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담의 저주가 성취가 되었다. 가알의 농간에 세겜 사람들을 오해하여 진멸하고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 세겜 망대에 피해있던 나머지 주민들은 엘브릿 신전의 보루(은밀한 곳)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그 보루의 입구에 불을 질러 1,000명을 몰살 시켰다. 이복 형제들 70명을 몰살 시키며 왕에 오른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겜 사람들을 진멸 시켰다(46-49절).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20절)” 그대로 이루어 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을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에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치욕을 당할 수 없어 무기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느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5-7)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 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 없는 선택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갚으신다.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파멸에 이르는 순간 까지도
아베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와서 쌓았다. 백성들은 “아베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1,000명을 죽인다. 형제들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 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두개골이 깨져 버린 것이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 당했다고 손가락질 당할 자신만 생각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 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했던 그 저주가 이뤄지는 것에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 뿐이었다.
나는?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 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가는 것과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 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부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혀진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 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순간이 남아 있었다.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을 수 있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주님, 짤막한 순간 속에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은혜를 붙잡겠습니다.
*주님,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 때 죄의 유혹을 견뎌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