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공감은 온 간데없고 비난에 빠지다 [욥 15:1-16]
 – 2023년 11월 19일
– 2023년 11월 19일 –
세 친구와 두 번째 논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그저 첫 번째 논쟁이 반복될 뿐이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친구들의 말은 짧아지면서 고난과 아픔의 문제에 점점 더 둔감해지고 규범적 지혜의 신학을 더욱 강조한다. 사람은 사라지고 원리와 원칙만 남는 형세다. 격렬한 논쟁으로 치닫는 만큼 주장과 감정이 심화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결백을 주장하자 그런 욥의 주장에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한다. 먼저 말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과 욥이 무죄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도 화를 내면서 자신들이 더 지혜로운 자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주장하므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반박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욥의 발언을 평가하고 반박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17~35절까지 엘리바스는 자신의 규범적 지혜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상대방의 주장을 약하게 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엘리바스의 반박 논지는 욥이 한 말들 가운데 정확하게 어떤 말이나 표현을 반박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1. 욥에 대한 반박 : 네가 스스로 정죄하고 있다(1~6절).
자신들이 열심히 설득했지만, 욥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지혜가 없다고 반박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욥을 바라보며 엘리바스가 다시 연설을 시작한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두 가지를 진단한다. 먼저 욥의 말은 지혜가 없는 헛소리이고, 욥의 무죄 주장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2~3절은 두 문장의 수사의문문을 사용했다. 만일 욥이 지혜로운 자라면 바람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고 뜨겁고 사나운 동풍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서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말을 쏟아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욥이 지혜롭지 않고 감정에 사로잡혀 쏟아낸 말들은 모두 헛소리 혹은 쓸데없는 소리라는 진단이다. 그러면서 욥은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섬기지도 않는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한다(4절). 지혜 전통(잠 1: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지혜를 버린 것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욥의 감정적인 입술의 호소가 지혜 대신 죄가 그의 입술을 주장하는 증거이기에 욥이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말들 자체가 욥이 죄인인 것을 증명해 준다고 말한다(5~6절). 5절의 “간사한 자의 혀”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리하다”라는 의미지만, 나쁜 의미로 쓰일 때는 “간사하다, 교활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창세기 3:1에서 뱀에 대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엘리바스는 참다운 지혜의 말과 대조하여 욥이 교활한 괴변과 다름없는 지혜 없는 말, 뜨거운 바람과 같은 말을 쏟아내므로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욥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않고 고통 중에 부르짖는 말을 꼬투리 잡는 행태다. 고통당하는 자를 훈계하는 것은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대신 그가 고통 중에 부르짖는 감정적인 호소를 비난한다. 그 와중에 욥이 보인 태도와 말이 그가 스스로 죄인 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고통을 주신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또 고통당하는 당사자의 아픔도 다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섣부른 충고와 훈계는 오히려 고난 중에 있는 자를 낙망하게 할 수 있다. 나는 고통 당하는 형제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2. 욥에 대한 반박 : 너만 홀로 지혜를 가졌느냐? (7~16절)
엘리바스는 계속 욥이 지혜자일 수 없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증하려고 한다. 7~13절에서 먼저 자신이 연장자이며 더 지혜로운 자이기 때문에 욥에 대해 이런 지적을 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욥의 분노에 찬 말을 책망한다. 욥은 12~13장에서 자신도 친구들만큼 혹은 그 이상의 지혜가 있음을 주장했다. 특히 13장 12절에 4장 19절~21절의 엘리바스의 비유를 사용하여 엘리바스와 친구들의 격언이 재 같고 무너지는 토성과 같다고 비유하며 그들의 충고를 거부해 버렸다. 자신이 더 친구들보다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욥의 주장에 대해 7~10절을 통해 자신이 더 지혜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욥을 반박하기 위해 질문한다. 먼저 욥에게 창조 이전부터 존재한 선제적 지혜를 가졌느냐고 묻는다. ‘네가 제일 처음 태어난 사람이냐? (7절) 라고, 물으며 욥의 지혜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것임을 증명하려 했다. 또 두 번째로 하늘의 천상 회의에 참석하여 그들의 비밀스러운 지혜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8절). 구약 성경에서는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하늘의 천상 회의에서 들었다고 말했다. 욥이 이런 특별한 지혜를 받았을 리 없다는 것이다. 즉 욥은 자신들과 다름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욥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다. 심지어는 아버지뻘 되는 경륜을 가진 지혜자 집단일 것을 주장하며 경험이 미약한 욥보다 훨씬 지혜롭다고 주장한다. 결국 엘리바스는 욥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나이와 경험으로 증명하려 한 것이다.
   
엘리바스가 자신의 관점으로 친구이자 후배인 욥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징계이므로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회복을 맛보라고 조언했었다(4~5장).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장이었지 아무 죄 없이 고난이 닥치고 있는 욥의 입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화를 내는 욥에게 화를 내며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의 모습으로 단정하고 책망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교리적 확신에 사로잡혀 욥의 이야기를 전혀 들어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11~13절).
 
그러면서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깨끗할 수 있느냐며 욥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거룩한 자라고 말하는 인간이나, 하늘로 상징되는 천상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깨끗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14~15절). 이렇게 인간은 존재 자체가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시는 것같이 하는 존재인데(16절)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욥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죄가 있으므로 고난을 받는 것이니 빨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런 엘리바스의 말은 나름대로 욥을 배려한 것이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연약함 때문에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으며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그만 고집 피우고 빨리 죄를 자복하고 이 고난에서 벗어나라는 애정 어린 충고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거쳐 내려온 전통적인 지식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엘리바스는 경험 많은 지혜자들의 훈계를 무시하고, 홀로 지혜자로 자처한다고 비꼬아 말한다. 하지만 욥의 항변은 당시의 전통적인 신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정직한 물음이었다. 혹시 우리도 나와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쉽게 예단하고 대화 상대에게 배제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무조건적 순응보다는 정직한 질문을 원하신다. 엘리바스는 욥이 부드러운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고 거칠게 자기 마음을 표출했다고 훈계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조언은 정작 당사자인 욥에게 위로가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욥의 상처를 찌르는 폭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정직한 반응을 통해 그를 다듬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속마음을 감추지 말고 하나님께 토로해야 한다.
   
*엘리바스는 하나님 앞에 깨끗한 피조물이 없으며 부패하고 죄 많은 사람이 결코 자기 의를 주장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옳지만, 욥의 상황에 적절하지 못하다. 옳은 말이 항상 적절한 것은 아니다. 적절하지 못한 옳은 말은 형제를 낙심케 할 수 있다. 지금 고통 중에 있는 형제를 위해 나는 어떻게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신앙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어떤 사안에 대한 다층적인 견해들이 존재한다.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주장이 용납되기 어려운 시대이다. 진리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견해만이 유일한 것인 양 주장하면 독선과 배제와 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이 커진다.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올바른 지혜에 이를 수 있도록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한다.
   
*맹목적인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엘리바스는 풍부한 경험을 갖춘 지혜자였다. 그래서 무게 있는 말로 욥을 훈계한다. 욥의 말이 궤변에 불과하고 쓸데없는 말로 논쟁을 불러온다고 책망했다. 욥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행동조차 무익한 것으로 만들며,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불경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너만 홀로 지혜를 가졌느냐고 추궁하며 조상들의 전통을 빌어 굴복시키려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위로조차 거부하는 교만한 자라고 질타한다. 엘리바스는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형성한 하나님 이해와 신앙의 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적 전통을 유일한 것으로 고집하기 때문이다. 더욱 온전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추종”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고,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라고 정죄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인간의 부패와 죄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는 천사들마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푸른 하늘조차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한다. 하물며 죄악을 물을 마시듯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증스럽지 않겠냐며 욥을 타이른다.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확신하는 지식이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 이성을 뛰어넘는 영역을 인정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한 자가 진리에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상황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운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는 자기 경험과 조상들의 전통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인은 환란과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평생을 두려움 중에 살게 되며, 재난과 굶주림의 고통에서 헤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악인의 무모한 대항은 멸망으로 끝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도 반드시 적절한 말이 될 수는 없다. 일반론으로는 맞으나 욥 앞에서 이 말이 적절한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옳고 바른말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진단과 지혜로운 사랑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고통 중에 있는 형제를 진정 돕고자 한다면 상황에 대한 분별력을 갖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무조건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하는 교훈은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을 스스로 오류에 빠뜨려 신뢰성을 추락시킨다. 엘리바스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고 있는 욥에 대한 공감은 온 간데없고 비난에 빠져 버렸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지혜롭게 숙고해야 할 지혜자로서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주님, 공감해야 할 때 비난하는 엘리바스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 반드시 적절한 말이 될 수 없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에게 옳은 말도 중요하나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이 더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적절한 말에 공감을 담아 전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