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32:1-14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 진노 중에라도….
금송아지 사건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40일 동안 산 아래에서 심각한 일이 일어난다. 모세를 하염 없이 기다리던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가서 그의 생사를 알수없으니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떼를 쓴다. 아론은 백성들이 귀에서 빼어 모은 금 고리를 녹여 붓고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것이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선포하고 제단을 쌓고 공포하여 임의로 내일이 “여호와의 명절”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음 날 일찌기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고 모세는 간절히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 장면을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이라 했다.
*20장에서 십계명을 받으며 두렵고 떨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본 그 이스라엘 백성이 맞나?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20:23)”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는데, 그 말씀은 온 간데 없다. 이미 십계명과 지켜야 할 말씀(율법)을 받았음에도 말씀이 부재하니 그렇게 두려워하며 떨던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으나 말씀의 실재가 없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다!
1.금송아지(1-6절)
백성들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아무런 기별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애굽한 이후 우여곡절 끝에 시내산 까지 도착했지만, 20장의 십계명을 들려 주신 이후에 도무지 감감무소식이다.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워 죽을까 하여 모세를 통해 전달 받겠다는 간청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말씀을 들으러 올라간 모세가 기별이 없자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은 아론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압박한다. 아론은 백성들의 압박을 강단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들이 내어 놓은 금고리들을 녹여 붓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명절”을 선포하고 애굽에서 본 것과 같은 난잡한 제사의식을 무기력하게 바라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장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20:22). 그리고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동의하였다(24:3, 7). 그런데도 모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며,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1-6절).
*스데반은 이 사건을 설교하며,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거절하여”,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행 7:39) 하였다고 했다.
20장에서 보여주시고 들려 주셨던 말씀을 “거절한 것”이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거부하고 다시 애굽땅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애굽의 신들 중의 하나인 송아지 신상을 만든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아론은 금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금송아지를 백성들이 요구한 “우리를 인도할 신(1절)”으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4절)” 라고 했다. “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엘로힘”이다. 정확한 번역은 “신들”이다. 특히 4절의 “너희의 신이로다”는 직역하면 “너희의 신들이다(엘레 엘로헤이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여호와 이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5절에서 아론이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절기)”이라고 선포 하는 것과도 연결 된다.
*20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 중 1계명과 2계명(20:3-6)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지 40여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그들은 시내산의 하나님 말고 “자신들을(우리를) 위해 우리를 인도할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더 기막힌 것은 이렇게 만든 “또 하나의 신”에게 불과 얼마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동의하며 시내산 기슭에서 “여호와께 드렸던 번제와 화목제”를(24:5) 금송아지 앞에서 드린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백성 되겠다며 드린 그 제사를 난잡한 애굽의 우상 제사와 같은 것으로 전락 시켜 버렸다.
*하나님만 신실하게 섬겨야 할 첫 걸음부터 불과 40여일 가까이 모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지 않는 부재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2.하나님의 진노(7-10절)
여호와는 이 모든 일을 지켜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 하신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새번역_7절)”
“네가(모세가) 이즙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모세의) 백성”이라니… 그리고는 시내산 아래에서 백성들에게 아론이 외친 말을 그대로 재현하셨다(8절). 하나님의 깊은 실망감과 한탄이 뼈져리게 느껴진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새번역_9하-10상)”
*하나님의 실망감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상실된 마음은 급기야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새번역_10하)”는 말씀에 그 상실감, 분노…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망한 하나님은 거침이 없으셨다. 고민도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완전히 쳐서 없애버리고, 모세의 후손으로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시고, 모세를 세워 600여년 전 아브라함 처럼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일어났을까? “모세의 부재”였다. 그의 부재는 곧 “말씀의 부재”가 되고 말았다!
3.모세의 중보(11-14절)
모세는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이스라엘 백성에 내리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네가 이끌어낸 너의 백성”이라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11, 12절)”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의 손에 진멸 당하면 곧 이방 민족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12절) 감히 고백한다. 또,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을 기억해 주시라고 간청한다. 특히 그들에게 하셨던 맹세의 약속, 즉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13절)”고 하신 약속을 고하였다.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든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임한다!.
*무엇보다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반박했다. 하나님은 결국 그 뜻을 돌이키셨다(14절). 이것이 건강한 신앙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말씀)에 충실하고 성실하면, 진노 중에라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다. 모세의 중보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여 고한 기도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떼를 쓰듯 무조건 매달리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결정 앞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맹세의 말씀을 근거로 감히 “당당히” 고할 수 있었다.
나는?
-백성들은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보이지 않는 모세의 부재를 자신들이 원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금송아지” 만들어 섬겼다. 삶을 살아가며 언제든 말씀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 지지도 않는 암흑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다. 또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듯한 “관계의 부재”, 특히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해 주던 믿음의 사람이 부재해 질 때, 가장 연약한 마음에 강력한 사단의 유혹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들리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자신의 아우성을 들려 주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부재를 대치한다.
-말씀이 잘 깨달아 지지 않을 수록, 들리지 않을 수록 조금만 더 “구원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시편 62편)”
-주님께서 광야에서 극심한 40일 동안의 금식 끝자락에 사탄에게 받으셨던 말씀의 부재,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부재를 이겨내셨던 믿음을 기억해 보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선포해 보자!
-비록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답답하고 캄캄한 길 위라도… 성령께서 비춰 주시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게 하실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문제 해결의 방법인가!
-말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을 때는 전에 들려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꺼내 들어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춘다.
-모세라는 지도자가 부재 하게 될 때에 아론이 그 역할을 대신 하였지만, 그는 백성을 지도하기 보다, 백성에게 끌려 다니고 말았다!. 백성들을 무조건 억압하고 강제해서도 안되지만, 백성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면 안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받는다.
-지도자의 자리에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자신들을 애굽에서부터 시내산까지 진두지휘하며 이끈 모세가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찾아간 아론이었지만 그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요구를 수용할 뿐 “지도”하지 못했다. 최소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려 보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대체 신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어쩌면 명확한 “지도”가 없는 아론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 있다.
-더온누리 공동체를 섬기는 자리에서 오늘 본문의 “모세 부재 상황”에 마음이 쓰인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올 영적 위기를 분별하여 지혜롭게 대처해야 겠다. 적어도 “구원과 소망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권면이라도 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로움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을 지라도 구원과 소망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약속하신 것에 철저 하시기에, 반드시 응답해 주심을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나의 길을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 더욱 약속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혹시 범죄하여 받는 진노 중에라도 약속의 말씀이 나를 이끄실 줄 믿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40일 동안 산 아래에서 심각한 일이 일어난다. 모세를 하염 없이 기다리던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가서 그의 생사를 알수없으니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떼를 쓴다. 아론은 백성들이 귀에서 빼어 모은 금 고리를 녹여 붓고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것이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선포하고 제단을 쌓고 공포하여 임의로 내일이 “여호와의 명절”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음 날 일찌기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고 모세는 간절히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 장면을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이라 했다.
*20장에서 십계명을 받으며 두렵고 떨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본 그 이스라엘 백성이 맞나?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20:23)”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는데, 그 말씀은 온 간데 없다. 이미 십계명과 지켜야 할 말씀(율법)을 받았음에도 말씀이 부재하니 그렇게 두려워하며 떨던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으나 말씀의 실재가 없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다!
1.금송아지(1-6절)
백성들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아무런 기별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애굽한 이후 우여곡절 끝에 시내산 까지 도착했지만, 20장의 십계명을 들려 주신 이후에 도무지 감감무소식이다.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워 죽을까 하여 모세를 통해 전달 받겠다는 간청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말씀을 들으러 올라간 모세가 기별이 없자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은 아론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압박한다. 아론은 백성들의 압박을 강단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들이 내어 놓은 금고리들을 녹여 붓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명절”을 선포하고 애굽에서 본 것과 같은 난잡한 제사의식을 무기력하게 바라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장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20:22). 그리고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동의하였다(24:3, 7). 그런데도 모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며,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1-6절).
*스데반은 이 사건을 설교하며,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거절하여”,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행 7:39) 하였다고 했다.
20장에서 보여주시고 들려 주셨던 말씀을 “거절한 것”이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거부하고 다시 애굽땅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애굽의 신들 중의 하나인 송아지 신상을 만든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아론은 금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금송아지를 백성들이 요구한 “우리를 인도할 신(1절)”으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4절)” 라고 했다. “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엘로힘”이다. 정확한 번역은 “신들”이다. 특히 4절의 “너희의 신이로다”는 직역하면 “너희의 신들이다(엘레 엘로헤이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여호와 이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5절에서 아론이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절기)”이라고 선포 하는 것과도 연결 된다.
*20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 중 1계명과 2계명(20:3-6)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지 40여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그들은 시내산의 하나님 말고 “자신들을(우리를) 위해 우리를 인도할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더 기막힌 것은 이렇게 만든 “또 하나의 신”에게 불과 얼마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동의하며 시내산 기슭에서 “여호와께 드렸던 번제와 화목제”를(24:5) 금송아지 앞에서 드린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백성 되겠다며 드린 그 제사를 난잡한 애굽의 우상 제사와 같은 것으로 전락 시켜 버렸다.
*하나님만 신실하게 섬겨야 할 첫 걸음부터 불과 40여일 가까이 모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지 않는 부재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2.하나님의 진노(7-10절)
여호와는 이 모든 일을 지켜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 하신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새번역_7절)”
“네가(모세가) 이즙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모세의) 백성”이라니… 그리고는 시내산 아래에서 백성들에게 아론이 외친 말을 그대로 재현하셨다(8절). 하나님의 깊은 실망감과 한탄이 뼈져리게 느껴진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새번역_9하-10상)”
*하나님의 실망감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상실된 마음은 급기야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새번역_10하)”는 말씀에 그 상실감, 분노…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망한 하나님은 거침이 없으셨다. 고민도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완전히 쳐서 없애버리고, 모세의 후손으로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시고, 모세를 세워 600여년 전 아브라함 처럼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일어났을까? “모세의 부재”였다. 그의 부재는 곧 “말씀의 부재”가 되고 말았다!
3.모세의 중보(11-14절)
모세는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이스라엘 백성에 내리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네가 이끌어낸 너의 백성”이라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11, 12절)”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의 손에 진멸 당하면 곧 이방 민족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12절) 감히 고백한다. 또,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을 기억해 주시라고 간청한다. 특히 그들에게 하셨던 맹세의 약속, 즉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13절)”고 하신 약속을 고하였다.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든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임한다!.
*무엇보다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반박했다. 하나님은 결국 그 뜻을 돌이키셨다(14절). 이것이 건강한 신앙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말씀)에 충실하고 성실하면, 진노 중에라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다. 모세의 중보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여 고한 기도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떼를 쓰듯 무조건 매달리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결정 앞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맹세의 말씀을 근거로 감히 “당당히” 고할 수 있었다.
나는?
-백성들은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보이지 않는 모세의 부재를 자신들이 원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금송아지” 만들어 섬겼다. 삶을 살아가며 언제든 말씀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 지지도 않는 암흑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다. 또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듯한 “관계의 부재”, 특히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해 주던 믿음의 사람이 부재해 질 때, 가장 연약한 마음에 강력한 사단의 유혹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들리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자신의 아우성을 들려 주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부재를 대치한다.
-말씀이 잘 깨달아 지지 않을 수록, 들리지 않을 수록 조금만 더 “구원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시편 62편)”
-주님께서 광야에서 극심한 40일 동안의 금식 끝자락에 사탄에게 받으셨던 말씀의 부재,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부재를 이겨내셨던 믿음을 기억해 보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선포해 보자!
-비록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답답하고 캄캄한 길 위라도… 성령께서 비춰 주시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게 하실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문제 해결의 방법인가!
-말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을 때는 전에 들려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꺼내 들어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춘다.
-모세라는 지도자가 부재 하게 될 때에 아론이 그 역할을 대신 하였지만, 그는 백성을 지도하기 보다, 백성에게 끌려 다니고 말았다!. 백성들을 무조건 억압하고 강제해서도 안되지만, 백성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면 안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받는다.
-지도자의 자리에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자신들을 애굽에서부터 시내산까지 진두지휘하며 이끈 모세가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찾아간 아론이었지만 그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요구를 수용할 뿐 “지도”하지 못했다. 최소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려 보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대체 신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어쩌면 명확한 “지도”가 없는 아론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 있다.
-더온누리 공동체를 섬기는 자리에서 오늘 본문의 “모세 부재 상황”에 마음이 쓰인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올 영적 위기를 분별하여 지혜롭게 대처해야 겠다. 적어도 “구원과 소망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권면이라도 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로움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을 지라도 구원과 소망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약속하신 것에 철저 하시기에, 반드시 응답해 주심을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나의 길을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 더욱 약속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혹시 범죄하여 받는 진노 중에라도 약속의 말씀이 나를 이끄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