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이 많은 아들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세겜 첩(필레게쉬_두 번째 아내라는 의미이지만 정식 아내이다)의 아들이다. 그는 세겜으로 와서 왕이 될 계획을 세우고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후원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세겜의 왕이 된다. 이런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19상) “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 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여룹바알”,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의 의미는 “언약의 주, 언약의 신”으로 “엘 브릿”으로도 불리우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컨데 세겜은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호의적일 수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를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찾아 오면서 이 서사는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아비멜렉이 아버지의 이름을 기드온으로 부르지 않고 여룹바알로 사용하여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 넣어 자기 세력화 하려는 것을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혈연에 호소했다(1-3절).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 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 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기울어져”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자신의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핀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의 말에 현혹 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 시킨다. 한쪽으로 치우치고 반드시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객관적으로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 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에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사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의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기드온에게 건넨다. 흘려 보낼 수 있지만, 바알브릿의 신전에서 은 70개’를 내어 준 것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아비멜렉은 방탕하며 살았다. 바알의 원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 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되 “폭력배”들을 산다.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을 가지고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목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 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 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 시켜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하고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가족과 하나님은 왕이 되려는 길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되었던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 된 땅이었고 그곳에는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 인간 왕이 스스로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부쳐 공포로 몰아부쳐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악이 득세하도록 하나님은 “자기 손견대로” 왕이 되고자하는 아비멜렉을 지켜 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악행을 정당화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에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 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의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 간데 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진다면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내가 투영 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대선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을 ‘분노’하게하여 자기 세력화 하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화 하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역사가 확연히 변화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예측하는 시대, 공교롭게도 우리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열어갈 지도자는 적어도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겨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 비전이나 철학이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세력화 하려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세월 이 폐해를 여지껏 받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가 국민의 심판을 준엄하게 받게 되는 대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주님, 대선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세워 지리라 기대합니다.
**주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비전, 철학, 사명이 있는 지도자를 세워 주십시오. 단지 “분노”에 자극 받아, 혈연과 지연이기에 무작정 선택하지 않기를 빕니다. 제게 지각을 주십시오!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