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지자의 외침이 웅덩이와 굴과 산성에 칩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울부짖는 백성들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사사 기드온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는 기드온을 찾아내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한다. 기드온은 믿기지 않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려 하며 표적을 구한다. 하지만 결국 여호와 샬롬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가 사사로 등장할 때는 그 과정이 매우 짧게 언급되었다. “한 구원자(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마도 다른 사사들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사로 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사명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 되기까지 기드온에게 보여지는 과정이 모든 사사들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 끝에 출현하는 것이다. 기드온과 대화하고, 반문하는 그의 말에 대답 하시며 때로 표징도 보이는 설득의 과정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사들을 이렇게 세우셨을 것이다.
1.기드온은 누구?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 미디안 족속들에게 7년 동안 압제를 받았다(1절). 이런 압제 속에서 그들의 삶은 피폐해 질 대로 피폐해 졌다. 산지에 굴을 파고 계곡 사에에 숨어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이다(11절). 그는 므낫세 지파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11절) 였다. 밀을 타작하는 곳은 “확 트인 타작 마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조금씩 가만 가만 타작했다는 것이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포도주를 밟는 구덩이에서 때가 때인지라 가만 가만히 타작을 했어야 했다(11절). 이런 기드온이 과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수 있을까?
2.큰 용사여(12절)
여호와의 사자는 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 버린(순종하지 않은) “말씀”을 상기 시키셨다. 그리고 기드온을 찾아 오신 것이다. 말씀을 선포한 후 사명자를 찾아 오신 것은 기드온도 역시 그 한 선지자의 말씀에 반응 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듣게 한 후 맡기실 사명을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큰 용사여”이다. 미디안의 폭거에 숨 죽이며 포도주 틀에서 밀 추수를 하는 기드온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과 힘이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큰 용사”인 것이다.
“큰 용사(기보르 헤하일)”을 직역하면 “그 군대의 영웅”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 나라 군대의 영웅이 된다.
*사람의 능력으로 “큰 용사”를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심”이 곧 큰 용사됨의 척도이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큰 용사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다.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큰 용사라고 선언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족속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한 기드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터이니 이보다 더 큰 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언의 연속이다. 출애굽때 애굽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셨고, 광야 40년 동안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지키셨다.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도 역시 말도 안되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이 모두 이루어 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다. 이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이다. 기드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 선언 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 이치의 굴레를 뛰어 넘어 “큰 용사( 그 군대의 영웅)로 세움 받는다. 그가 아무리 “므낫세 지파(동과 서로 나뉘어진 약한 지파)”였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보잘 것 없는 영향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장 큰 용사이다.
3.밀당 끝에 여호와 샬롬(12-24절)
기드온은 자신을 큰 용사라고 부르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 선지자에게 통해 말씀 하셨던(8-10절) 말씀들을 복기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 버리셨냐고 항변한다(새번역_13절). (한 선지자의 외침을 꼼꼼히 들으며 기억했다.) 기드온은 이미 한 선지자의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강한 불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에게 버리셨습니까?”
*음… 통상적으로 선지자의 신랄한 회개의 외침을 들었다면 회개하기 마련인데… 기드온은 되려 화를 낸다. 특히 지금 현 상황에 대한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도 오직 회개가 아니라 강한 불평이다.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의 반응치고는 상당히 예상에 못미친다. 회개가 아니고 반항이라니…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신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는 친히 너를 세워 그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새번역_14절)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기드온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 할것인지 직접적으로(핑계 하며, 혹은 따져) 묻는다. 자신이 속한 가문(므낫세)과 상황(가장 약함),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형제중 가장 약한데(새번역_15절) 어떻게 하겠냐는 거다. 용사의 조건에 맞지도 않는 자신은 그 일을 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새번역_16절)”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구한다(17절). 그러면서 막연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을 가지고 돌아올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사자는 제물을 바위 위에 진설 하게 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 끝을 내밀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웠다. 동시에 사자가 사라진다(17-21절).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을 가진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에게 맡길 사사의 사명을 생각하는 것 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 했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 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안심하여라.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새번역_23절)” 이라는 3중의 말씀으로 안전을 확증해 주신다.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다.
나는?
*기드온은 끊임없이 “증거, 증표”등을 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랬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세월이 오래됐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확신하는 것 보다 온 몸으로 느껴야 더 확신이 된다. 기드온이나 우리나 매한가지이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 수록 표징을 더 찾기 마련이다. 기록된 말씀, 들려지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 보다 기적을 더 바란다. 기드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 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우리를 버리신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배경도 능력도 없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식으로 개선(?) 되어 간다.
*급기야 이런 모든 회의와 의심, 반문들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는 “여호와 샬롬”, “여호와께서 평안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마침내 드렸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고, 그의 말씀에 비아냥 거렸지만, 그 모든 과정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되살아 났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생각난 것이다. 즉, 말씀이 되살아 났다!
*말씀이 되살아 나니, “샬롬”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에 가득한 불평과 불만, 의심과 반항의 어수선함과 격동, 7년 동안 미디안의 폭거에 쌓인 “화”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스며 든다. 말씀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디어지고 무디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우고, 잊혀졌던 말씀들이 실제가 되게 하며,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지금 이스라엘의 삶에 가득찬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 하시려고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아 “평화와 소망”, “용기”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일어서게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결심한다. 이렇게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며, 보여주시며, 증명(증거)하여 자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이다.
*새파란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 고흥 녹동의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으며 약속했던 철부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 처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 무엇보다 “늘 함께 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사명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받아 주시며 세워 주신 것이다. 내가 잘났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 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며, 무엇보다 “여기까지 함께 하여 주셨기에, 앞으로도 함께 하여 주실 것이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한 없이 철 없는 밀당을 받아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큰 용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셨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밀당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밀당을 하신 것이다. “큰 용사”는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이 채워진 사람이 아니라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큰 용사임을 세세하게 깨닫게 하신다.
*주님, 그 크신 하나님의 함께 해주신 사랑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나의 배경, 소유,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서겠습니다. 세상 속으로 전진하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