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암몬의 억지는 대단했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전에 앞서 입다는 경솔한 약속을 하고 만다. 아무리 승리에 대한 열망이 크다 하여도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하고 만다. 이렇게 라도 반드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서원은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다. 성경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서원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약속하는 것’ 이어야 한다. 하지만 입다는 ‘어떤 것을 얻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렇게 하신 중요한 이유를 본문이 제시한다.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지 혹시 하나님의 법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 아무리 시급하고 절실 하여도 함부로 서원하지 말아야 한다.
1.하나님의 영이 임하다(29절)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를 노련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듯이 암몬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라고 하셨기에 암몬 왕의 마음을 강팍해 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치열했던 외교전을 마무리하자 마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입다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해 정통했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판결(판단) 하실 것을 선언 하였기에(27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서 “승리”에 댜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그러나(30-31절)
그러나 입다는 쓸데없는 서원을 한다. 출정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다면 다시 하나님께 승리의 확신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입다는 300년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에 대해 해박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했다. 또한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제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고 금지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상식적인 시각을 가지고 암몬과 담판 했던 그라면 승전하며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영접 하러 나오는 이가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왜 못했을까? 또, 그는 ‘돕’ 땅에서 “큰 용사”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가 열렬히 환영하며 나올른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 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3.어쩌면 나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에 대하여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목적 성취를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원인 제공은 아비인 입다가 하고 결과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아비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던 순수한 딸이 져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우리의 삶에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기성세대가 제공하고 이에 따른 결과는 다음세대가 지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하나같이 기성세대의 변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목적 중심 사고가 가져오는 무수한 삶의 위기는 본인 뿐 아니라 가정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 된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위험 요소가 된다. 인간관계의 일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본다면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지금은 적합하게 결정한 듯 하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될 정책들이 왜 없을까! 지금 살아가는 세대는 편리할 수 있지만 후손들은 고통 받고 살아야 할 일들이 왜 없을까!
기후재앙, 원자력, 빈곤의 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나 기후재앙이나 원자력(특히 후쿠시마 원자력 폐냉각수 배출 문제 같은) 문제는 이미 우리 세대에서도 실감하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도 더욱 고통 받을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 땅에 나온다는 것이다. 입다의 서원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입다의 딸의 인신제사를 왜 막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고통스럽다. 또, 인신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계층들의 거센 만류가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생가하면 생각할 수록 고통스럽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한 시대였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향력이 왜소했을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서원”이라는 형식이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조차 “서원”이라는 형식이 씌워졌으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어쩌면 이런 딜레마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리한 서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약속에 천착하여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입다의 모델이 있음에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죄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주님, 이해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며 담대 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형식에 함몰되어 진리의 뜻과 의미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