늘 순종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압제 하는 미디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위드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부과 세상이 교회를 자신들의 삶의 연대로부터 자꾸 밀어 내려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절제함 없는 태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은 확실히 역적으로 사사시대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압박하는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문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목전에서” 아니,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과연 묵과 하시겠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 하실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내 자신이다!


2.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를 반복해서 “또”를 직면하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염치가 없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새번역_6절)” 부르짖기는 했는데 미루다 미루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부르짖은 것처럼 기록했다. 개역개정이 “궁핍함(달랄)”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고갈되다”라는 뜻 뿐 아니라 “낮아지다, 천하다(보잘 것 없게 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육체적인 굶주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음을 드러낸다.

이것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으로 말미암아(7절)”에 두었다. 그래서 6-7절의 하나님께 부르짖음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었다. “회개없는 부르짖음”이 애처롭다.

고통 속에 아우성 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산(하르, 산지, 산, 언덕)에서 웅덩이(민하라, 깊은 계곡 갈라진 틈)와 굴(메하라, 동굴)과 산성(메차드, 요새, 성채, 보루)를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빈번한 침입으로 가나안 땅의 평원을 빼앗긴 채 눈치 봐가며 겨우 겨우 농사를 짓다 이마저도수확물을 빼앗기를 무려 8년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파종할 때(3절)” 침입했다고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은 건기가 지나 이른 비가 내리는 10, 11월에 파종 하고 우기를 지나 3,4월에 겨울 보리 수확을 시작한다. 미디안이 파종할 때 침입했다면 이들이 유목민임을 고려한다면 곡식이 싹을 틔워서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에 지신들의 짐승들을 밭에 풀어 놓았다는 의미다. 아주 악랄하다. 이와 함께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도 약탈 했을 것이다. 유목민들이었기에 장막을 치고 오래 머물면서 지속적인 약탈을 했다는 것이다. 그 범위를 지중해 연안 가사(블레셋 성읍)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괴롭혔다.

*”또”가 반복될 수록 “또”의 고통은 더 광범위해지고, 평화의 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문제는 고통의 환경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온 원인이다. 사사기를 이것을 통찰하라고 도전한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 같이 많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미디안의 침략은 신 28장의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그대로 임했음을 보게 한다. “… 집을 지어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것을 따먹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소를 당신들이 눈 앞에서 잡아도 당신들이 먹지 못할 것이요, 당신들의 나귀가 당신들의 눈 앞에서 강탈을 당해도 도로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양 떼를 당신들의 원수에게 빼앗겨도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땅에서 거둔 곡식과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는 날 동안 압제를 받으며, 짓밟히기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일 때문에 미치고 말 것입니다(신 28:30-31, 33-3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이 생각나야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회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토로에 그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3.하나님의 반응(7-10절)
앞선 4명의 사사(옷니엘, 에훗과 삼갈, 드보라)는 부르짖는 즉시 사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사부터 세워 주지 않으신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깨워주신 말씀이 압권이다. “….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절)”

선지자는 남북 분열 왕국때 등장하지 않았다. 이미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칭했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복의 승리의 기운이 이미 마를대로 말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전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씀이 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늘 말씀이 들려지고 있을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일어난 고통 앞에 고통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려 주신다. 상황 호전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전임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말씀을 주시는 은혜가 어쩌면 이들에게 “한 선지자”를 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죄에 젖어 있는 삶을 타격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죄를 타격할 때 고통스러운 상황이전에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신 것은 고통에 울부짖는 것 보다, 죄에 울부짖어야 함을 깨닫게 하식 위함이다.

*내 삶 속에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범죄의 타성을 말씀으로 타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상황과 여건을 해결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이 먼저가 아니다.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며 따라가는 “말씀 회복”이 먼저다!


나는?
-결국 고통 때문에 울부짖더라도 그 울부짖음이 있어야 “말씀”이 비로소 들려짐을 깨닫는다. 내 삶의 고통의 문제가 여전이 해결되지 않아서 늘 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다! 아! 고통과 울음이 은혜의 시작, 통로로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져야 산다! 그래야 울음(통곡)이 물러가고 웃음이 함께 찾아온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사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도 “또” 임하고, 고통도 “또” 시작된다. 지금 내가 “또”를 끊지 못하면, “또”, “또”, “또”가 이어진다… 아… 주님….

-하나님의 진노가 “또” 임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노하실 것을 알면서도 패역의 길을 끊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본 모습이다.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주님, “또”의 관성이 죄악이기보다 순종이고 싶습니다.
*주님, “또” 진노하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죄악의 관성에 휘둘리지 않을 힘을 주십시오.
*주님, “먼저 말씀”을 들려 주시는 은혜를 따라 살고 싶습니다. 늘 말씀이 들려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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