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망각이 평화로 포장되어 망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삿 8:22-35]
 – 2021년 11월 18일
– 2021년 11월 18일 –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이를 금새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기드온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황금에봇을 만들고 만다. 아니러니 하게도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의 길로 들어선다. 7년간의 미디안 압제에서는 해방 되어 평화가 찾아 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위협은+ 이미 깊숙히 들어와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히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힐 일이다. 7년동안의 미디안의 압제를 끝낸 그 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래야 하는데, 또 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리라(23절)”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 기드온의 분별함이 감사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어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 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 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에서 이긴 기념물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는 하지 않을 테니, 승전한 탈취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서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로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의 양은 자그만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등이 기드온에게 모아졌다(25-26절). 기드온은 모아진 금 귀고리를 녹여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집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 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만 이었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서 집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지고 올 또 하나님의 우상숭배,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 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든 만들면 섬겨버리는 우상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 개정 번역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 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는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물건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아쉽게도 나도 “하나님처럼” 섬길 수 있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쏘옥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바라보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가 살아있을 동안은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있어 감히 바알을 따르지 않았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의 뜻은 “언약의 주”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유사하게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중에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과(34절)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 도 않고 갚지도 않았음을(35절)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웠던 기드온도 잊혀졌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도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 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 아들이 일흔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이였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 나갈 때 가장 절제 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의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또” ….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 승리에 도취하는 것 보다 그 승리가 의미가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항아리와 횃불,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승리의 종전 현장에서 부터 “망각” 되어졌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면서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쏘옥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과, 더 나아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 처럼, 겉옷을 벗어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이 말만 왕을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이미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 정작 하나님은 잊혀졌다. 450:1의 기적의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시작된 “평화의 시간”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상황은 긴박하지만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그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기드온이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말과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의 아들 이름이 “아비멜렉(아버지는 왕이시다)”으로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다른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 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함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다. 450:1의 기막힐 승전을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의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것을 모른 채 황금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주님, 말과 행동이 이리 다른 기드온이 당황스러운데, 저도 매한가지라 스스로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가장 기쁘고 즐거운 승리(성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더욱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드리겠습니다.
*주님, 망각이 평화로 포장되어 망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늘 경계(분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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